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한국 수필문학의 ‘죽음’ 제재 수용법 - 박영자의 <상실의 계절>에서 -

느림보 이방주 2017. 7. 3. 22:29

한국 수필문학의 죽음제재 수용법


- 박영자의 <상실의 계절>에서 -


 

1. 죽음의 변증법과 한국문학

 

(1) 죽음의 본능(Thanatos)

죽음은 무엇일까? 사람은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사건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생의 많은 사건은 대개 운명적인 그것과 의지적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탄생은 운명적이지만 죽음은 운명적인 죽음 뿐 아니라 선택에 의한 죽음도 있다. 그래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9~1939)는 사람에게는 삶의 본능(Eros)과 함께 죽음의 본능(Thanatos)도 있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현재 자신의 정체성, 현재의 사랑, 삶의 조건을 유지하거나 제고(提高)하려고 노력한다. 물방울이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계속 이웃의 물방울과 하나가 되어가듯이 말이다. 이것이 삶의 본능이다. 삶의 본능이 정체성의 유지로 나타나든, 사랑과 성애의 욕구로 나타나든 세계는 자아의 상승하는 욕구를 모두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아와 세계는 충돌하고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삶의 본능이 세계와 충돌하여 갈등이 극심해지면 사람은 자신의 유지를 포기하고 좌절하여 죽음을 택하게 된다. 태초의 탄생 이전의 원향(原鄕), 고통 없는 평화의 세계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죽음의 본능 타나토스이다.

 

(2) 죽음의 변증법적 미학

죽음의 가치는 결국 삶의 방식으로 평가 받는다. 사람들은 때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영생(永生)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가치 있는 삶으로 부활한다는 의식이다. ‘가 죽은 그 자리에 삶이 비로소 가치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모순된 두 사건이 지양(止揚)되어 하나로 완결되는 것이다. 이것을 죽음의 변증법이라고 하겠다. 죽음의 변증법적 미학은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문학 작품에서 찾아낼 수 있다. 삶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죽음은 자연 법칙에 따른 일반 질서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경건하게도 하고, 사색과 상상의 영역을 깊고, 넓고, 한 차원 높게 한다. 죽음은 삶의 바탕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 전제된다.

 

살고 죽는 길이

예 있으매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 다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가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월명 <제망매가>-

 

<제망매가>는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를 시사한다. 죽음은 곧 영생(永生)이라는 인식이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으므로 두려워하다가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라는 신념이 굳어진 다음에는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라며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세속적이고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의 죽음은 성스럽고 초월적인 공간인 미타찰에서는 영생으로 변증법적 의미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미타찰에서 만남은 초월적 세계에서 통합적 영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종교적이고 역설적인 상상력에 의한 죽음의 수용이다.

 

<공간의 이동에 따른 의식의 변화>

생사의 갈림길 헤어짐 한 가지 떨어짐 미타찰에서 만남

(세속적 한계) (사별) (세속적 관계) (세속적 죽음) (초월적 세계 영생)

<종교적 신념에 따른 정서의 변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미타찰존재에 대한 믿음 죽음에 대한 기다림

(세속적 감각적 가치) (종교적 신념) (종교적 신성의 가치)

 

이 시에서 죽음에 대한 기다림은 종교적 신념에 의한 신성한 가치의 선택이다. 영생을 위한 죽음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2. 고대 수필문학에서 죽음제재

 

(1) 사생관(死生觀)의 정신적 기저

죽음에 대한 문학의 반응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그리고 문학의 표현 양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한국문학에 수용되는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의식도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문학에서도 죽음이란 제재는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다. 현대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표면적 의식은 누구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는 합리주의적 인식의 밑바탕에 숨어 있는 심층적 의식이 수용되어야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인의 의식의 기저에는 불교, 도교, 유교와 같은 동양적인 교양이나 도덕적 윤리 의식이 숨어 있고, 더 심층에는 샤머니즘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한문 수필로 분류되는 작품들에 수용된 죽음제재를 살펴보면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2) 도가적 초월의식

도가사상은 죽음을 자연의 순리로서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노자나 장자는 삶을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 참된 삶의 모습이라 생각하였다.

