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성 娘臂城 낭자곡성娘子谷城
▣ 위치 :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부연2리, 토성리 (해발 250m)
▣ 시대 : 삼국시대
▣ 유형 : 테메식 석축산성
▣ 규모 : 둘레 238m
▣ 답사일 : 2017년 6월 25일
『삼국사기』의 김유신(金庾信) 열전에 의하면, 629년(진평왕 51) 신라의 임영리(任永里)·용춘(龍春)·백룡(白龍)·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 김유신은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전하여 뛰어난 용맹으로 신라군을 승리로 이끌어 5천여 명을 목 베고 1천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투의 현장인 낭비성은 경기도 북부 지역 또는 충청북도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대동지지』에서는 충주로 비정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들은 오늘날의 청주 지방을 『삼국사기』의 낭자곡(娘子谷) 혹은 낭비성이라 하고 있다.
한편 이를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의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와 토성리에 걸쳐 있는 속칭 낭비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부연리의 옛 산성은 높이 250m의 야산에 석축되었으며, 바로 부근에 노고성(老姑城)이 있어 주·부성(主副城)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는 오늘날의 임진강 유역이어서 문제가 있으나 지명이 그대로 전존되어 주목되고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부연2리, 토성리, 광암리에 걸쳐 있는 야산에 쌓은 석축 테메식 산성인 낭비성娘臂城 혹은 娘子谷城 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낭비성이란 이름의 성이 북이면 부연리 해발 250m 야산에 있는 산성일 가능성, 또 청주시 산성동 상당산성일 가능성, 충주에 있을 가능성,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학자들마다 주장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고장인 청주를 예로부터 낭비성, 낭자곡성, 낭성으로 불러 왔고, 지금도 낭성면이 있으며, 삼국사기 대동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서 청주 지역을 낭비성이라 불렀고 현재의 상당산성보다 부연리 석축테메식 산성이 그것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삼국시대 쌓은 산성인 낭비성을 삼국 중 누가 쌓았는지에 관해서도 설이 많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의해서 쌓았을 가능성도 있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신라가 쌓았을 가능성도 있고, 백제가 신라로부터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을 가능성도 있어 그것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춘 장군이 부장 김유신 장군과 함께 이곳에서 고구려의 군사 5000명을 목베고 승리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며, 훗날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진을 치고 구녀성에 주둔해 있던 궁예와 싸웠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아무튼 낭비성의 위치를 고증해내는 것은 역사가들의 일이고 그렇게 문제되는 성을 찾아가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서 답사한다고 해서 여러가지 학설 중에서 어느 하나가 맞다고 고증해낼 능력은 없다. 다만 그런 역사 현장이 궁금하고 거기서 나는 어떤 생각이 나는지 직접 찾아가 보고 싶은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배경이었던 낭비성이 특히 청주 역사의 근간이 된다고 여겨지는 성이 아직 확실하게 고증되지 못한 채 풀더미 속에 묻혀 있다는 것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낭비성 답사를 늘 생각만 하고 미루고 있었다. 찾아가기로 맘만 먹으면 바로 이웃 마을인데 미루기만 한 것이다. 어찌 보면 가깝기 때문에 멀리 있는 성을 먼저 가고 미루어 둔 것일지도 모른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내비게이션에 부연2리에 있는 작은 암자인 강선암을 입력하고 출발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강선암에서 산성의 들머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정상에 산불감시탑이 있다고 하니 산불 감시원이 오르내리는 길이 있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 내수육교를 지나 손병희 기념관이 있는 신대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들어갔다. 그랬더니 청주 증평간 자동차 전용도로를 넘어간다. 자동차 전용도로로 왔으면 접근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부연리 저수지 낚시터를 지나 꼬불꼬불 농로를 지나가니 부연2리 마을이 나왔다. 남향한 아담한 마을이다. 산성이 있을 법한 뒷산이 삼태기처럼 마을을 둘러 싸고 있었다. 차를 세울 데가 마땅하지 않아 골목을 많이 헤맸다. 시골 마을이 골목이 매우 좁아 고생햇다. 다시 마을 머리로 나와 마을 경로당 겸 회관 앞에 주차하고 산성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마을의 진산처럼 보이는 산의 정상 부분에 나무가 자라지 못한 테두리가 보였다. 산성의 위치는 짐작했으니 들머리를 찾아야 한다.
경로당 문을 두드렸다. 사람 소리는 나는데 방충망이 열리지 않는다. 할머니 한 분이 나오길래 물으니 예상대로 산을 가르쳐 주고 들머리를 일러 주었다. 초코파이라도 한두개 준비해 올 걸 그랬다. 후회해도 소용 없다. 할머니 말씀 대로 금방 공사를 했는지 색깔도 바래지 않은 아스콘포장길을 걸어서 절 쪽으로 올라갔다. 이 마을도 가뭄은 극에 달해 있다. 옥수수대궁이 말라서 잎이 배배 꼬였다. '말라 비틀어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산 어귀에 다다르니 굴삭기가 파 헤친 곳이 있다. 따라 올라가 보았다. 묘를 이장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윤달이다. 윤달에는 귀신들도 인간이 무얼 하는지 모른단다. 그런 나도 고구려군 5천명 죽은 산성에 올라가도 아무도 내가 오는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안심이다.
