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 답사
▣ 소재지 :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 시대 : 삼국시대 백제가 짓고 신라가 개축, 조선 숙종 때 1716년(숙종 42) 대대적인 개축
▣ 문화재 지정 : 사적 제212호
▣ 규모 : 둘레 4.2km, 높이 3~4m, 내부 면적 704,609㎡ (2십만평 정도)
▣ 시설 : 남문 동문 서문, 치성(雉城) 3개, 암문(暗門) 2개, 장대(將臺) 2개, 포루(砲樓)터 15개곳, 연못 2개소 정문인 남문 주변에 3개의 치성과 장대, 4곳의 포루 설치
▣ 형식 : 포곡식 석축 산성,
▣ 답사일 : 2017년 7월 9일
▣ 개요 : 백제시대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상당산성은 1716년(숙종 42)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백제시대에 청주목(淸州牧)이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렸고, 숙종 때 축성기록에 ‘上黨基址 改石築(상당기지 개석축)’이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8부 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동서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蛇行)하는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4.2㎞의 유구가 잘 남아 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약 3∼4m에 이른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성벽 위에 설치하였던 성가퀴[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성벽의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서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숙종 때의 개축 이후에도 1731년(영조 7) 남문 문루를 세우는 등 대대적인 보수를 했으며, 1802년(순조 2) 1,176개의 첩(堞)을 시설하여 산성으로서의 완벽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성벽이 퇴락하고 문루가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1971년 석축 부분을 개축하였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서문·동문의 누문을 모두 복원하였다. 일부에서는 이 산성을 삼국시대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娘臂城)으로 비정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청주 시민들은 상당산성을 그냥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친근한 시민의 안식처이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적지라기보다 청주시민이 심신을 다지고 친목을 돈독하게 하는 삶의 세계이다. 청주시민에게 '산성에 간다'라는 것은 하나의 긍지이고 자부심이다. 산성에 갈 수 있을 만큼 체력과 건강을 유지해왔다는 것이고, 산성에 갈 수 있을 만큼 시간이나 삶의 양식에서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산성에 함께 갈 수 있는 마음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은퇴 이후에 상당산성에 갈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자기정체성을 확실하게 지탱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 전화가 오면 '나는 산성에 와 있어.' 내일 산성에 가' '어제 산성에 갔다가 친구들하고 막걸리 한잔 했어'라고 가슴을 내민다. 더구나 '매주 수요일 친구들과 산성에 가서 산성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신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런 삶의 풍속이다.
나는 대개 산성에 혼자 간다. 누구랑 시간을 맞추어 만나서 올라갈 여유도 없거니와 왁자하게 성을 밟으며 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시간 나는 대로 우리 아파트에서 백화산으로 올라가서 상당산성 서문인 미호문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고, 때로 남문인 공남문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심하게 변덕이 난 날은 한 바퀴 일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되짚어 내려온다. 서너 시간 걸리므로 하루 운동량은 충분하다. 그게 전부이다. 그 때는 상당산성이 내게도 그냥 '산성'이고 나는 긍지를 지닌 청주 사람이다. 참 많이 다녔다.