 

이제까지 나를 시중해 주던 마부(馬夫)가 말한테 발을 밟혔기 때문에, 그를 뒷수레에 실어 놓고, 이젠 내 손수 고삐를 붙들고 강 위에 떠 안장(鞍裝)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모두고 앉았는데, 한 번 말에서 떨어지면 곧 물인 것이다. 거기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性情)을 삼을 것이리라. 이러한 마음의 판단이 한 번 내려지자, 내 귓속에서는 강물 소리가 마침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할 수 있었다. 마치 방 안의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하는 것 같았다.

-박지원 <一夜九渡河記>에서-

 

자아는 물에 빠지면 곧 죽음인 위험한 상황에서 물, 곧 죽음을 땅, , , 성정으로 삼겠다는 마음의 판단을 내린다. 이런 판단 후에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평정심을 찾는다. 한국 전통 수필의 죽음제재에 대한 전통적 초월의식이 수용된 모습이다.

 

(3) 불교적 윤회사상

우리 민족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지배하는 사상으로 우선 불교적 윤회관도 있다. 불교적 윤회관이나 왕생극락의 사상은 사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데 기여하였다.

 

울창한 소나무 사이에 당신을 안장하니 당신의 어머니와 아들이 동쪽에 있게 되었소. 당신의 무덤은 섣달에나 쓸 작정이니 구천(九泉)에 모이게 되면 즐거움이 무궁하리라. 죽은 자는 그렇거니와 살아 있는 나는 누구와 즐겨야 한단 말이오. 술을 부어 고하매 슬픈 마음 다할 길이 없구려. , 슬프외다.

- 김종직 <죽은 아내에게>에서-

 

15세기 성리학자 김종직의 <죽은 아내에게>라는 한문 수필이다. 이 글에서는 죽음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죽은 자들끼리 저승에서 재회한다는 생각이 드러나 있다. 죽음이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에서 부활하여 재회한다는 불교적 윤회사상이 저변을 지탱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단절의 슬픔을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음으로 재회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죽음을 초월적 세계에서 새로운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방편으로 종교의 신성한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4) 유교적 현실주의

공자는 죽음에 대한 제자 자로(子路)의 물음에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랴. [未知生焉知死]’라고 대답하여 죽음에 무관심한 듯했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온 제자 안회의 죽음 앞에서 ! 하늘이 날 버렸구나. 하늘이 날 버렸구나[! 天喪予, 天喪予]’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처지로 돌아가 생각할 때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며 결연함을 보였다. 공자는 결국 죽음보다 앞서는 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고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의 가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어떤 관계와 어떤 가치를 이루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것이다.

 

살고 죽는 것과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다 하늘이 내린 것이며, 길흉과 영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므로 모두 참된 나는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런 것들을 기쁘게 여기거나 두려워한다면 이는 정()이 승()한 것이다.

- 이색 <유숙柳淑)의 시집 서문>에서-

 

고려 말 주자성리학자인 목은(牧隱) 이색의 글이다. 삶과 죽음은 하늘이 내린 것이며, 길흉과 영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므로 참된 나가 아니니 기뻐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 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노자나 장자가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의 한 과정으로 여기는 것과 상통한다.

 

(5) 샤머니즘의 죽음의 세계

한국인의 우주관의 저변에는 샤머니즘이 있다. 샤머니즘에서는 죽음의 세계를 이승의 저편에 있는 세계로 상정하였다. 세계는 이승과 저승에 이어 귀신의 세계라는 제3의 세계까지 3계로 이루어진다고도 생각하였다. 그래서 죽음의 세계를 생전에 원한이 있는 귀신이 떠도는 세계로 보기도 했다.

 

, 형이여! 나의 애통함을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아마도 아득하고 적막하여 저는 형의 죽음을 알지만 형은 살아 있는 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슬픕니다. 죽어서 영혼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형의 영혼은 반드시 이런 저의 마음을 아실 것이며, 아신다면 어찌 이 자리에서 저의 마음을 털어 놓지 않겠습니까?

