구라산성謳羅山城 구녀성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구라산 (구녀산 해발 497m)
▣ 시대 : 삼국시대(6세기 경)
▣ 문화재지정 :
▣ 규모 : 둘레 860m, 높이
▣ 시설 : 문지, 수구문, 우물, 건물지, 사찰지(구려사)
▣ 형식 : 내외 협축 테메식 산성
▣ 답사일 : 2017년 7월 9일
내용
둘레 약 860m. 일명 구녀성(九女城)이라 한다. 현재 문지(門址)·수구문·우물·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구녀산(九女山, 497m)의 정상부와 동남쪽으로 낮아지면서 형성된 작은 계곡의 중턱을 에워싸는데, 보은·미원을 거쳐 진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고갯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은 자연석 또는 활석을 이용하여 내외협축(內外夾築: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은 것)을 하였으나 붕괴가 심하고, 서쪽 벽의 일부는 높이 5m 이상 남은 곳이 있어서 축성방법을 알 수 있다. 골짜기에 수구(水口)가 있고 그 동쪽에 남문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 구려사(句麗寺)라는 사찰과 석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평탄한 건물터와 우물만이 있다.
성의 명칭으로 보아 고구려가 남하했던 6세기경의 축성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고, 삼국시대의 고을터라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다. 이 산성의 북쪽 아래에는 유명한 초정약수(椒井藥水)가 있으며 인근의 북이면 토성리와 부연리에 걸쳐 낭비성(娘臂城)과 노고성(老姑城) 등이 있다. 이 산성에는 아홉명의 여자와 관계된 축성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며 성내에 이들의 것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남아 있다.
잡목 속에 숨어 있는 구라산성
상당산성 답사를 마치고 12시가 다 되어 구라산성으로 출발했다. 아마 20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상당산성에서 율량동으로 나와서 증평까지 가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초정으로 우회전하여 바로 이티재 휴게소 마당에 주차했다. 이티재 휴게소 마당은 이제 휴게소가 아니다. 아마도 이곳이 개인 소유의 땅인가 보다. 상당산성 쪽에서 내려오는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이 이티재를 건너면 바로 구녀산성을 지나 질마재로 향하게 되어 있다. 언젠가 어린이 회관에서 출발하여 구녀산성은 거쳐 초정까지 6시간을 걸은 적이 있다. 그런데 구라산성(구녀성)으로 올라가는 마루금이 마구 훼손되고 팬션인지 건물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규모가 크고 집이 많아 구라산성 진입로를 찾을 수가 없다. 이티재는 보은에서 미원 낭성을 거쳐 이 고개를 넘어 초정을 지나 내수를 지나면 진천 소두머니를 지나고 바로 농다리를 건너 진천으로 통할 수 있다. 농다리 주변에 가면 신라시대에 진천에서 구라산성을 가기 위해 농다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사장으로 걸어갔다. 인부들이 쳐다본다. 그래도 그냥 건물을 짓는 사이사이로 빠져 나가 공사장이 끝날 무렵 마루금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소나무숲이다. 이런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건물의 숲으로 바뀐 것이다. 솔숲 사이를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마 끝에 날씨가 워낙 더워서 산행 엄두도 못낼 것이다. 이티재에서 구라산성이 있는 정상까지는 2km도 안될 것이다. 그런데 힘이 없어 그런지 꽤나 오래 걸리는 기분이다. 땀이 온몸을 적셨다. 바지까지 젖어서 물이 떨어질 지경이다. 노인 한 분이 내려온다. 점잖은 분이 산길을 혼자 걷는다. 물어보니 질마재에서부터 걸었다고 한다. 땀도 흘리지 않은 것 같다. 대단한 분이다.
