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군서면 성티산성 (성치산성)답사
▣ 위 치 : 군서면 은행리 상은부락 서쪽 말등산 정상(해발 342m)
▣ 형 태 : 포곡형 석축산성
▣ 규모 : 둘레 약 400m,높이 낮은 곳은 1.8m, 남아 있는 곳은 6~8m, 너비 4m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답사일 : 2017년 6월 18일
군서면 은행리 상은리부락 서쪽 삼백간 고성산정에 있음. 석축의 산성으로서 둘레가 삼백오십간. 일부 자연암석을 이용함. 대부분 붕괴되었음.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옥천 은행리성지. 옥천군 군서면 은행리 상은부락의 서쪽 해발 350m 고성산정 하부에 있는 것으로 높이는 1.8m~5.4m 이며 성은 동쪽을 향하여 총연장 300m 중 대부분이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삼국시대 토기편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문화유적총람]
옥천 삼양삼거리-월전리-동평리-마전-금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산의 형세가 말의 등과 같다하여 말등산 말동산 이라 부르는 산 정상에 있다. 동으로 금산리 일대 평야가 보이고... 서로는 사양리성지 계현성이 있고 북으로는 매봉산보루가 있어 계현성이 있는 닭재를 넘어 대전 남부를 거쳐 사정동산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산성임이 분명하다.
은행리와 사양리 사이 속칭 성티산, 성재산이라 부르는 산봉우리에 있으며 둘레 약 400m 의 테뫼형 석성이다. 남으로 작은 계곡을 봉우리 위에서 약 30m 아래로 내려가 성벽을 두르고 북쪽은 거의 산봉우리 위에 석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질의 백제토기 조각이 발견되어 대전 동남부의 여러 성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삼정리산성, 갈현성, 능성 등과 비슷하며 출토 유물도 동일하다. [한국의 성곽과 봉수]
[답사기]
옥천의 산성을 대략 돌아보았는데 막상 성티산성을 답사하지 못해 늘 숙제처럼 머리에 담고 다녔다. 찾아가지 못하고 미루기만 한 이유는 간단하다. 옥천군 군서면 은행리와 상지리 사이에 있는 말등산 정상 부분에 있는데 선답자들의 답사 소감이 산은 낮지만 길이 없어 어렵다는 것이다. 길눈이 어두운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찾아 갔다.
이 성은 말등산과 성재산 사이에 포곡식으로 쌓은 성이다. 서쪽으로 성치산이란 산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대부분 성치산성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면 대전시 동구 찬샘 마을에 있는 성치산성과 혼동될 것 같다. 그래서 성티산성, 혹은 옥천 성치산성으로 부르겠다.
어제 아내와 문장대를 다녀와서 조금 피로하기는 했지만 떠나기로 맘먹었으니 떠나야 한다. 6월 날씨 답지 않게 30도를 넘는다. 물을 두 병 넣고, 빵을 큰 것을 하나 샀다. 메모리칩, 카메라 배터리, 핸드폰 배터리를 챙겼다. 오늘은 칼과 라이터도 챙겼다. 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어날 만한 일은 멧돼지를 만나거나 무너지는 성석에 어딘가를 다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이다. 산에서 다쳤을 때 아무도 옆에 없는데 의식을 잃어버리면 어이없이 끝나는 것이다. 옥천지역 마지막 답사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서청주 나들목으로 들어갔다. 고속도로는 훤하기 뚫린다. 옥천 나들목으로 나가 군서면으로 달렸다. 손자 규연이 연재 외가 마을인 아름다운 동평리를 지나 상지리에 차를 댔다. 상지리 마을 유래비 앞 정자나무 아래 점잖게 주차했다. 덥다. 지도를 보면서 마을 앞 개울을 건너는데 다리 아래서 어떤 50대 초반 여인이 다슬기를 줍고 있다. 성티산성을 어디로 가냐니까 모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산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 역시 모른다. 여성들은 더 모를 것이다. 이곳이 태어난 곳이 아닐 수도 있고 산에 오를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은행리 쪽으로 걸어가다 산성이 있는 산기슭을 아무리 살펴도 들머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수렛길이 보인다. 따라 올라갔다. 그런데 묘소에 입석공사를 하느라 경운기가 올라온 길이었다. 산소를 지나치자 길은 없어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올려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올려치기에는 너무 멀다. 2km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깎아지는 듯한 오르막길이라 더 걸릴 것이다. 그래도 올려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다행히 나무는 리기다송과 굴참나무였다. 리기다송 아래는 잡초가 다 죽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청미래덩굴도 흔하지 않다. 산초나무도 별로 없다. 돼지 흔적도 없다.