-김일손 <형을 제사하는 글>에서-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상반된다고 본다. 공자가 제자 안회의 죽음을 슬퍼하듯이 형의 죽음에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6) 죽음의 가치

죽음의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죽음이 지향하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의식도 있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토로한 것은 도를 깨닫는 가치가 죽음의 슬픔보다 더 소중하다는 의미이고,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려도 좋을 것이라 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자기희생을 구차하게 살아 있는 것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3. 현대 수필문학에서 죽음

 

(1) ‘죽음에 대한 전통적 의식의 계승

현대문학에서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계승한다. 예컨대 1920년대 동인지 백조(白潮)는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예찬과 동경하는 작품이 대세였다.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곳에 참이 있나니라며 죽음을 삶의 괴로움에서 해탈된 참이 내재된 세계로 노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괴로운 삶을 버리고 귀의할 원향이며 참된 진리의 성소(聖所)라고 여겼다. 이러한 죽음의 찬미는 소설에도 수용되었다.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는 추악한 외모인 주인공의 인생이 죽음으로써 현세의 사슬과 번뇌를 벗어버리고 죽음의 미학을 획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른 작품에서 자연의 순환질서에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성을 토로하고 있어 죽음이 삶의 세계와 단절을 의미하는 15세기 성리학자들의 수필문학에 드러난 의식과 같이한다. 소월의 시 <금잔디>가 이를 잘 말해준다.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인간은 한 번 죽으면 되돌아 올 수 없다. 한 번 죽어 이별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소월의 <금잔디>는 전통적인 상여노래나 장송과 맥을 같이 한다. 봄으로 대유된 자연은 가더라도 다시 오는데 가신님으로 대유된 인간은 되돌아올 수 없다. 철저하게 자연의 순환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죽음은 인간의 유한성의 극치이고 단절의 성벽이다.

죽음은 변신과 환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사유 방법도 현대문학에 계승되었다. 한하운의 시 <파랑새>는 이러한 변신관의 일면을 보여 준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에서는 죽어 현세보다 더 자유스러운 세계로의 환생을 꿈꾸고 있다.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라고 한 소월의 <접동새> 뿐 아니라,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던 유치환의 <바위>도 이에 해당된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이른바 죽음의 본능을 계승한 작품도 찾아 볼 수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삶의 가치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의지적 본능을 드러내었다.

이와 같이 죽음제재에 대한 선인들의 의식은 현대 문학에 계승되었다.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예찬과 동경, 죽음은 자연의 순환질서에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성, 죽음은 변신과 환생을 이룬다는 전통적 사유,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의지적 선택이라는 죽음의 본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박영자 수필에서 죽음의 변증법

현대 한국 수필문학이 죽음제재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박영자 수필가의 작품을 통하여 알아보겠다. 박영자 수필가는 1990년 월간 한국수필로 등단하여 활발히 창작 활동을 해왔다. 박영자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 중에는 죽음을 제재로 한 작품이 많고 죽음에 대한 인식이 전통의 맥을 잇고 있으며 매우 인상적으로 형상화 되었기에 이 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최근 발표한 <상실의 계절>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전통적 의식과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인 한국인의 의식 세계를 수필적 상상을 통하여 수용하였다. 박영자의 죽음제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그의 수필집인 은단말의 봄(선우미디어, 2000) 햇살 고운 날(선우미디어, 2006) 해자네 앞마당(선우미디어, 2012)을 비롯한 최근에 발표된 다수의 작품에 수용되었다. 이제 박영자의 작품을 보면서 그의 죽음제재 수용법을 알아보고 아울러 한국 수필문학의 죽음제재 수용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환생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환생하는 것일까? 죽음을 환생의 한 과정으로 보는 것은 우리 문학 작품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구운몽에서는 비록 꿈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성진이 양소유로 환생하여 한 때 꿈꾸었던 환락의 삶을 누려본다. 위에서 이미 밝힌 바 있는 한하운의 시 <파랑새>나 소월의 시 <접동새>도 환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수필은 죽음을 환생으로 인식하여 수용하기는 매우 어려운 양식적 특징이 있다. 수필은 사실의 문학이고 체험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수필에서 매우 어려운 죽음에 대한 환생의 의식을 자연스럽게 수용하였다.