다시 혼자서 걸어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된비알을 한 10여 분 숨가쁘게 오르니 잡목 사이로 성벽이 보였다. 성벽은 대전 동구 질현성보다도 더 높고 규모가 크다. 바로 성벽으로 갈까 하다가 잡목이 너무 많아 그대로 성으로 올라갔다. 바로 문지로 보이는 성벽 위이다. 이곳이 아마도 남문지인가 보다 버릇처럼 오른 쪽으로 성벽 위를 걸었다. 돌은 검게 산화되었다. 자연석이다. 다듬지 않고 그냥 쌓은 것이 거의 무너졌다. 그런데 언뜻보아도 외축내탁공법이 아니라 협축석성이다. 외벽과 내벽의 높이는 달라도 내외의 성벽이 모두 석성이다. 길은 전혀 없다. 기록에 둘레가 860m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라니까 끝까지 걸어 한 바퀴 도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성벽 위를 걸으면서도 계속 외벽을 살폈다. 성벽이 워낙 높고 수직이라 외벽의 모습을 관찰할 수 없었다. 한 150m쯤 가다가 되돌아 왔다.
성의 내부는 평평한 대지이다. 평평한 곳에 우물지고 건물지고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졌다. 구라사라는 성내 사찰이 있어서 절터와 탑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찾을 수가 없다. 도로에서 멀지 않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으니 탑도 도난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서벽을 보려고 서벽 위를 걸었다. 성은 구녀산의 정상을 띠를 두르듯이 돌려 축성한 것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비스듬이 계곡을 둘러싸고 있다. 서벽은 남벽에 비해 높지 않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다.
자꾸 남벽이 궁금해져서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구녀성 전설에 나오는 무덤 11기를 확인해야 한다. 구녀산 정상까지 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니 동쪽 구릉에 무덤이 있었다. 무덤은 아래 위로 나누어 11기가 있고 위에는 상돌도 있었다. 누군가 상돌에 술잔을 부어 놓은 흔적이 남았다. 술잔이 무덤의 딱한 영혼을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기도인지 알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까지 올라와 잔을 따르는 것을 보면 그 ㅈ어성도 대단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인정도 많고 낭만적이다. 전설상의 인물들에게 술잔을 마련해 놓는 여유가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묘지는 누군가 해마다 벌초까지 하는 것 같다. 봉분이 뚜렷하고 크지는 않지만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제절에 패랭이꽃이 소담하다.
<구녀성 전설>
구녀성은 청원군 미원리 소재지에서 동 북방 약 10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오랜 옛날 이 곳 산정에 아들 나와 아홉 딸을 가진 홀어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남매들은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다툼을 계속해 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들은 생사를 걸고 내기를 하기에 이르 렀다. 즉 딸 아홉 남매는 구녀산정에 성을 쌓는 동안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 (임금이 있는곳) 을 다녀오기로 했다. 이 내기에서 지는 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으로 약속을 했다.
이리해서 마침내 아홉딸은 돌을 운반해서 성을 쌓기 시작 했고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향해 출발을 했다. 한편 자식들의 이와 같은 생사를 건 내기를 비탄한 마음으로 바라다보고 있던 어머 니는 몇 번인가 그런 것을 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듣지 않아 체념을 하고 말았다.
내기를 시작한지 5일 되던날 그 어머니가 상황을 살펴보니까 아직 서울 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는데 딸들이 시작한 성쌓기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필연코 아들이 져서 약속대로 죽음을 면할 수 없리라 생각한 어머니는 커다란 가마솥에 팥죽을 한숱 끓 여가지고와 딸들에세 피곤도 하고 배도 고풀터이니 팥죽이라도 먹고 시작을 하라고 권했다. 이에 아홉 딸들이 일손을 멈츄고 서울길을 바라다 보니 동생이 돌아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제 성은 죽 한 그릇 먹는시간이면 능히 마루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두 죽함지에 모여들어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 한 번 죽맛을 본 딸들은 그 팥죽이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수저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죽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배를 채울 수도 없이 초조롭게 식히고 있는 사이에 아들은 부푼발가락에 피를 흘리며 당도했다. 그것은 실로 죽 한 그룻을 식혀 먹는 시간 사이였다.
마침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내기에 패한 아홉딸들은 그들이 쌓아올린 성벽에 올라가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아홉누이의 시체를 앞에 놓고 부질 없는 불화로 목숨을 잃게 한 동생은 비로서 그 의 허황하고 쓸모 없었든 행위로 말미암아 홀어머니에 불효를 한 것을 크게 뉘우치고 그곳을 떠나 개골산으로 돌아가 누이동생들이 명복을 빌며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멀리 떠난 이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홀어머니는 먼저 죽은 영감의 무덤앞에 아홉 딸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쓸쓸한 여생을 보내다가 끝내 아들을 만나보지 못한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근동 마을 사람들이 그 영감곁에 홀어머니의 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 오늘의 열한무덤의 유래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무덤은 그 열한가족의 무덤이 아니라 실상은 후세에 명망을 찾아 마련된 다른 사람의 무덤인 것으로 보이나 무덤의 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아홉딸과 외아들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을 더욱 살감있게 뒷침해주고 있다.
