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말나리의 하늘
2019년 7월 4일
옥천 화인산림욕장에서
옥천 화인산림욕장에 갔다. 화인산림욕장은 안내중학교에서 안남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화학리 고개에 있다. 칠팔 년 전 화학산성 답사 갔던 일이 있다. 이 골짜기를 간신히 찾아 지도를 보면서 화학산성으로 올라갔다. 성은 다 무너지고 다래덩굴이 뒤덮어 성벽을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다가 시커먼 살모사 부부를 만나서 기대했던 화학산성 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보지 못하고 뱀만 보고 내려온 것이다. 뱀을 싫어하는 나는 그 후에도 화학산성 답사할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옆에 화인산림욕장이 있었던 것이다.
화인산림욕장은 메타세쿼이아,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토종 소나무 등 30년 이상 된 나무들로 숲을 이루었다. 그 중에 메타세쿼이아는 이 삼림욕장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가장 볼만한 나무다. 화학산과 인포리에서 한 자씩 따서 화인산림욕장이라고 이름을 지었나 보다.
완만한 숲길을 걸으면 좋은 이야기만 나누게 된다. 이름대로 삼림욕을 싫컷 하도록 지그재그로 길을 내놓았다. 대화가 좋아 십리 남짓 산길이 금방이다. 하늘을 찌르는 메타세쿼이아 숲이라고 나무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나무 아래에는 가지가지 들풀이 살고 거기서 들꽃이 피어난다. 버섯도 돋았다가 사라진다. 수많은 미생물도 살고 있을 테고 지금은 이미 산중의 왕이 된 멧돼지도 살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 멧돼지가 지렁이나 땅강아지를 찾느라 낙엽을 헤쳐 놓은 풀섶이 수두룩하다. 멧돼지가 금방 멱을 감은 늪지도 있고 몸을 비비고 간 참나무도 있다. 이들은 다 숲에서 경쟁없이 공존한다. 그들에게 에너지를 무제한 내려주는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 풀섶에 혼자 피어 있는 하늘말나리 꽃을 만났다. 하늘말나리는 이름 그대로 하늘을 향해 핀다. 한줄기에 주황색으로 피어난 세 송이가 나란하다. 하늘을 향해 더 높게 올라간 놈도 쳐진 송아리도 없다. 서로 시기하지도 않고 제가 더 예쁘다고 나서지도 않고 하늘에 먼저 닿겠다고 경쟁하지도 않는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다. 꽃잎 여섯 장, 수술 여섯 개, 암술 한 개가 어김없이 똑같다. 한 줄기에서 올라와 끄트머리에서 셋으로 갈라져서 그런가 보다. 저희끼리 동기간임을 알고 있을까.
하늘말나리는 땅을 향해 피는 땅나리나 하늘도 땅도 아닌 중간 세계를 보고 피는 중나리랑 다르게 하늘을 향해서 핀다. 그래서 하늘나리이다. 이 아이들은 하늘을 향해서 무얼 바랄까. 무엇을 바라든지 똑같이 바라겠지. 꽃잎도 여섯, 수술도 여섯이서 저희들의 작은 하늘인 암술을 에워싸고 승은承恩 내려드릴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받은 은혜를 저희들의 하늘인 암술에 내려드릴 날을 말이다. 사람들은 수컷을 하늘이라 여기지만 하늘말나리는 암컷이 하늘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꽃은 암술이 하늘이다. 암컷을 하늘로 생각하니 저희들끼리 다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승은은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하늘의 에너지를 받아 저희들 하늘에 함께 내려드리면 되는 것이다.
나의 하늘은 무엇일까. 저렇게 쭉쭉 뻗은 나무 사이로 내게 내려줄 하늘빛은 어떤 색깔일까. 나는 한 줌이라도 빛살을 더 받으려고 누구와 다투지는 않았을까. 결국은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을….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가린 사이로 햇살은 빛살이 되어 은총처럼 내리고 있다. 하늘말나리꽃이 더욱 이들이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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