 

백분처럼 하얀 마사토를 한 움큼 집어 드니 똑 고른 알갱이가 너무 깨끗하다. 살그머니 볼에 대본다. 햇살 묻은 흙에서 따스함이 전해온다.

모두들 죽음의 엄숙함에 압도된 것일까 순례자의 행렬처럼 묵묵히 가파른 길을 오른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길처럼 숨이 헉헉 차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큰 제비나비 한 마리가 너울너울 앞선다.

(중략)

자리 참 좋구먼유. 우리와 이웃이네.”

마음 좋아 보이는 아저씨네는 바로 우리 뒷줄이다.

앞뒷집에서 잘 지내면 되겠네요.”

아저씨도 남편도 껄껄 웃는다.

감사하다.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았던 걱정거리가 잘 풀려 속이 후련하다. 밖엔 어느새 저녁노을이 붉다. 서산마루에 지는 해가 어둠을 펴놓고 가듯이 우리에게도 머지않아 어둠이 내리리라.

- 박영자의 <집 두 채>에서-

 

수필 <집 두 채>에서 집 두 채라는 제재 자체가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을 동등한 선상에 놓고 생각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 마치 죽음이란 이쪽 마을의 한 집에서 살다가 저쪽 고을의 다른 집으로 이사하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일상의 공간과 초월적인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는데 한 점 장해 요인이 없다. 또한 묘지의 이웃이 될 초면의 아저씨와 삶의 세계에서 이미 다정한 대화를 나누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삶의 공간에서 상상적으로 설계하고 있다. 묘지의 마사토에 대한 온감, 친근감도 그렇고, 반기는 제비나비는 작가의 환신처럼 신비롭다. 묘지를 마련한 후련함은 오히려 죽어 환생을 기대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죽음은 기다림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진솔함을 우리에게도 머지않아 어둠이 내리리라.’며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죽음을 환생의 방편으로 인식하는 사고를 수필에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데 매우 자연스럽게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죽음은 생성과 소멸의 자연 이치

죽음은 매우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이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 법칙에 따르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도가적 사고도 박영자 수필에는 수용되었다.

 

이 나이까지 무사히 살았으면 됐지 무슨 미련을 둘 것인가. 생성과 소멸이 자연의 이치인 것을. 다만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가게 될까 그게 걱정이다. 또한 자식들과 가족과 지인들에게 큰 빚을 지지 않고 갈 수 있기를 기구한다. 언젠가는 꼭 가야 할 그 길을 너무 아파하지 말며, 평온한 마음으로 여행 떠나듯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박영자의 <언젠가 가야 할 그 길>에서-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다. 세월은 우리가 빈손으로 온 것처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 것이다. 이 세상의 고관대작도 억만장자도 세월 앞에는 평등하여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모든 부귀영화도 종당에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안개 사라지듯 잊혀져 가고 말 것이다.

-박영자의 <세월>에서-

 

심청이의 효심을 말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겠지만 제 부모가 죽는다는 극한상황에서도 눈도 꿈쩍하지 않는 비정한 세상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이제 노인은 잉여인간이 되어 한 사람이 죽으면 기뻐서 만세를 부르는 세상이 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거스르지 못하는 인간의 갈 길이다. 그러니 누구나 늙고 병들어 죽게 마련이다. 젊은이들이 언제까지나 젊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박영자의 <택배>에서-

 

수필 <언젠가 가야할 그 길>에서 죽음이란 것은 생성과 소멸의 자연 이치이기에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원하고 있다.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므로 죽음의 가치는 곧 삶의 과정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고이다. 이와 같은 철학적 사고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므로 오히려 독자를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인식은 수필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쉽다 하더라도 독자의 공감을 얻기도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경계하는 것으로 독자에게 은근한 교시를 건네는 교술성을 보여주었다.

<세월>은 누구나 한 줌흙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기억 속에서도 안개 사라지듯잊힐 것이라 하였다. 이 또한 당연한 이치이지만 안개 사라지듯이란 감각적 비유에 의해 독자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리라 본다. 수필은 독창적 인식을 인상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생명이지만 일반적인 인식도 표현의 방법에 따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수필적 자아의 인식도 일반화되어야 하는 것이 수필문학의 특성이다.