이 전설은 우리나라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오누이 성쌓기 내기 전설이다. 비극적 결말을 가진 이 이야기는 성이 완성된 후에 근동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면서 가감되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다. 임존성의 묘순이 바위, 부강 노고산성의 노고할미 이야기가 모두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유형의 전설이다.
이 이야기가 만들어 진 것은 구라산에서 구려성 구녀성으로 명칭이 변천되는 과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고구려산성이라는 뜻에서 구려산성이었다가 고구려와 신의 산성이란 뜻으로 구라산성이 되고 구려산성이 구녀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구녀산성이란 명칭이 생기니까 아울러 '구녀九女'란 말을 토대로 오누이 성쌓기 내기 전설이 만들어 졌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설이 구전되면서 주변에 알려지니 자연스럽게 구녀산성이라 불리어 지금은 모두가 그렇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정표
자연석으로 쌓은 모습
남벽의 모습
성벽
흙 속에 묻힌 성벽
서벽의 모습
문지인가
잡목에 뒤덮인 성의 내부
축성의 못습이 보이는 곳
아홉자매와 어머니의 무덤
남벽으로 갔다. 나무와 풀을 헤치고 남벽 바로 아래까지 갔으나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도로 성벽 위로 올라가서 벽을 타고 내려오기 좋은 곳으로 내려와 버렸다. 아주 쉽게 내려설 수가 있었따. 돌이 무너지거나 뱀이 나올지 몰라 조심조심했다. 성벽 바로 아래에 내려가서 올려다 보면서 내 키로 가늠해 보니 남은 성벽의 높이가 5m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았으나 매우 정교하게 쌓아서 튼튼해 보였다.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 원형이 보존되었는지 모른다.
무너진 단면을 살펴보니 외벽과 내벽을 쌓은 다음 가운데는 잔 자갈과 흙을 넣고 다진 것이다. 외벽은 비교적 큰돌을 보기 좋은면이 밖으로 나가게 하여 쌓았다. 성석에는 돌이끼가 끼었으나 앞으로도 1000년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무 등걸을 잡고 다시 성벽 위로 올라갓다.
청주 상당산성이나 이곳 내수지방이나 삼국시대부터 삼국의 세력 확장의 최전방이다. 그래서 삼국의 세력 우열에 따라 주인은 뒤바뀌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엔 이곳이 백제 땅이었을 것이다. 백제 다루왕은 즉위 36년(AD63) 이곳을 차지해 버린다. 그러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의 손으로 넘어간다. 백제는 고구려의 세력을 피해 한성백제 시대를 접고 웅진으로 천도한다. 신라도 단양의 죽령 이북 땅을 고구려에게 잃었다. 결국 신라 진평왕대에 진천에서 태어나 이곳의 지형을 잘아는 김유신 장군에 의해 낭비성에서 고구려 군사 5000이 목베이고 신라가 차지해 버린다. 후백제 시대에도 견훤과 궁예가 이 땅을 빼앗기고 빼앗기를 반복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러므로 산성은 상당히 쓰임만큼 견고하게 쌓게 되었을 것이다.
구녀산성, 구라산성 등의 명칭도 뺏고 빼앗겼던 성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땀에 범벅이 되어 기진맥진했다. 등산과 다르게 산성답사는 진을 빼앗기는 기분이다. 야산이라고 해야 할 작은 산에 있는 무너진 성을 돌아보고 내려올 때는 정말 탈진 상태가 되곤했다. 이티 휴게소 마당에 있는 낡아빠진 자판기에 500원을 넣고 커피를 한 잔 빼 먹으니 조금 기운이 난다. 이렇게 청주지역의 산성 답사를 마무리한다.
남아 있는 성벽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성벽
남벽
남벽의 모습
남벽의 모습
남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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