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심사평
고미화의 <하늘빛을 담으려면> <후박나무 꽃향기>
-자연과 연계하여 그려낸 바람직한 삶의 모습-
이방주
고미화의 <하늘빛을 담으려면> <후박나무 꽃향기>를 당선작으로 한다. 두 작품은 자연을 상관물로 인간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수필은 체험의 기록이라 해서 체험만 기록하고 독창적인 사색과 상상이 결여된다면 하나의 흘러가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을 대하면서 살지만 내면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각기 다르다. <하늘빛을 담으려면> <후박나무 꽃향기>는 자연에서 마음을 정화시키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얻어내고 있다. 그는 일상적인 경험을 상상을 통해 문학적 경험으로 승화시켜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의 언어는 오랜 친구의 속삭임을 듣는 듯 따뜻하다. 그래서 감동이 더 크다. 그 감동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늘빛을 담으려면>은 자연에서 삶의 문제 해결의 지혜를 얻어낸다. 두 개의 호수에 담긴 물을 보면서 흐렸던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켜 생활의 어둠에서 헤어나려 하고 있다. 맑은 물이 흘러들고 수문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보면서 닫혀있는 마음의 수문을 열 생각을 하는 것이다. <후박나무 꽃향기>는 선배의 인품에서 후박나무 꽃향기 같은 인간미를 발견하고 자신도 그런 인간적 향기를 지니고 또 세상에 전할 다짐을 한다. <하늘빛을 담으려면>은 자연에서 인간을, <후박나무 꽃향기>는 인간에게서 자연을 발견한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자연과 연계하여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상에 대한 인식도 형상화의 기법도 수필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므로 추천한다. 대성하길 빈다.
하늘빛을 담으려면
고미화
인색한 겨울 햇살에 단단히 빗장을 걸어 잠갔던 호수가 드디어 맑은 하늘을 비치기 시작했다. 겨우내 계속되는 한파에 꽁꽁 얼어있던 호수였다. 계절의 추가 봄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호수의 표정이 다양해졌다. 밤과 낮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며 결이 다른 무늬를 그리더니, 초봄에 들어서자 마침내 푸른 하늘을 산책하는 하얀 뭉게구름까지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늦가을까지만 해도 녹슨 청동거울처럼 짙은 녹색 낯빛으로 좀처럼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호수였다. 그런데 오늘은 길게 늘어뜨린 능수버들과 곧게 뻗은 플라타너스나무의 실루엣까지 놓치지 않는다. 아팠던 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반갑고 대견하다.
언제부터인지 출근하면 습관처럼 호수 물빛을 살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짙푸른 녹색 얼굴을 마주할 때면 왠지 내 마음의 빛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가라앉았다. 막연한 기다림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으리라. 비록 자정능력이 없는 인공호수라지만 시간의 힘이라도 빌린다면 언젠가는 투명한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호수 물빛과 내 마음의 채도를 동일시하며 응원의 눈길을 보내곤 했다.
지난여름 내렸던 장맛비는 유난스러웠다. 세찬 폭우를 무방비 상태로 받아든 저 작은 호수는 불어난 몸을 끌어안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안온하던 내 삶의 뜨락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쳤다.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현실이 낯설기만 했다. 뿌리째 뽑힌 나무처럼 한동안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적지 않은 경제적 상실감이 혼란스러웠지만, 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신뢰를 저버린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금전적인 손실은 회복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지만, 오랜 인연이 남긴 상처는 깊은 암흑 속에 빠진 것처럼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의연함으로 가려진 가장의 고통을 보면서 붉은 황톳물을 토해내는 호수가 어서 안정을 찾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슬픔도 지극해진 후에야 비로소 슬픔을 넘어설 수 있다고 했던가. 종기의 고름도 가득 차야 터뜨려 깨끗하게 짜낼 수 있듯이….