<택배>는 세태에 대한 개탄과 더불어 생로병사가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순리이므로 젊음도 영원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위 세편의 수필에서는 죽음을 생성과 소멸의 자연적 이치라는 철학적 인식을 수필에 수용하였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슬픔

 

죽고 사는 것은 신의 뜻이지 사람이 어쩌지 못한다고, 신의 뜻에 맡기라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남의 이야기지 피붙이들의 아린 가슴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박영자의 <생명>에서-

 

그 분은 정말 티 없이 깨끗한 분이었으니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편안하게 수필을 쓰고 계실까. 이야기꾼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분인데 못 다한 이야기는 어찌해야 할지…….

가신 후에도 한동안 홈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그를 좋아하던 분들과 자녀분들이 명맥을 이어가며 그분의 유작을 올리기도 하고 생전의 면면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그분을 추모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박영자의 <금 따러 간 사나이>에서-

 

수년 동안의 병 수발에 골이 빠진 친구, 이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난 줄 알았더니 여전히 함께 살고 있었다. 죽은 남편에게 사랑만이 아닌 불평불만도 자주 털어 놓던 친구였지만 죽어서도 그 분에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늙어서 의지할 곳은 자식보다도 남편이라고 했듯이 질긴 인연이 부부 사이다. 남편 구두 한 켤레는 남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박영자의 <구두 한 켤레>에서-

 

수필 <생명>은 죽음을 자연의 이치라고 하더라도 피붙이일 경우 슬픔을 피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금 따러 간 사나이>는 고 목성균 수필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다. 비슷한 연배인 문우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과 추모하는 문우들의 모습을 통하여 죽음은 슬픔이라는 인식을 인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구두 한 켤레>는 남편을 사별한 친구를 통하여 죽음을 슬픈 일상으로 인식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구두 한 켤레라는 객관적상관물을 통하여 슬픔을 표현하여 수필문학의 문학성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죽음의 세계는 돌아가야 할 원향(原鄕)

문학이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이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실한 가치를 발견하는 예술이라면, 수필은 다른 문학 양식과 갈등을 수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수필문학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에서 결국 자아가 세계에 귀착된다. 그래서 수필의 인식과정을 자아의 세계화라고 규정한다. 박영자 작품들의 죽음제재 수용과정을 종합해 보면 죽음은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슬픔에 빠지게 하며 걷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의 대상지만, 자연의 이치이며 돌아가야 할 원향이라는 보편적 인식으로 귀착된다. <찔레꽃><상실의 계절>은 이와 같은 인식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남편을 산에 묻고 경황없이 돌아오는 차속에서 눈물도 말라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산기슭 양지바른 밭두렁에 새하얀 찔레꽃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찔레꽃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잿빛 슬픔이 안개처럼 몰려온다. ! 어쩌자고 찔레꽃은 오늘도 나에게 또 서러움을 부추기는가.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찔레꽃의 손짓은 내 가슴에 또 한 켜의 앙금을 쌓았다.

계절의 여왕 5월은 얼마나 찬란한가. 연초록과 초록 사이로 계절이 스쳐 지나갈 그 때가 나에게만은 견디기 어려운 잔인한 달이 되었다. 순박한 꽃, 하얀 꽃, 찔레꽃은 나에게 한없이 슬픈 꽃으로 각인 되었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던 산골 소녀 찔레의 무덤에서 피어난 슬픈 넋이라지만 나를 울리는 꽃이 되었다.

- 박영자의 <찔레꽃>에서-

 

우리는 이제 하나씩 둘씩 잃어가는 상실의 계절에 서성이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빈손이었다. 부모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고 친구와 이웃, 직장 동료를 만나면서 인연을 맺어 왔다. 하나라도 더 주워 모으려고, 하나라도 더 알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 두 손 가득 움켜쥐었던 금쪽같은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세상 모서리로 한 발짝씩 물러나 뒷걸음질 치는 듯한 소외감을 지울 수가 없다. 아프다는 소식, 누구누구가 죽었다는 우울한 소식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지만 물이 아래로 흐르듯 탄생과 성장과 소멸이라는 순리를 어쩔 도리가 없다.

