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의 문학성 제고
김우종 문학평론가
1. 수필은 문학인가?
수필은 문학이다. 그렇지만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자주 수필문단 안팎에서 문학성에 대한 의문이나 불만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다음 두 가지의 큰 원인이 있다.
첫째, 일부 수필가들의 창작 태도의 안이성이 문학성에 대한 낮은 평가의 원인이 된다.
둘째, 수필은 애초부터 예술로서의 문학 장르로서 확실한 인식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인이나 소설가만이 아니라 문단 외곽에서 수필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문학성이 절실하게 요구되지 않는 경향도 나타난다.
수필이 문학이라면 이는 예술의 한 분야로써 선택된 소수가 전문가적 인식과 책임감을 갖고 창작에 임하며 발표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엇을 쓰고 왜 써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 없이 한가한 시간이나 메꾸는 취미 생활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수필은 문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선의의 수필가들의 명예를 훼손시킨다.
또 30여 년 전까지 전통적으로 대학의 문학 강좌에 수필은 없었던 것도 큰 원인이다. 역사적으로 맨 먼저 문학으로 인식된 장르는 민요의 서정시와 함께 월명사가 주술적 의미를 담았던 제망매가나 도솔가나 무당이 노래처럼 읊던 주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소설은 전설과 판소리 등에서 발전한 서사문학이고 수필은 구비문학 다음인 문자와 인쇄문화 발달 이후의 장르다. 그렇지만 수필은 분명히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장르로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온갖 형태로 누구나 쓰는 산문일 뿐 예술 창작의 전문가적 성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수필에서 문학성 제고를 따지는 것은 근래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며, 특히 수필 수준이 향상된 한국의 현상이다. 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봐도 이 사실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수필은 ‘정서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서 언어 문자로써 표현한 예술 및 그 작품.’이다. 이것은 이희승 국어사전(민중 서림)에서 인용한 문학의 정의다. 다른 사전에서도 약간의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이것은 시나 소설이나 희곡의 정의는 되지만 수필을 의식한 정의는 아니다. 수필은 일반적으로 ‘상상의 힘을 빌려서’ 쓰는 글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수필도 당연히 상상의 힘을 빌려야 되지만 이 정의의 핵심은 시나 소설을 말하는 것이다. 시는 상상적 이미지의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고 소설은 상상에 의한 허구가 기본이므로 상상의 문학일 수밖에 없지만 수필은 원칙적으로 상상이 아닌 사실의 표현이 본질이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아무리 문학적 기교에 의한 변화가 필요하더라도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만난 실제적 사실이 없는데도 어느 특정인을 그런 관계로 표현함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 수필이다. 피천득의 수필에 대하여 이런 문제가 가끔 논의된다. 피천득의 한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인연>이 수필이 아닌 소설이었다는 고백을 들었다는 기사가 있었고, 어느 기자는 일본에 살아 있던 ‘아사코’를 직접 취재한 결과 그녀로부터 수필내용은 자신과 전연 무관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것들이 사실이라면 피천득은 거짓말을 하며 수필의 본질을 배반한 사람이 된다.
이런 논의는 수필이 실제적 체험의 서술이라는 기본 조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지금도 우리가 전통적인 학술적 개념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수필은 상상의 힘을 빌려서’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이 아니다.
이처럼 수필이 애초부터 문학 장르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면 수필의 문학성 제고를 굳이 요구할 이유가 없다. 문학성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산문의 하나로 누구나 붓 가는대로 쓰면 된다.
수필가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윤오영은 수필전문지 『수필문학』 (1972년 3월, 관동출판사)이 나오기 전까지는 원고청탁을 거의 못 받았다. ‘현대문학’은 유명 인사들의 신변담만 수필란에 작은 활자로 실었다. 그러므로 전문적 수필가의 수필은 못 보고 비수필가의 잡문이 수필이라는 인식만 확산시켰기 때문에 수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신춘문예 응모부분에서 지금도 수필은 제외되는 현상을 빚고 있다. 또 다른 유사한 예도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경쟁자를 통해서 각 분야의 수상자를 해마다 뽑던 동서커피문학상에서 이은희의 수필 <검댕이>가 감히 소설과 시 분야를 제치고 대상작으로 선발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물론 이 작품의 우수성 때문이지만 이것이 지극히 드믄 현상인 이유는 심사원들인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수필에 대한 바른 인식이 부족하고 이를 처음부터 제쳐 놓았기 때문이다.
2. 한국 명수필의 문학성
그러면 문학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 상식적 답보다도 좀 더 근원적인 의미설정을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고 다음을 논해보자.
충북은 정지용과 목성균의 고향이다. 정지용이 그렇듯이 목성균은 한국수필계의 정상급 작가로서 문학사에 남는다. 이와 함께 충북은 우수한 현역 수필가들에 의한 활동이 남달리 돋보이는 고장이다.
