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핏빛으로 지는 더덕꽃

느림보 이방주 2019. 8. 14. 22:31


핏빛으로 지는 더덕꽃


2019년 8월 14일

주중리에서

   

이른 아침 주중리에 갔다. 아직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며칠 만에 벼이삭이 뼘 가웃은 되게 나왔다. 올 가을도 태풍만 없으면 풍년이 틀림없다. 풍년이면 쌀값이 또 내려앉으려나. 한 달 전쯤 양파 밭을 갈아 엎어버리는 농민들을 보면서 마음 아팠는데 풍년이 들어도 우케 가마니를 길바닥에 내던지는 고통은 없었으면 좋겠다. 풍년이 들면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농투사니들에게도 온전하게 풍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자전거로 늘 가던 농로를 천천히 달렸다. 더덕꽃이 눈에 띄었다. 어느 공직 은퇴자의 취미 농장에 심어 놓은 더덕이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꽃을 피웠다. 더덕꽃은 연두색으로 피기 때문에 초록 이파리랑 잘 구분되지 않는다. 잎에 가려서 담백한 색깔로 피어나는 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 송이만 보이기 시작하면 주렁주렁 매달린 초롱이 수없이 보인다. 동그란 꽈리주머니 같은 봉오리도 동글동글 매달렸다. 봉오리가 터지면 하면서 꼭 방귀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꽃으로 피어날 것만 같다.


연두색 초롱 모양으로 핀 꽃 송아리 안을 들여다보면 여린 보랏빛이다. 처음 피어날 때는 연보랏빛이다가 점점 더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간다. 다 피어 가루받이가 끝날 때쯤 꽃은 초롱 안쪽에서 핏덩이가 뚝뚝 떨어질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말라붙은 피멍으로 보인다. 한을 토해내듯 그렇게 선지 같은 피가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러다가 꽃이 시들 때쯤에는 연두색이던 거죽까지 핏빛이 배어나온다. 피멍이 말라 피딱지가 되어 떨어지면 거기에 사리처럼 까만 씨가 맺힌다. 더덕 씨앗은 까맣고 작은 사리알갱이에 날개를 달았다.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하는 더덕꽃이 내게는 왜 피멍으로 보일까. 1970년대 초, 그 차갑던 시대 어느 봄날 바로 그 오지 학교에 부임했다. 산에는 아직도 흰 눈이 남아 있는 사월 해발 500m가 넘는 골짜기 골짜기에서 모여든 아이들은 생각이 맑아 표정이 밝았다. 초임지인 그 학교 실습지에서 아이들처럼 맑은 연두색으로 피어난 더덕꽃을 처음 보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초라하지도 않은 초롱에 반했다. 포기마다 꽂아 놓은 지지대를 타고 올라간 덩굴에 연두색 초롱을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더덕 씨앗을 받아서 묘포에 뿌리고 짚으로 덮어 놓으면 거기서 싹이 나왔다. 마을 사람들도 더덕 씨를 세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 했지만 교장선생님은 연구를 거듭해서 싹을 틔웠다. 아이들 데리고 산에 가서 어린 더덕을 캐다가 옮겨심기도 했다. 더덕은 아주 깊은 산에서 난다. 아이들 말에 의하면 더덕은 영물이라 선생님 같은 도시 사람 눈에는 띄지도 않는다고 했다. 정말 아이들은 용하게 더덕 냄새를 맡고 더덕 덩굴을 찾아내는데 내 눈에는 바로 옆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 더덕 싹을 이끼에 싸고 싸서 가져다 실습지에 심었다. 고사리 손으로 풀을 뽑고 지지대를 세워 꽃을 본 것이다.


학교에서는 더덕을 잘 길러서 팔아 아이들 공책도 사고 연필도 사 줄 계획이라 했다. 급식비도 스스로 마련하고 아이들 읽을 책도 구입하여 도서실을 가득 채우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자활학교의 꿈이다. 더덕 밭을 지나가면 더덕 향기가 났다. 자활학교라는 꿈의 향기였다. 착한 아이들의 마음 향기였다.


한 삼년 팔백여 평에 자활학교의 꿈을 키우던 더덕밭에 서리가 내렸다. 어느 가을 이 고장 교육 수장의 시찰이 있었다. 당시에는 방문이 아니라 시찰이었다. 그 어른은 더덕밭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학교 문화의 혜택을 보다 많이 받도록 뒷받침을 해야 하나 하는 관심은 아니었다. 그리고 더덕을 가마니로 캐어 갔다. 아이들 꿈을 캐어간 것이다.


나는 그런 교직 사회의 관습에 절망했다. 초임 교사로서 대학에서 배운 학교행정 이론과는 너무나 다른 기성세대에 절망했다. 오지 학교의 문화 실조를 외면한 교육 수장에 절망했다. 저항할 수 없었던 나의 무기력에 절망했다. 끓는 피도 없이 절망할 줄밖에 모르는 나의 허망한 젊음에 더 절망했다. 일제강점기 침략자들이 약한 농민에게 공출이란 이름으로 쌀을 빼앗아 가고 유기그릇을 뺏어갔다고 아이들을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 꿈을 뺏어간 일제가 아닌 교육을 지원한다는 어른도 계시지 않느냐는 아이들의 반문이 두려웠다. 더덕꽃은 내게 절망을 가르쳐준 꽃이다. 더덕꽃은 내게 교육행정가들에 대한 불신을 심어준 꽃이다. 진하게 남은 그 기억은 오늘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주중리 더덕꽃은 사십년 전 기억으로 아직도 피멍이 들어 있다. 지금도 초롱 밑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토박이 농투사니가 취미 농사꾼에게 넘겨준 땅 그 울타리에서 더덕꽃이 참 담백하게 피었다. 연두색 초롱은 곧 붉은 보랏빛으로 물들 것이다. 논에는 벼가 한창 이삭이 나와 벼꽃도 피어날 것이다. 꽃은 열매에 대한 희망이고 꿈이어야 한다.

더덕이 잘 자랄수록 마음 아프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이제는 더덕꽃이 피어도 핏빛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벼가 잘 익어도 농민이 아무런 걱정 없었으면 좋겠다. 수확하지 않은 양파 밭을 갈아엎으며 마음까지 갈아엎어버리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올 가을에는 남새가 풍년이 들어도 그 풍년이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갔으면 좋겠다.

가을 주중리에는 더덕꽃이 피고 벼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