-박영자의 <상실의 계절>에서-

 

세계는 부모, 형제자매, 이웃, 친구, 직장 동료를 하나 둘씩 상실 계절로 다가오며 자아와 대립한다. 작품 <찔레꽃>에서와 같이 자아는 슬픔과 좌절에 빠져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물이 아래로 흐르듯 탄생과 성장과 소멸이라는 순리에 귀착한다. 이처럼 수필은 제재에서 경험한 사실을 독창적으로 인식하지만 결국 철학적 일반화로 대중의 공감을 불러온다.

 

죽음의 변증법적 미학

 

7월의 이 왕성한 푸르름도, 얼마 가지 않아 잎을 거두고 갈색으로 변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다. 해바라기가 태양처럼 저리도 열정을 불사르지만 저 꽃이 져야 씨앗을 맺는다. 어쩌면 상실은 완성을 위한 전주곡인지도 모른다.

하나씩 둘씩 잃어가다가 모두 잃어버리는 날 내 인생도 완성되려나. 7월도 또 강물처럼 흘러간다.

-박영자의 <상실의 계절>에서-

 

박영자는 그의 수필 <상실의 계절>에서 상실, 곧 죽음을 인생의 완성이라 하였다. 이것은 지()할 것은 지하고 양()할 것은 양하여 얻어내는 완성이라는 하나의 변증법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초록의 왕성함이 잎을 거두고 열정적인 해바라기도 꽃잎이 떨어져야 씨앗을 맺는다. 상실은 진정 완성된 삶의 전주곡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의 아픔 앞에서 인생의 완성으로 인식하여 평정심을 찾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박영자의 <상실의 계절>을 읽으면서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인생의 결실이라고 부지불식간에 수긍한다. 이것이 자아의 세계화라는 수필문학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문학적 독자성이다.

 

죽음제재의 형상화 방법

이제 수필문학이 죽음이라는 제재를 수용하여 형상화하는 과정을 박영자의 작품 <상실의 계절>을 통하여 분석해 본다.

 

<상실의 계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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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을 넉넉히 풀어 붓질하던 5월은 싱그러운 소년의 모습으로 찬란하고 향기로워 사랑스런 달이었다.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내던 5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이별의 말 한 마디 해볼 새도 없이 졸지에 남편을 놓치고 말았다. 그 날부터 세상은 온통 우울한 회색빛으로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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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려고 허우적대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는 나에게 5월은 또다시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잔혹하게 굴었다. 내 피붙이 중에도 가장 살가웠던 그 애, 사랑하는 내 여동생이 떠난 지 이제 두 달이다. 지상에서 영원한 이별만큼 슬픈 것이 또 있을까. 아직 내 가슴에는 비가 내린다. 피울음 같은 비가 내린다.

암 투병 8, 참말 질기도록 모질게 버틴 세월이었다. 3기라는 그 말을 못해서 우리는 2기라고 그 애를 속였다. 반복되는 항암치료에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은 우수수 무너져 내렸고, 발톱이 다 녹아나서 쌀알만큼만 남았어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칠까 두려워 한 번도 죽음을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매달고 살았다. 아니, 죽지는 않을 거라고 굳게 믿다가도 어느 날은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잔인한 시간들이었다.

청주에서 수원까지 입퇴원을 거듭하며 길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만 고마웠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도는 깊어졌고 너는 꼭 나을 거야.”라는 희망의 말 외에 아무것도 도울 길이 없었다.

우리의 기도가 물거품이 되던 그 밤, 살고 싶어 감지 못하던 그 애처로운 눈빛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외면하고 피울움을 울어야 했다. 그 기억은 더 새록새록 살아나 생살을 도려내듯 쓰리고 아프다. 예순 다섯의 나이가 아깝고, 그 애와 쌓아온 살뜰한 정이 불쑥불쑥 머리를 들고 올라오는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그 애는 좋은 데 갔어. 하느님 곁으로 갔어. 이제는 아프지 않고 살 거야.’를 주문처럼 외워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이 집착이 언제 쯤 나를 놓아 줄 것인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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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이 왔다. 몇 번을 망설이다 통화가 되었다. “, 전화 바꿔드릴게요.”라는 말 뒤에 귀에 익은 친구의 목소리는 상 노인네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다. 두 마디가 채 이어지지도 않아서 간병인이 낚아채듯 바꾸어서 하는 말의 요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뇌출혈 후 채매가 왔고 설상가상으로 넘어져 고관절을 수술하고 입원실에 있는데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이다.