상당산성 공남문
오늘은 답사란 이름으로 상당산성을 간다. 8시 40분에 상당산성 공남문 앞 주차장에 주차시켰다. 일요일인데 아직 사람들은 올라오지 않았다.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고 등산화로 바꾸어 신었다. 스틱도 하나 배낭에 꽂았다. 허겁지겁 내려오지 않으려면 우산도 있어야 한다. 모자는 구채구에서 1800원에 산 야크가죽 모자를 썼다. 우습지만 더위에도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물은 두 병이다. 아차 간식 거리가 없구나. 그러나 얼마나 걸린다고. 4.2 km 둘레를 일주하는데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오늘은 2시간 30분을 예정한다. 11시면 내려올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상당산성은 조선 숙종대에 쌓은 것이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고구려가 청주를 점령하여 쌓았다고 하고, 어떤이는 백제가 쌓았다고 한다. 신라도 손을 댔다고 한다. 승장 영휴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상당산성은 궁예가 쌓고 견훤이 정북동토성을 쌓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성이 후삼국시대에 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정북동토성과 상당ㄴ성에서 대치했을 수는 있어도 산성을 샇았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청주 집권 기간이 너무 짧다. 그러나 다 맞는 말이라고 하자. 그 만큼 상당산성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삼국시대에 청주는 삼국의 힘겨루기의 최전방이다. 청주는 삼국 세력의 우열에 따라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래서 상당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시대 '상당현上黨縣'으로 불렸던 것으로부터 연유된다. 조선 영조 40년 (1764년) 충청병사 이태상이 그려 올린 상당산성도를 토대로 상당산 정상부에 최근에 상당산성치소를 발굴조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곳에 상당성의 치소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상당현의 치소가 상당산성 안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치소가 있었기에 상당산성의 정상부를 상당산이라 했을 것이다. 그 상당현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것이 백제이다. 그러면 최초로 이곳에 성을 지은 것은 백제이다. 조선 숙종 때 기록에 '상당의 성터에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란 말이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숙종 때 고쳐 쌓은 것이지 처음 쌓은 것은 아니다. 공남문 근처에 보면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성을 걷다가 보면 군데군데 토축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이것으로 봐서 백제시대에 토축한 것을 조선 숙종 때 석축한 것으로 결론은 났다. 어떤 사람은 토축당시의 판축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해서 토성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신을 보지 못했다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과 비슷한 논리의 오류이다. 신라는 잠시 차지했을 때 수리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고구려 군사가 낭비성까지 내려왔는데 신라의 김용춘 장군이 김유신과 함께 5천명을 목베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가 쌓았다고 하는 것도 억측이다. 그것은 부연리 낭비성인지 상당산성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상당산성을 중심으로 한 낭비성 노고성 구라성인 것을 그냥 낭비성이라 표현했을 것이라고 본다.
상당산성은 유사시에 관아는 물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보민保民을 위한 산성이다. 청주읍성이 있으나 청주읍성이 위험할 때 우암산 토성으로 피했다가 상당산성으로 피할 수 있는 보민용 산성이다. 1728년 영조시대에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가 즉위하였다. 경종을 지지한던 소론 정권이 축출되고 연잉군 즉 영조를 지지한 노론 정권이 세력을 잡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인좌는 반란군 대원수가 되어 1728년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했다. 청주성을 차지한 이인좌는 상당산성까지 함락하였다. 반란군은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을 차지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관곡을 나누어주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하층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반란군은 영남 호남에서 패하였으나 도성을 향하여 진천, 안성, 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월 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는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그래서 결국 청주읍성과 여기 상당산성이 한 때 반란군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인사정책을 새롭게 바꾸고 제도를 개선했다고 하니 이인좌가 자기 출세를 이해서 난을 일으키지 않고 백성을 위해 거병했다면 지옥에 가서도 빙그레 웃었을 것이다.
공남문으로 올라가는 오른쪽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戊申倡義 事蹟碑'이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1728년이 무신년이기에 무신년 반란에 청주의 지방 유생 14명이 목슴을 걸고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지킨 미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생들이 세운 기념비이다.
공남문에서
상당산성에서는 공남문이 산성을 공부하는 교실이다. 이곳에 산성공부의 모든 것이 있고 상당산성이 우리나라 보민산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우선 성문은 홍예문으로 되어 있다. 홍예문은 무지개 모양을 성문을 의미한다. 견고한 대리석으로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문을 지어 냈을까 공부할 수 있다. 문에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으로 시선을 주면 우리나라 성벽의 치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치성은 성벽에서 일부 밖으로 돌출시켜 각이 지게 쌓아서 외부에서 공격을 어렵게 하고 내부에서 방어를 쉽게 하기 위해 지혜롭게 쌓은 성벽을 말한다. 이렇게 정교한 치성이 남은 산성도 드물다. 치성은 왼쪽으로 성위 길을 걸으면서 보면 바로 또 있다.