<명태에 관한 추억>이나 <누비처네> 등으로 이름을 남긴 목성균은 박영수 수필가 초청의 문화원 강좌에서 수필은 ‘신변잡기에서 벗어난 문학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문학성이 무엇인지는 그의 수필 속에 그대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신변잡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한국수필의 문학성 문제를 잘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가가 말하는 문학성을 보자. 앞에서 문학의 정의를 말한 바가 있다. 이것은 원래 시와 소설의 정의에 해당되지만 수필도 문학인 이상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5개 조건만 충실히 살려 나가면 문학성은 제고된다. 언어, 사상, 감정, 상상, 아름다움의 기교의 다섯 가지다.
문학은 ‘사상과 감정(정서)’을 우리말로 상상을 통하여 아름답게 표현하면 된다는 점에서 목성균의 <누비처네>는 우선 귀중한 사상과 감정이 문학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서 사상은 관념이지만 이를 한 편의 시각적 풍경으로 형상화하며 응축시킨 것은 상상적 기법이다.
작자는 가난하고 고달픈 삶 속에서 젊은 부부가 누비처네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달빛 쏟아지는 밤길을 걸으며 근친 가는 풍경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디 있는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명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는 심오한 사상성이 있고, 또 아름다운 정서가 충만하고 이를 감동적으로 전하는 상상적 기법이 우수하다.
그리고 상상적 기법이 구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골격은 실제적 체험이므로 소설과 다른 고유한 장르의 가치를 확보한다.
다만 여기서 ‘푸른 달빛이 쏟아지는 밤길’은 실제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작자는 눈 내리는 밤이든 캄캄한 산길이든 많은 장면 중에서 그런 밤을 선택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상상적 기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이런 장식성은 허구와 무관하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수필이 문학으로서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을 매우 알차게 담아낸 명작이다.
3. ‘신변’으로부터의 탈출
그런데 이런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수필의 더 높은 문학성을 논한다면 우선 이 작가가 말한 ‘신변잡기’부터 거론해야겠다. ‘잡기’가 아닌 문학이 되려면 문학성을 갖추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좀 더 문학의 감동적인 기능을 추구하며 문학적 가치를 고양시키려면 ‘신변’이라는 소재의 한계성부터 재고해 봐야 한다.
<누비처네>나 <명태에 관한 추억>은 훌륭한 문학성에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 소재가 신변적 한계를 지니고 있고 한국 수필 다수의 경향도 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문제는 우리 인생의 근원적 탐구가 ‘신변’적 소재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목성균의 수필들은 우리가 자칫 잊고 있고 모르고 있는 소중한 행복의 의미를 보물찾기처럼 찾아내고 있다. 엄마 등에 업혀서 푸른 달빛을 보며 깔깔대는 애 때문에 너무도 행복한 아내나 남편이나 시아버지의 행복의 웃음을 발견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신변 말고도 소중한 삶의 의미를 전하는 소재는 많다.
<창작산맥>은 필자가 발행인이기에 언급하기 쑥스럽지만 금년 여름호에는 허선주의 <나비효과>가 있고 필자의 <5월의 기억>도 있다. 필자의 그것은 5.18의 5월인데 소재 선택이 <나비 효과>의 경우와 비슷한 경향이므로 전자에 대해서만 말해 보자.
작자 허선주는 서울서 일행 둘을 동반하고 목포 신항을 찾아가 철망 밖 저편에 누워있는 세월호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일행은 철망 가득 매달린 노란 리본 사이로 세월호를 바라보며 자리를 뜨지 않는다. 얼굴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뒤에서는 알아 볼 수 없지만 그들은 모두 세월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것은 목성균의 경우와는 반대다. 작자가 일상적 신변을 떠나서 차를 몰고 목포까지 달려 간 것부터가 다르다. 신변으로부터의 탈출이므로 정반대의 소재다. 그리고 여기에는 행복한 웃음이 없다. 작자는 눈물을 만나러 갔고 스스로 눈물이 되어서 돌아온다. 문학적 기법으로서야 목성균을 따를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지닌 사상성과 감정의 무게와 그 울림은 매우 크다. 아름다움이란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가슴속의 울림 자체가 아름다움이라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대로라면 이야말로 높은 문학성을 지향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일상적 신변으로부터의 탈출형태지만 그것이 ‘신변’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사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적 역사적 현상의 하나이며 우리의 모든 ‘신변’도 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신변적 울타리를 허물어 버려야 우리는 실제적 현실 속의 나 또는 우리를 만나는 것이므로 수필의 진정한 문학성을 위해서는 신변 탈출의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다.