몇 달 전에 남편을 잃고 방황하는 친구에게 먼저 겪은 사람의 도리로 시간이 약이라고 위로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금세 무너져 내릴 수가 있는가. 친구와의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임은 이해가 가지만 왜 엉뚱하게도 지극히 사무적인 간병인의 처사가 야속하고 섭섭하기만 할까. 이 상황을 어찌해야 옳을지 한숨만 나온다. 또 하나 친구를 잃을 것 같은 상실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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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고향 친구와 이메일로 좋은 정보를 열심히 주고받았다. 남편이 가고 난 후에 그 메일이 내게로 들어왔다. 가끔 안부를 묻기도 하며 나를 걱정해주니 고마웠다. 어느 날부터인지 메일이 뚝 끊어졌다. 메일만 받고 답이 없는 내가 섭섭했겠다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에 그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저 한글을 다 잊어버렸어요.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네요.”

한글을 잊어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진다. 그는 시인(詩人)이기도 했다. 그 분의 난감해하는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이런 황당한 일도 있는가. 나는 당황하여 병원에 가보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나씩 잃어가는 이 상실의 계절이 야금야금 다가온다는 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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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볼일을 보러가는 길, 저만치 한 노파가 허리를 45도쯤 꺾은 채 걸어가고 있다. 상체가 앞으로 쏠리니 곧 넘어질 듯 위태롭다. 내 차가 그를 지나칠 무렵 그는 무의식적인 듯 뒤를 돌아본다. “, 이 선생님!” 내 입에서 신음처럼 내뱉은 소리다. 차를 세우려고 멈칫거리다 생각하니 바로 그의 집 근처다. 나는 가슴이 메었지만 모르는 체 차를 몰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학교 동료이자 선배인데다 모임도 같이 하는 절친한 사이다.

한 보름 전 쯤 그 남편의 부음을 받고 누구보다 먼저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담담할 정도로 멀쩡했었다. 투병기간이 몇 달 되었으니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가 보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 동안에 금세 저렇듯 무너진 모습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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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하나씩 둘씩 잃어가는 상실의 계절에 서성이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빈손이었다. 부모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고 친구와 이웃, 직장 동료를 만나면서 인연을 맺어 왔다. 하나라도 더 주워 모으려고, 하나라도 더 알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 두 손 가득 움켜쥐었던 금쪽같은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세상 모서리로 한 발짝씩 물러나 뒷걸음질 치는 듯한 소외감을 지울 수가 없다. 아프다는 소식, 누구누구가 죽었다는 우울한 소식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지만 물이 아래로 흐르듯 탄생과 성장과 소멸이라는 순리를 어쩔 도리가 없다.

인생의 질곡이 불행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라도 붙잡고 살다보면 희망의 빛도,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오려나.

7월의 이 왕성한 푸르름도, 얼마가지 않아 잎을 거두고 갈색으로 변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다. 해바라기가 태양처럼 저리도 열정을 불사르지만 저 꽃이 져야 씨앗을 맺는다. 어쩌면 상실은 완성을 위한 전주곡인지도 모른다.

하나씩 둘씩 잃어가다가 모두 잃어버리는 날 내 인생도 완성되려나. 7월도 또 강물처럼 흘러간다.