성문을 들어가면서 천장을 보면 두꺼운 널빤지로 되어 있다. 성문의 누각 위에서 널빤지를 하나씩 걷어내면서 문을 밀고 들어오는 적에게 뜨거운 물세례를 할 수도 있고 기름을 끓여 부을 수도 있다. 성문의 양쪽을 보면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이곳은 장대로 가로 막는 시설이다. 설사 성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적은 안심할 수 없다. 문안에 옹성이 있어서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방어군으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옹성은 대개 밖에 있을 때 매우 효과적이지만 상당산성 공남문은 밖의 지형적인 특징으로 옹성이 크게 필요하지 않으니 안에 만들었을 것이다.
성문의 양쪽 벽에 흐릿하게 성을 쌓은 책임자의 이름과 소속을 새겨 넣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읍성에 이런 표식이 남아 있다. 공남문 누각에 올라서 동쪽으로 나가보면 성첩이 있다. 이른바 성가퀴라고 한다. 조선 순조 때 훼손된 것은 1970년대 공남문을 복원하면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의 모습을 살려 복원한 흔적이 보인다. 성첩에서 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보면 몇개는 평평하게 또 몇 개는 아래를 향하고 있다. 슬기롭지 않은가.
이쪽 성가퀴에서 산성 아래 연못으로 내려가는 길도 석축했다. 여기서 성안 마을이 다 보이고 동장대(보화루)가 슬쩍 보인다. 가만히 내려다 보면 마을 안에 있는 연못을 다만 성내의 용수용이라고만 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성이다. 일본식 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자(성 밖에 운하를 만들어 적의 침입을 막는 시설)이다. 인도 여행을 할 때 암베르성에 갔는데 성의 규모가 대단했다. 약 14km나 되는 테메식 산성이다. 그런데 이 성에서 상당산성의 연못과 같은 인공저수지를 보았다. 상당산성을 보고 가서 공사를 한 것처럼 테메식 산성의 골짜기 터진 부분에 인공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암베르성에는 약 7000명의 군사와 민가가 있었다는데 인공저수시설은 이들의 용수를 충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인도의 성들의 특색은 서구의 영주의 거주를 위한 성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의 보민 산성을 합한 것과 같은 형식이다. 상당산성이 바로 그렇다. 해자를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석성의 일부로서 수성의 역할을 하면서 용수도 충족시키는 기능을 한다. 상당산성에는 이 외에도 연못이 또 하나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물의 용도가 구분되었을 것이다.
문루에서 내려와 다시 성문 밖으로 나가면 아주 작고 아담한 비가 하나 서 있다. 구룡사 사적비이다. 성 안에 있다가 폐사된 사찰 구룡사의 사적을 적은 비이지만 마모되어 읽기는 어렵다. 구룡사는 1720년 충청병마절도사 이태망과 우후 홍서일이 성 안의 군영을 건축하면서 구룡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우후는 충청병영의 병마절도사가 있고 상당성을 관리하던 부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구룡사는 전각의 총 규모가 66간이라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극락보전이 있었다는 것은 성안이나 부근에 있는 사찰의 공통점이다. 구룡사 이외에도 규모가 비슷한 남악사와 좀 작은 당대사가 있었다고 하니 성의 규모와 당시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하긴 3500명의 군사와 승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성을 보존하고 청주를 수호했다고 하니 청주읍성의 배후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서남암문에서
공남문에서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으면서 성을 돌아본다. 상당산성은 외축내탁법으로 축성했다. 외벽을 돌로 쌓고 안에서 흙을 다져 넣는 방법이다. 대부분 읍성은 이런 형식으로 쌓게 되어 있다. 이유는 외벽은 적의 공격을 어렵게 하고 내벽은 특별히 오르내림 시설이 없이 아무곳으로나 군사와 백성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비스듬하게 쌓는 것이다. 읍성이 고스란히 남은 해미읍성이 그렇고 홍주읍성이 그렇다. 한산읍성은 좀 달라서 남은 일부구간은 내외협축석성이었다. 상당산성은 안쪽은 비스듬한 흙으로 되어 있다.