기독교나 불교나 천도교에서 말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사랑이듯이 문학이 우리 주변과 인류를 향해 전해야 할 가장 소중한 메시지도 사랑일수 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누비처네의 행복도 군사독재의 폭력이 없고 전쟁이 없고 모두 사랑과 평화라는 더 큰 누비처네가 있어야 보장된다. 이를 위한 문학이 허구가 아닌 현실적 실체가 되려면 사랑을 저해하는 모든 사회적 역사적 장애물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도 꼭 필요하다. 그런 뜻에서 감동적인 문학성 제고는 지금까지의 편안한 ‘신변’의 울타리를 허물고 온 세상의 근심 걱정까지도 안아 들이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수필의 제재와 문학적 상상의 한계
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김우종 교수님 건강하신 모습 뵈니 반갑고 기쁩니다.
폭염에 멀리 궁벽한 시골 문단까지 오셔서 귀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충북 수필 문단에 옹골진 영양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여 더욱 감사합니다.
‘한국 수필의 문학성 제고’ 라는 다소 포괄적인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다보면 수필 문학이 천대 받는 이유로 모든 수필가들의 책임이 크다는 식으로 코끼리 귀만 만지고 마는 토론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수필의 문학성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는 원인을 주로 수필가에게 두시면서도 수필문학 외곽에도 일말이 원인이 있음을 밝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한국수필문학의 문학성 제고를 위한 방법으로 수필의 기원과 기원에 따른 수필만이 가지는 독자성을 말씀하셔서 공감하였습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시, 소설, 희곡은 그 기원에 따라 허구가 허용되지만, 수필은 가장 나중에 형성되었고 그런 이유로 앞의 다른 양식에 비해 사실에 바탕을 둔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수필은 사실의 표현이 본질이지만 문학성을 획득하려면 제재의 관념적 사상을 시각적 풍경으로 형상화하는 상상적 기법이 허용된다고 말씀하신데 공감합니다.
목성균 선생님의 누비처네를 예로 드셨는데, 이 작품 말고도 최근에 발간된 목성균 수필집 『누비처네』 에 수록된 101편의 작품 거의가 신변이나 일상이라는 제재에 담긴 작가의 사상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신변을 잡기로 전락시키지 않고 철학적으로 의미화하여 예술성을 확보했다는 말씀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수필의 문학성을 제고를 위하여 목성균식 신변 소재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더욱 발전적인 방법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허선주 선생님의 <나비효과>를 예로 드셨습니다. 저도 이 말씀에 찬성합니다. 저는 백제의 산성과 산사를 찾아가서 거기서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땀을 흘립니다. 그런데 목성균 선생님은 그의 <명태에 관한 추억> 서문에서 “소설, 시 등이 재주로 쓰는 글이라면 수필은 도(道) 닦듯 쓰는 글이라면서 소재를 진솔하게 술회(述懷)하는 것만이 수필일 뿐, 주제를 염두에 두고 소재를 술회하는 것은 픽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제를 정해놓고 산성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현실적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비 효과>는 주제를 먼저 정해놓고 목포항을 찾아간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세월호 당시 저도 <생명>이란 주제를 정해놓고 단원고등학교와 안산화랑공원 분향소를 찾아갔었는데 그 처절함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라도 하면 손바닥에 피가 묻어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입에 담기도 싫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필의 이러한 허구성을 거부하는 목성균 선생님의 글도 그의 상상기법은 작위적이고 소설적이라 수필적 독자성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는 평론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수필에서 신변이 잡기기 되지 않기 위해서 ‘신변 탈출’과 ‘상상적 기법’을 어떻게 조화해야 되는지 강조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두 번째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교수님의 작품 <5월의 기억>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을 여쭙겠습니다. 이 글에서 교수님께서 서정주의 변절적인 친일 문학을 비판하면서 그의 시 <국화 옆에서>를 국정 교과서에서 삭제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서정주의 음모와 윤동주의 눈물>도 읽고 교수님의 시선에 찬성했습니다. 그래도 일선에서 30여 년 간 문학을 가르쳐온 교사로서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유치환의 <깃발>과 함께 우리나라 시문학사나 시의 기법을 가르치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국화 옆에서>를 가르치면서 일제 강점기 서정주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의 기회주의적 변절문학을 얘기하지 않는 국어교사는 아마도 드물 것입니다. 임화의 <우리 오빠의 화로>가 문학 교과서에 게재되어 카프 문학을 설명하기 좋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오빠의 화로>를 설명하면서 모든 교사는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다름을 설명하지 않는 교사도 없을 것입니다. 작품 없이 이론으로만 가르쳐서는 고등학교에서 한국문학 공부를 끝내는 학생들은 카프나 변절문학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치욕적인 민족사도 우리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복철지계로 삼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동주가 일본유학을 가려고 치욕적으로 창씨개명을 했듯이 우리의 아픈 민족사로 여기고 그의 변절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한국문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을 아닐까 교수님의 생각을 다시 여쭙겠습니다.
토론의 목적을 생각하다 보니 다소 무례한 질의가 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더욱 건강하셔서 100세 너머까지 지금처럼 못 가시는데 없이 다니시면서 후배 문인들을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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