땀이 엄청 난다. 가뭄에 바짝 마른 활엽수 낙엽에서 나오는 먼지 때문에 기침이 자꾸난다. 생각해 보면 기침도 참 좋은 효과를 낸다. 마을까지 내려오는 돼지도 사람의 기침 소리나 쇳소리를 들으면 제가 먼저 피할 것이 아닌가. 낙엽 위에 돼지 주둥이 자국이 너저분하다. 나무를 붙잡고 돌을 잡아당기면서 첫 날망에 오르니 길이 보인다. 길찾았으니 이제 성벽만 찾으면 된다. 길은 은행리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와 여기서 나를 만난 것이다. 능선길은 사람은 없어도 걷기 좋았다. 산성에 가면 바지가랑이를 감고 늘어지는 청미래덩굴, 가시 많은 산초나무가 제일 먼저 마중나오는데 여기는 섭섭할 정도로 나오지 않는다.
날망을 하나 지나 조금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고갯길이 보였다. 아마도 은행리와 상지리의 연결 고갯길인 것 같다. 아니면 명경저수지에서 성으로 올라오는 길인가 보다. 사람이 다니던 길에 요즘은 야산의 제왕이 된 멧돼지들이 다닌다. 멧돼지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은 옛 이야기이다. 마을로 내려오거나 도시의 거리로 내려온 돼지들이 사람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다시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른다. 산행 초입부터 짖어대던 까마귀는 아직도 짖어댄다. 어디서 낙엽 밟는 소리가 난다. 사람인가? 그 때 기침이 나왔다. 망설이다가 일부러 큰 소리로 기침을 했다. 온갖 두려움이 기침을 통해서 밖으로 튀어 나가는 기분이다. 내친김에 옛날 아버지가 새벽기침 하시듯이 가슴에 온갖 탐욕과 두려움을 응어리로 만들어 크게 토해 버렸다. 가슴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김수영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탐진치를 다 내품어버리니 사방이 고요하다. 산에서 고요는 또 다시 두려움을 부른다. 호루라기를 불었다. 조용해졌다. 이렇게 고요하고 소름끼치는 것으로 봐서 성이 바로 이 부근이다. 다 온 것이다. 숲이 우거져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내 육감은 맞는다. 그런데 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까마귀가 짖어댄다. 악을 쓰며 짖어댄다. 나를 보고 짖는 것일까? 가지 말라고 짖는 것일까? 이 성도 사람이 참 많이 죽은 모양이다. 까마귀들 눈에는 그들의 귀신이 다 보이는지 "까왁까왁" 악을 쓰며 짖어댄다. 영물에게는 영혼도 보이고 산신도 보이는게 아닐까. 앞산이 바로 말등산이 바로 저기 정상인가본데 보이지 않는다.