조금 올라가면 성첩의 모습이 확실하게 남은 성벽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의 성벽에서 약 세로1.8m, 가로 2.5m 정도 장방형으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곳에 성첩이 있고 포문이 있다. 이것을 치성이라고 한다. 치성의 성가퀴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까마득하게 높다. 그런데 그 아래 분명 토성으로 생각될 수 있을 만큼의 언덕을 볼 수 있다. 분명 토성이다. 저 흙을 파헤쳐 보면 그 속에서 갖가지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백제시대에 최초에 쌓았다는 토성이라 생각한다. 조선 숙종 때 개축하면서 토성을 허물어 내고 그 자리에 석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토성 위헤 석축했을 것이다. 산성 전체를 돌아가면서 보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된다.
여기서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올라서면 서남암문이다. 암문 바로 옆에 치성이 또 한 군데 있다. 암문이라기에는 꽤 크다. 기어서 드나들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높이 172cm 너비 166cm라고 한다. 몰래 드나드는 문이다. 암문의 구조는 그냥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내벽에 구멍이 있어 가로대를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암문 근처에 흙이나 다른 장해물을 장치할 수 있도록 조치를 했을 것이다. 안내판에 보면 여기서 것대산 봉수대까지 1.7km 라고 하니 옛날 장정걸음으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의 연락사항을 것대산 봉수대를 통하여 진천 봉화산으로 연락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청주시내 전망을 보면서 성벽 위를 걷는 맛으로 시민들이 산성에 오를 것이다. 이곳에서 땀을 식히는 분들도 많이 있다. 여기서 것대산 쪽으로 능선을 타는 시민들도 있다. 것대산 쪽으로 가면 낙가산까지 가서 보살사로 내려갈 수도 있고 계속 산줄기를 타면 용암동 성당으로 내려 갈 수도 있다. 이곳에서 부터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성길을 걷는다. 우암산이 바로 아래고 우암산 동남쪽 기슭에 국립청주박물관이 보인다. 청주시의 남부지역과 북부지역 멀리 내수읍 오창읍 오송읍 옥산까지 훤하게 터졌다.
미호문으로 향한다. 미호문으로 가는 중에 수구를 몇 군데 발견했다. 미호문으로 가는 중에 바라본 성벽은 예술품처럼 아름답다. 산을 하나도 허물지 않고 산의 모양을 그대로 살리면서 축성했다. 뱀이 꾸불꾸불 기어가는 것처럼 용이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다. 그런 성벽 위에 공남문보다 작지만 아름다운 미호문이 있다. 이쯤에서 성벽 바로 아래에서 칡잎을 뜯어 먹고 있는 고라니 한 마리를 발견했다. 풀섶에 숨어서 열심히 배를 채우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공남문 부근
공남문 오른쪽의 치성
공남문 왼쪽의 성벽
홍예문
공남문의 본래 성벽과 보수한 부분이 구분된다.
공남문 안쪽의 옹성
공남문 치성의 성첩 포구
공남문에 새겨진 문자
붉은 글씨로 새긴 글자들-읽으면 읽어질 수 있겠다.
공남문 치성에서 바라본 서남암문 쪽 성멱
서남암문 가는 길의 치성
새로 부수한 성첩
서남암문 가까이 성벽과 치성
서남암문
석축이고 평문이다.
가로대를 걸칠 수 있는 구명
밖에서 본 서남암문
서남암문 근처의 치성
서남암문 위에서 본 서벽의 모습
서족 성벽 아래 고라니- 등에 상처가 있다.