소극적인 내 바람이 저 혼탁한 수심 아래까지 닿기엔 역부족이었는지 가을이 와도 맑은 호수의 얼굴은 요원하기만 했다. 어쩌면 저 호수는 영원히 맑아질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대의 끈은 놓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저 호수의 몸 속 일부를 잠시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운동 겸 산책을 목적으로 호수 주변을 걷다가 호수 위에 만들어 놓은 나무 잔도를 따라 들어갔을 때였다. 물속으로 과자를 던져주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물고기를 보기 위해 호수 위로 손을 뻗었다. 과자가 수면에 떨어질 때마다 잉어 떼가 몰려들었다.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먹이를 쟁취하기 위해 눈이 튀어 나올 듯이 덤벼들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예쁜 물고기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려버렸다. 물속이 환히 비치는 연못에서 고고한 자태로 물결무늬를 그리며 노닐던 물 속 화가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내 기억 속 어느 한 페이지엔 호수에 대한 강한 이미지 사진이 한 장 들어 있다. 어느 해 늦여름 무심히 나선 드라이브 길이 좌구산 근처까지 가게 되었다. 입구에 있는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파란 하늘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맑고 고요한 호수가 파란 하늘을 선물처럼 펼쳐놓고 있었다. 잔잔한 그 품으로 고고히 유영하는 하얀 뭉게구름까지 여유롭게 감싸 안았다. 한산한 오후 시간 눈앞에 펼쳐진 그곳은 마치 조물주가 감춰 놓은 보물찾기 쪽지 중 하나처럼 여겨졌다. 누구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선물이었다. 은빛 윤슬 아래 여유롭게 움직이는 작은 물고기의 몸놀림까지 비치기 위해 호수는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
태생적인 혜택을 입은 그 호수는 좌구산 골짜기에서 흘러들어오는 맑은 물에 힘입어 잉여의 상념들을 흘려보냈으리라. 가장자리 얕은 수심을 후벼 파는 굵은 빗줄기도 고스란히 받아 스스로를 다독이고 진정시킨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맑은 얼굴로 하늘빛을 온전히 담을 수 있었으리라.
사람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운 풍경을 내 안에서 비치려면 내면의 물이 맑아야 한다. 맑고 고요한 수면에 파란 하늘빛이 담겨 평화로운 마음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갑자기 휘몰아치는 태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혼탁해진 내면의 물빛을 정화시키려면 흘려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고 없이 들어 온 불순물들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수문을 적절히 여닫으며 침전시킬 수 있는 훈련이 나에게도 필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오는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다. 익숙한 산책로를 오랜만에 걸어본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와 동행을 자처한다. 하나둘 켜지는 네온사인이 호수에 담기기 시작했다. 이제 곧 밤이 오면 어둠이 지닌 고유의 손길로 호수의 내밀한 상심을 다독이리라.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이 하루 일과로 쌓인 무게를 살며시 덜어 간다. 가벼운 마음이 발끝에 닿는다. 내일이면 이 호수도 조금은 더 환한 얼굴로 하늘을 반기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무심히 바라본 하늘엔 환한 인공 빛에 밀려 난 별들이 묵묵히 본연의 모습으로 미소 짓고 있다.
후박나무 꽃향기
고미화
종일 맑았던 햇살이 서녘 하늘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일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선배 언니였다.
“많이 바쁜 거 아는데 잠깐만 다녀가면 안 될까?”
어차피 저녁식사 시간은 될 테니 절대 거절할 생각은 말라는 듯,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출발하라고 이르고는 곧 끊어버린다.
가끔씩 가까운 지인과 함께 방문하면 텃밭에서 직접 가꾼 채소로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놓으시며 맛있게 즐기는 우리를 친정어머니처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분이다. 그렇잖아도 이맘때가 되면 그분 정원에 가득한 후박나무 꽃향기가 생각나 조만간 찾아뵈려던 참이었다.