- 충북여성문학20(2016)에서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라 하고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한다. 이런 정의는 수필은 구성이 불필요한 문학 양식이라는 오해를 불러온다. 그러나 구조화되지 않은 수필은 그냥 이야기는 될지언정 문학 작품이라 하기 어렵다. 수필이 사실의 체험을 통찰하고 자아와 세계의 대립 과정에서 감성적이든 이성적이든 반응을 보이고 자아가 세계에 귀착되는 과정을 분석해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작품은 [] [] [] [] []5개의 화소가 []에 귀결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앞의 5개의 화소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상실이라는 하나의 화소로 귀결되어 결국은 하나씩 둘씩 잃어가다가 모두 잃어버리는모순을 거쳐 내 인생도 완성되는 변증법적 극복에 이르게 된다. 5개의 화소가 []에 귀결되는 구조이지만 단순한 귀결은 아니다. 5개의 화소가 모두 상호보완관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전체의 담화를 하나의 완성된 담화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 []친구 남편의 죽음 []한글을 잊어버린 시인[]직장 동료의 무너지는 모습과 같은 단계를 거치면서 점강적으로 전개되어 []상실의 계절에 귀결된다. 앞서 사별에서 오는 슬픔은 인간관계에 따라 다름을 설명했는데 가장 절박한 슬픔으로 시작하여 심상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슬픔이라는 개인적 정서는 모든 사람의 슬픔이라는 일반적 정서로 객관화되면서 상실의 계절에 귀결된다. 슬픔은 나만의 슬픔일 때 처절하다가 모든 사람의 슬픔이라 깨닫는 순간 자연의 원리로 일반화되면서 극복하게 된다.

각 담화 단락의 이야기 전개 과정을 보면 사실의 체험 통찰 자기체험의 반추 자기고백 자아와 세계의 대립 자아의 세계화 감성+이성+영성적 반응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확연하게 공식화할 수는 없다. 이것은 가장 처절한 죽음의 계절이 가장 생동감 넘치는 5월이어서 더욱 처절하듯이 모든 언어와 요소들이 구조화되고 미적 배열을 이루어 온전한 문학적 담론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화소의 전개와 구성은 수필문학만이 가능한 독자성이라 생각한다. 박영자의 <상실의 계절>은 이러한 독자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수필문학의 문학적 가치를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박영자 수필가는 요란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수필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머물러 있는 작가도 아니다. ()하는 듯 동()하고 동하는 듯 정하며 깊은 사색으로 오묘한 삶의 철학을 평이한 언어로 풀어내어 독자를 감동시키는 작가이다. 그의 삶이 곧 수필이고, 그의 작품이 곧 그의 삶이다.

 

4. 수필문학과 죽음의 변증법

 

지금까지 한국 고대와 현대의 수필문학이 죽음제재 수용법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한국 수필문학이 죽음제재를 수용하고 계승하는 양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박영자의 작품 <상실의 계절>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고대와 현대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을 분석했는데, 구조적 수용법만 분석하고 언어적 형상화 방법은 생략하였다. 그 이유는 지면의 한계도 있지만 언어적 형상화는 죽음제재에 국한하여 설명한다는 것이 크게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필문학의 독자성은 창작과정을 통하여 설명하면 분명해진다. 조동일은 그의 한국문학통사에서 작품외적 세계인 실제로 있었던 사물이 개입하고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 세계로 귀착하여 자아가 세계화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통찰 끝에 독창적 경험 세계를 창의적이고 미적인 언어를 통해 형상화하는 것이 수필이다.

영국의 수필가이자 비평가인 월터 페이터(W. H. Pater 1839~1894)수필은 문학과 철학의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 다른 문학 양식과 달리 수필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을 개성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수필은 문학성과 철학성을 동시에 띠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이 인식과 형상으로 이루어진다면 수필은 대상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영자의 <상실의 계절>에서 죽음제재 수용법에서 살펴보았듯이 수필문학은 철학적 제재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용이한 문학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영자의 작품들도 한국 전통 수필문학의 죽음제재 수용법에 현대적 사상을 가미하여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환생이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이치이며,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현실적 고뇌를 주기도 하고, 그러나 죽음의 세계는 결국 돌아가야 할 원향이므로 때로 곱게 스스로 선택하는 본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박영자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죽음을 통하여 삶의 완성되는 삶에 대한 기대이다. 곧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된 두 사건에서 삶은 죽음으로 통하며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변증법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박영자의 이 작품에서 언어적 형상화 방법도 살펴보면 작가가 인식한 죽음이 인상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까닭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