청주시가지
서벽
서벽의 본래 성벽과 보수한 부분의 다른 모습
수구-물받이가 튀어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서벽의 아름다운 모습
멀리 미호문이 보인다.
미호문에서
미호문은 서문이다. 서문이란 말은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본래 이름이 미호문이므로 미호문이라 해야 한다. '미호문弭虎門'은 상당산 정상에서 보면 우백호에 해당되는 곳인데 산세가 호랑이가 뛰려고 움츠린 모습이라 호랑이가 달아나면 상당산성의 기운이 쇠하여지므로 호랑이 목에 해당되는 부분에 문을 세워 제압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상당산성을 운동이나 등산을 목적으로 오를 때 주로 통과하는 문이다. 백화산을 거쳐 이곳에 오면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화북에서 문장대 올라가는 시간과 똑 같다.
미호문은 공남문보다 작지만 매우 아름답다. 문은 공남문과달리 평문이다. 문의 천정도 화강암으로 마감해서 공격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미호문에도 치성이 있다. 서남암문 근처에 있는 치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분명한 치성이다. 미호문 문루에서 가만히 서서 북으로 가는 성벽을 바라보면 언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성벽이 안쪽으로 옮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문루에서 밖을 향하여 오른쪽으로 보면 문지가 있다. 미호문도 안쪽으로 옮긴 것이다. 미호문은 백화산 쪽으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주성동 마을쪽으로 내려가는 계곡에 길이 있었을 것이다. 문과 성을 옮겨 쌓은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미호문에도 축성의 책임자를 돌에 새겨 넣었다.
미호문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면 자연석을 이용한 성벽의 모습이 보인다. 거기서 조금더 올라가면 15개의 포루 중의 하나인 포루지가 나온다. 포루지를 보면 이 성은 서쪽에서 오는 적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 같다. 수구지를 몇개 더 보면 성벽은 갑자기 돌아서서 남쪽을 향하게 된다. 남쪽으로 향한 성벽은 내리막이다. 그렇다고 성벽이 희지부지 되지는 않았다.
미호문 부근의 성벽
백화산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미호문의 외벽
미호문의 치성
본래 미호문 기단
성석에 새긴 글씨 흔적
이름이 새겨저 있다.
옮기기 전의 성벽이 있던 자리
미호문에서 바라본 청주 율량단지
자연석을 이용한 성벽
포루지
수구
진동문에서 보화루까지
내리막길을 걸어 진동문으로 가다 보면 동암문이 나온다. 동암문은 아무런 생각없이 가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렇게 숨어 있다. 서남암문이 것대산 봉수대로 간다면 동암문은 어디로 향하는 암문일까. 아마도 구라산성으로 가는 암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으로 나가서 한남금북정맥 등마루를 이티재가 나오고 이티재에서 30분만 올라가면 구라산성(구녀산성)이 나온다. 그렇게 연결되는 암문일 것이다. 물론 미원 보은 쪽으로 연락이 가능한 일이다. 암문은 안에서 보면 내옹성처럼 진입로가 직각으로 구부러졌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치성도 없다.
암문을 지나 진동문으로 내려가면서 보면 성벽의 내벽이 뚜럿하게 보인다. 내벽이 있었다는 흔적이 뚜렷하다는 말이다. 외벽은 돌로 튼튼하게 쌓았고 내벽은 흙으로 비스듬하게 쌓았는데 분명 성벽이다. 여기에 소나무가 멋지게 자라고 있다. 이쯤에서 최근에 복원한 진동문의 위용이 보인다. 전에는 암문처럼 문루가 없었는데 주변 정리를 하고 석축을 다듬어 쌓고 누각을 세웠다. 단청이 아름답다. 사실 이렇게 복원한들 본래의 것이 아니므로 큰 가치는 없는 것이다. 문을 나가면 낭성쪽으로 통하는 길과 만나게 되어 있다.