이쯤에서 카톡 가족사랑방에 인사 글을 올렸다. 성에 간다. 여기는 옥천군 군서면 상시리와 은행리 사이의 성티산성이다. 나는 여기를 찾아가는데 덥다. 뭐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얘기이다. 아무래도 행선지를 가족드에게 보내놓는 게 좋을 듯하다. 일요일에 근무하는 딸이 금방 답이 온다. "날도 더운데 조심하셔요" 곧이어 바로 이곳이 고향인 며느리가 답을 보냈다. "조심하세요." 가족들과 연결이 되었다. 참 세월 좋다. SNS의 가느다란 줄이 나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그건 가느다란 줄이 아니라 굵고 질긴 동아줄이다.
그러고서 몇 걸음 올라갔는데 활엽수 사이에서 성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와 여기다. 찾았다. 아마도 남문지인 것 같았다. 무너진 돌더미를 누군가 다시 쌓아 올린 것 같았다. 성벽 아래는 옛날 그대로 견고한데 윗부분에 돌을 덧얹졌다. 과거 예비군 초소처럼 말이다. 견고하게 남은 부분을 보니 돌의 크기가 상당하다. 작은 것은 가로 38cm,세로 25cm 정도 되고 큰 것은 가로 70cm 정도 되면서 정사각형인 것도 있다. 돌은 다듬어 썼는데 단단한 연한 활석으로 보였다. 스틱 끝으로 돌에 그어보니 줄이 거진다. 이런 돌이 어떻게 천년을 버티었을까?
주변을 둘러 보았다. 모두 흙에 묻혔다.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돌았다. 언듯 보면 성벽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땅 속으로 들어갔다. 심하게 비탈져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진다. 나무 등걸을 잡고 겨우 균형을 유지한다. 동벽에서 북벽으로 돌아서는 부근에 은행리에서 올라오는 오솔길이 보였다. 내려갈 때는 저 길로 내려가자. 쓸데없이 성치산으로는 가지 말자. 아무리 궁금해도 성치산에는 가지 말자.
북벽은 성곽의 윤곽이 뚜렷하다. 나무와 흙에 묻힌 성벽에서 성석이 삐죽삐죽 나왔다. 이곳은 지표조사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험하지만 성벽 아래로 내려가서 성벽을 짚으면서 돌아 보았다. 날이 가물어 뱀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맘을 놓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흙을 걷어내기 전에는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성벽 위로 올라왔다.
나무들 사이로 기름진 옥천 땅이 보인다. 은행리 금산리 쪽은 비닐하우스가 꽉 들어찬 너른 들판이 보였다. 내가 지나온 옥천 삼양리 삼거리에서 성왕사절지가 있는 월전리 동평리 그리고 주차한 마을인 상지리에서 마전 추부 금산으로 이어지는 성왕로가 한 눈에 들어 올 듯하다. 관산성이라 알려진 삼성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이 있는 산줄기와 대전 남부의 식장산에서 뻗어내려온 옥천 북부 산줄기가 마주 보고 있다. 마주본 두 산성의 띠는 때로 함께 성왕로를 지키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 서로 응시하며 대적할 때도 있었으리라.
관산성 전투의 주무대가 마성산 줄기에 있는 네개의 산성과 옥천 동북부의 환산성이었다면 성티산성은 전투의 배후가 되는 산성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성은 둘레가 400m에 못미치는 작은 포곡 산성이지만 성의 위치가 매우 높고 성왕로 쪽으로 튀어 나와 대전 동남부의 삼정리 산성, 갈현성, 능성의 산성이 이어진 줄기를 하나의 성으로 친다면 성티산성은 남쪽으로 툭 튀어나와서 마치 치성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중요한 요새였을 것이다.