그런데 파묘터를 지나자 길이 없어졌다. 성에 다니면서 묘를 만나면 다음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그런가? 그런데 아까시 우거진 가지 속에 길이 있다. 아가시를 헤치고 올라가는 잡초가 누운곳이 있다. 산불 감시원이 올라간 자국이다. 산에는 여름에도 겨울 눈 위처럼 발자국이 난다. 마지막 날망 가까이에 산소가 3기 정도 또 있다. 산소 위에 쓰러진 고사목을 타고 넘으니 능선이다. 미국 자리공이 키를 넘길 듯하다. 나무지팡이를 하나 주워 자리공을 헤치며 산불 감시탑으로 가보았다. 아무도 없다. 삼각점과 기준점만 있다. 풀은 허리까지 올라온다. 나무들이 하얀 곰팡이병에 걸렸는지 온몸에 하얀 곰팡이를 뒤집어 썼다. 성은 흔적도 없다.
다시 내려와 동쪽 산봉우리로 향했다. 길은 없고 고사목만 무너져 등마루 길을 가로 막고 있다. 활엽수 낙엽이 떨어져 길을 다 덮어 버렸다. 여기도 성이 없나 보다. 다 땅 속에 묻혔나 보다. 정상 부분 아까시 숲를 꿰뚫고 산불감시 폐쇄회로 카메라가 올라가 눈을 부라리고 쳐다 본다. 이미 내 영상이 어느 기관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성을 못찾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갈까 하는데 봉우리로부터 경사가 급한 비알에 돌이 굴러 있었다. 성석이다. 돌은 아주 무질서하게 굴러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그 위에 낙엽이 덮혔다. 성의 윤곽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밟으며 성벽 아래로 짐작되는 곳으로 걸어 보았다. 나뭇잎이 쌓여 성돌을 거의 덮었으니 발을 바로 디딜 수가 없다. 잘못 디디면 크레바스crevasse에 빠지듯 아주 깊은 곳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아니면 발목이라도 골절될까봐 조심하며 기우뚱거리며 걸었다.
무너진 돌무더기로 봐서 성은 상당히 높았었나 보다. 아무래도 6~8m는 되지 않았을까. 돌은 검은색으로 산화된 화강암이다. 돌은 매우 단단하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들고 나르기 좋은 30cm×40cm 정도 되는 자연석이다. 깎고 다듬은 흔적은 없으니 쌓기 좋은 면을 살려 쐐기돌을 박아가며 쌓은 듯하다. 조금이라도 축성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 있을 것 같아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성석 사이에서 기와조각이라도 발견될까해서 나뭇잎을 헤집어 보아도 찾을 수 없다. 선답자들이 이곳에서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을 찾았다 하니 참으로 행운이다.
성벽을 간신히 한바퀴 돌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봉우리가 없고 평평하다. 산봉우리를 다듬어 평평하게 만들고 그 곳에 건울을 지었을 것이다. 잡목이 우거져 헤아리기 어렵지만 대략 한 300~400평 정도 되어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평평하다. 건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서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체조도 하고 훈련도 가능했을 것 같다. 나무로 땅을 파보니 해마다 떨어진 낙엽이 30cm 이상 쌓여서 썪은 것 같다. 그 아래 지표조사를 하면 유물이 나올 것이다. 평평한 대지 위에 약간 움푹한 부분도 있다. 급수할 수 있는 곳이라 혼자 생각해 버렸다.
나무 사이로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롭다. 여기서 성을 한 바퀴 돌아보니 신라의 김용춘 장군이 고구려 군사 5000을 베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과장 같아 보인다. 아니면 상당산성을 낭비성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성은 성북토성의 세곡을 지키고, 청주 읍성을 방어하며, 와우산토성의 배후 산성이라 할 수 있는 상당산성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옛 산성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산성의 고리고 산성과 산성이 열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성과 성 사이의 작은 석축 보루이다. 물론 석축보루만 있는 것이 아니고 흙으로 쌓은 보루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흙으로 쌓은 보루는 무너져 오늘날에는 흔적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옛 성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보루의 직접적인 역할을 생각하지 못하고 보조 성으로만 생각해 왔다. 숨어 있는 산성을 찾아 내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다. 역사서를 다 읽고 산성의 위치와 역할을 추정해 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기븐 좋은 일은 산성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추정한 내용을 고고학자들이 나와 같은 견해로 해석해 낼 때이다. 고명한 학자의 이론에서 잃어버렸던 나의 천재성을 발견하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성 안에 낙엽을 깔고 한참 앉아 있었다. 멧돼지도 고라니도 다 어디로 갔을까? 까마귀도 짖지 않는다. 오월도 윤오월 썪은 달이라 그런가 보다. 산속에서 고요가 더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한다. 내려오는 길을 찾았다. 강선암에 들렀으나 참배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마을은 한없이 고요하다.
이제 낭비성도 다녀왔다. 낭비성은 보민용 산성이 아니라 전투를 하기 위한 성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냥 여기가 낭비성이라 믿으려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안내 표지판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것이 매우 섭섭했다.
산성 올라가는 길
정상에 산불 감시탑
무너진 성터
성석이 너덜처럼 즐비하다.
낙엽속에 묻힌 성석
무너져 굴러내리고 있다.
성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성의 내부 평평하다
무너진 성벽
무너진 성벽
무너진 성벽
고왕암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뒷 모습
강선암
'여행과 답사 > 忠淸의 山城'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라산성謳羅山城 구녀성 답사 (0) | 2017.07.12 |
---|---|
청주 상당산성 답사 (0) | 2017.07.12 |
옥천군 군서면 성티산성(성치산성) 답사 (0) | 2017.06.18 |
대전시 동구 마산동산성 답사 (0) | 2017.04.29 |
충남 청양 두릉윤성豆陵伊城 답사 (0) | 2017.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