다시 문루에 올라가 보화루로 간다. 보화루는 동장대이다. 말하자면 지휘소이다. 서쪽에서 적이 온다는 것을 가정하면 동장대는 매우 안전한 곳이다. 장수가 적진을 바로 보고 작전을 세우고 명령을 내릴 만한 위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평화시에 먹고 마시기 좋은 위치이다. 전시에도 장수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하기도 편리한 위치이다.
동장대에서 돌아온 산성을 보면 기묘하다. 포곡식 산성이라고 하지만 뚜렷하게 정상이라고 할만큼 높지 않은 상당산과 함께 산줄기 자체가 크게 원을 그려 하나의 포곡식 산성이다. 이니 테를 두른 것처럼 골짜기를 감싸 안은 테메식 산성처럼 보인다. 동장대에서 내려와 발굴조사를 하는 연못아래에 가 보았다. 성석을 찾아 정연하게 쌓아 놓았다. 다듬은 돌도 있고 자연석 그대로도 있다. 외벽은 화강암을 다듬어 쓰고 안쪽은 자연석과 잡석을 넣고 흙으로 다져 넣었을 것이다. 궁금한 것은 연못의 둑에 해당되는 부분에 성벽이 있었을까 그냥 댐처럼 둑만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지금 형태로 보면 그냥 둑만 있었는데 둑을 성벽으로 쌓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본다. 사람들이 참 많다. 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을 안을 본다. 이 마을에 관아가 있었고 사찰이 3개나 있었다고 한다. 관아는 상당성의 책임관리인 청주병마 우후가 거처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대적으로 토속음식점을 지으면서 관아를 짓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사찰도 복원하면 안될까? 백제의 산성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1500년 고성이 있으면 1500년 고찰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극락보전이 있어 성에서 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있었다. 보민의 성에 사찰이 있으며 피신한 백성의 정신적인 안정을 줄 것이다. 유럽의 성 몇 군데를 보니 성안에 성당이 있었다. 인도의 암베르 성에도 몇 개의 힌두사원이 있었다.
상당산성의 특징은 보민산성의 원형이면서 청주읍성, 당산토성, 우암산 토성과 연결되어 하나의 나성구조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청주읍성의 충실한 배후 산성이다. 둘째는 산성의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함이다. 안으로 관아와 사찰, 연못 등이 있고 성에도 치성, 내옹성, 문지, 암문, 수구, 포루를 모두 갖추고 정상에 치소까지 있다. 평화시에는 군사들의 훈련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터전이 되고 승병들이 수도와 수련을 할 수 있도록 사찰이 3개나 있었다는 점이다. 잘 갖추어진 산성인데 지금은 역사를 느끼고 의미를 되새기기보다 다른 쪽으로 복원하고 있는 점이 아쉬웠다.
산성마을의 다른 음식점은 한산한데 어느 한 곳에만 사람들이 왁자하다. 사람마다 맛을 느끼는 개성이 있을 텐데 그 음식점은 모든 이들의 입맛에 다 맞는 모양이다. 11시 0분이 넘었다. 3시간도 더 걸린 것이다. 배가 많이 고팠지만 그냥 구라산성으로 향했다.
내부에서 존 동암문
외부에서 본 동암문
내벽과 외벽이 뚜렷한 동벽-잘 자라는 소나무
내탁기볍의 내벽의 모습이 뚜렷하다
동암문에서 보는 진동문
밖에서 본 진동문 - 성밖 농지 주인이 그물망을 쳐 놓았다
진동문의 모습
보화루에서 본 공남문쪽
보화루
동벽의 끝자락
연못 아래 발굴조사 중인 성벽의 모습
쌓아 놓은 성벽
발굴조사중
건축의 흔적이 보이는 성석들
소류지
물이 맑고 연꽃이 피었다.
공남문 아래 김시습 시비
김시습 시 유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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