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껍질벗는 대나무

느림보 이방주 2017. 8. 6. 11:38

껍질 벗는 대나무


2017년 6월 6일 

담양 죽녹원에서


담양 죽녹원에는 대나무들이 껍질 벗기를 하고 있었다. 껍질 벗기를 끝낸 대나무들이 서슬이 퍼렇게 죽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는 대나무 숲에서 남이 보거나 말거나 껍질을 훌훌 벗어던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껍질 벗는 대나무들은 제각기 껍질 벗는 과정을 보이려고 스스로 연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를테면 석류 껍질이 터지듯 이제 막 껍질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놈도 있고, 균열 생긴 껍질이 벌어지면서 분가루가 하얗게 묻어나는 초록의 몸뚱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놈도 있고, 초록의 몸뚱이가 윤기를 내면서 퇴색된 껍질은 도르르 말려 땅으로 떨어지는 놈도 있고, 도르르 말린 껍질이 다 떨어져 버리고 정말 그런 낡은 옷을 걸쳤었는지 다 잊어버린 채 누더기 하나로 치부를 가리고 있는 놈도 있었다. 누더기조차 다 벗어버린 대나무는 제게 껍질이란 없었다는 듯 큰아기처럼 탐스러운 종아리를 드러내고 초록을 받으려 하늘로 뻗어가고 있었다. 껍질 벗는 진통을 끝내고 이제 끝없는 성장만 남은 미래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또래들과 죽의 장막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껍질 벗는 대나무를 발견하고 그제야 죽순을 찾기 시작했다. 왕겨 속에서 피라미드처럼 암갈색으로 돋아 오르는 왕대이다. 죽순은 암갈색 비늘에 겹겹이 둘러 싸여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피라미드 모양의 작은 죽순 옆에 키가 훌쩍 자란 죽순이 하나 더 있었다. 아니 주변에는 온통 죽순 천지이다. 아주 작은 것부터 이제 막 껍질에 균열이 시작되는 것까지 순서대로 줄을 서 있었다. 마치 대나무 껍질 벗기가 죽순으로부터 대나무가 되는 과정으로 생각해도 될 것처럼 말이다. 짐작할 수도 없는 그녀의 속내도 성숙하여 단단해지면 껍질을 벗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니 옷을 벗는 것이다. 옷을 벗고 윤기 흐르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옷을 벗는 순간 그녀는 성인이 된다.

죽순은 그냥 껍질을 벗는 것은 아니다. 속이 단단해져야 껍질을 벗는다. 눈 속에서 돋 아난 맹종죽도 결국은 맹종의 효성에 감동한 죽순이 속이 차서 몸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속이 차야 알몸을 드러낸다. 내공이 쌓여야 스스로 정한 규범이든 세상이 얽어매어 놓은 규범이든 잊어버리게 된다. 그냥 자신이 규범이 되는 것이다. 규범의 껍질, 규범의 옷으로부터 벗어나면 바로 온전한 어른이 된다.

죽순은 암갈색 껍질을 벗으면서 대나무가 되듯 사람은 규범의 옷을 초월하면서 어른이 되고 성인이 된다. 죽순은 속이 단단하고 굵어진 다음에 아랫도리까지 다 벗어던지고 속살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왕대가 된다. 오히려 만질만질한 종아리가 떳떳하게 생각될 것이다. 대나무는 속이 굵고 단단해져야 옷을 벗는다. 사람도 속이 차고 튼실해진 후에 껍질을 벗어야 남이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남이 나를 손가락질할 때 화를 내기 전에 굵지도 만질만질하지도 않은 알몸을 드러내는데 서두르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허참, 그러고 보니 세상 만물이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나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