잠시 일손을 접고 차에 올랐다. 고운 석양빛이 먼발치에서 뛰어와 반기는 아이처럼 품에 안긴다. 포근한 기운이 조여 있던 감성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듯하다. 따스한 석양의 온기는 잠겨 있던 기억의 방문 하나를 열어 놓았고 어느새 차 안에는 그윽한 꽃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때로 우리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의사소통을 할 때가 있다. 어느 순간 말보다 앞서 나온 몸짓이나 눈빛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은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후박나무 꽃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5월이 되면 봄꽃 향기가 넘실대는 그곳을 나는 ‘시크릿 가든’이라 불렀다.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인 그 집은 차가 다니는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동네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마치 산속에서 울창한 숲을 지나 만나는 평지처럼 그 집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결혼 후 줄곧 아파트에서 살아온 내게 그곳은 참 평온하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여겨졌다.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고 손님을 맞이하는 정원은 언니에게 가족과 다름없었다. 늘 수동적으로 부름을 받고 달려가기 일쑤지만, 나는 그곳을 무척 좋아했다. 좋은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좋지만 아기자기한 뜨락을 산책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마을 맨 안쪽에 자리한 그곳은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집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나무와 화초들이 많다. 커다란 느티나무부터 소나무, 산사나무, 인동초, 으름덩굴 등 작은 동산처럼 일반 주택 정원에서 접하기 어려운 없는 수종들이 즐비하다. 꽃을 좋아하는 언니를 위한 가족들의 배려였다. 지금은 활동이 조금 불편할 뿐 건강하지만, 오래 전 그곳에 터를 잡을 땐 요양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통영이 고향인 언니를 위해 학창시절 고향에서 자라던 식물들을 정원 가득히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선배 문인들이 예찬해마지않았던 그 정원 앞뜰엔 마치 임무에 충실한 보초병처럼 거실 창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후박나무 한 그루가 있다. 긴 동면에서 깨어난 식물들이 기지개를 켜는 봄이 오면서 유독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은 이 후박나무였다. 거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맨 앞에서 싱그러운 잎사귀를 흔들며 왠지 이런저런 세상사는 얘기를 들려 줄 것만 같은 나무다. 먼발치에 있는 느티나무처럼 죽죽 뻗어 제 키를 키우기에만 급급하지 않고, 알맞게 자라난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려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모습이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주인의 성품을 닮은 듯하다. 어쩌면 넉넉한 이 후박나무는 달빛이 환한 밤이면 밝은 달빛을 등에 업고 한 걸음 더 가까이 창가에 다가와 혼자 계시는 언니의 좋은 친구가 될 법도 하다. 이슥한 밤 고요한 시간이 되면 유유히 제 그림자를 창문에 드리우고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리라.
어느 해 봄 그분과 함께 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들렀을 때였다. 그 후박나무 가지 끝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말간 형체가 뽀얀 아기 얼굴처럼 함초롬히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 보는 꽃이었다. 5월의 맑은 봄 파란 하늘 아래 어른 손바닥처럼 넓고 싱싱한 초록 잎사귀 사이로 드러난 우윳빛 하얀 꽃이 얼마나 곱고 탐스러운지 완숙미를 지닌 여인처럼 기품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원하게 뻗어 나온 가지 끝에 고고한 자태로 하늘을 향해 우뚝 얼굴을 치켜세운 꽃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높은 가지를 끌어당겨 코끝에 갖다 대었다. 그런데 마침 옆에 있던 언니가 서슴없이 가지를 잘라 내 손에 쥐어주셨다. 평소 자연의 이치를 존중하고, 인간과 모든 자연과의 상생의 기쁨을 잘 알고 그런 삶을 즐기시는 분이었기에, 망설임 없는 선배의 행동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가 내게 들어와 무심히 있던 심지 하나에 불을 붙여 놓았다. 따뜻한 온기가 조용히 퍼져 마음의 귀를 열어주고 있었다.
가끔씩 집에 들러 차라도 한잔 마시고 나올 때면 이것저것 챙겨주던 언니의 포근한 사랑이 오롯하게 내게 전해졌다. 향긋한 후박나무꽃에서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푸른빛이 배어나왔다. 외로움의 빛이었다. 언니는 홀로 감내하는 그 고독의 시간들을 체화시켜 사랑을 빚어 나누는 것이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사랑은 향기처럼 소리 없이 번지는 것이다. 그 소리 없는 사랑이 꽃향기처럼 스며들어 누군가의 가슴을 충만하게 한다.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떠올려 보는 순간이었다. 언니에게서 받은 훈훈한 인정을 잔잔하게 퍼지는 후박나무 꽃향기처럼 퍼뜨리면서 살아야 할 텐데….
차창을 투과한 노을빛이 따스하게 가슴에 스며드는 평화로운 해질녘이다.
당선 소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고미화
막연하게 들어선 길입니다. 먼 훗날 지나온 길에 대한 아쉬움을 줄이고자 선택한 길이기도 합니다. 목적 없이 들어선 길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틈틈이 읽는 책 속에서 따라 나온 시와 문장들이 분주한 일상에서 쉼표가 되어주었던 것처럼,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이 또 다른 휴식처럼 다가왔습니다. 현재의 내가 지나간 시간 속의 나와 공유하는 시간들이 성찰과 치유의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 톨의 모래에서 우주를 볼 수 있는 시인의 혜안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지만, 보다 넓은 사유와 통찰력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나눌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수필’이라는 아름드리나무를 가지 하나하나씩 짚어가며 지도해 주시고,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 선생님께 깊은 감사 인사드립니다.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응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가족들에게도 고마움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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