정상에서 도로 남문 쪽으로 내려왔다. 선답자들의 답사기에서 본 수구가 있는 성벽을 찾기 위해서이다. 남문지에서 서쪽 성벽으로 돌아가다가 보니까 골짜기에 널직한 공터가 나왔다. 정상에서 성벽이 동남쪽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고 서남쪽 산줄기를 타고 내려갔는데 그 사이 골짜기 삼태기 모양의 내부 부분에 건물이 있었나 보다. 건물지라 생각된다. 이곳에 저수할 수 있는 시설이나 우물이 있었을 것이다. 남문지에서 서쪽 성벽으로 약간 안으로 구부러들면서 구릉에 있는 성벽이 그대로 남았다. 무너진 성벽의 돌무더기를 밟고 허겁지겁 살아남아 있는 성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돌이 움직여서 다리를 다칠 뻔 하기도 했다. 지팡이가 돌 사이로 들어가 넘어질 뻔 했다. 조심해야 한다. 돌 사이 낙엽 속에서 살모사가 기어나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일을 당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방송에도 나올까? "충북수필회장을 지낸 충북의 수필가 이방주가 산성답사를 하다가 살모사에게 물려 그자리에서-----" 생각만 해도 챙피하다. 법무장관 후보자가 짝사랑하는 여인을 도장을 파서 몰래 혼인신고를 한 이야기보다 더 챙피하다. 성에 기어오르다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뱀에게 물리다니 개망신이다. 그러니 조심하자. 서두를 일이 아니다. 찾은 성이 도망갈 일도 없고 1500년 버틴 성곽이 금방 무너질 리도 없지 않은가?
성벽은 22단 정도가 그대로 고스란이 남아 있다. 성석의 세로는 대충 45cm 정도 되었다. 남은 성벽의 높이는 거의 8m~9.5m 정도 되는 것이다. 돌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일정하지 않은 돌을 정교하게 쌓았다. 여기에 놀랄만한 것은 수구가 원형대로 남았다는 것이다. 먼 데서 보면 두 개의 수구가 뚜렷하게 보인다. 성벽을 기어 올라가 수구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수구의 깊이는 70cm정도 되는 정방형이다. 성돌이 가로로 5개 정도 되어 보이고 세로는 세로쌓기를 하였다. 깊이가 꽤 깊어서 4m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아마도 성의 내부에 저수시설과 통해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로 계곡으로 물이 떨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기막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이 수구가 암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수구의 크기가 커서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보니 성은 밖은 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리고 안은 흙으로 메운 외축내탁법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석이 약간 붉은 빛과 황색을 띠는 활석이었다. 성석을 다듬기는 화강암보다 쉬웠을 것이다. 성의 너비가 4m나 되어 작지만 상당히 견고한 성이다. 성의 모습도 정상부에서 산줄기를 따라 포곡식으로 쌓고 그 성벽을 가운데을 이어서 필요에 따라 포곡식과 테메식 산성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남문지로 올라와 은행리 쪽으로 하산하였다. 올라오는 길에 많지 않던 멧돼지 흔적이 엄청나게 많다. 내려오는 길을 따라서 방금 지나가며 주둥이로 낙엽을 헤집어 놓은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방금 지나간 자리이다. 아직 도토리가 남아 있나. 점심 거리를 찾으려고 그랫을 것이다. 나는 그 녀석들이 두렵고 그 녀석들은 내가 저들의 삶의 영역을 침범한 훼방꾼으로 볼 것이다. 그놈들은 성을 쌓을 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성을 쌓아 적을 방어한다. 까마귀 울부짖음은 언제 그쳤는지 모른다. 온 산이 고요하다. 아랫마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염불소리 때문에 까마귀가 짖기를 그쳤는지도 모른다. 사찰이 있었다. 고찰은 아니었다.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을 막아 울타리를 쳤다.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멧돼지나 고라니의 훼방을 가로막기 위해 개바자를 쳤다. 현대판 성이다. 이제 사람들과 자연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사람이 이기면 자연이 무너지고 자연이 이기면 인간이 멸종되겠지. 결국 다 망하는 것이다. 공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뭄은 온 들판을 말려 버렸다. 수로에도 물이 말랐다. 논에는 물이 괴어 있으나 밭에서는 단내가 난다. 상지리 마을 유래비까지 오는데 온몸에 불이 붙는 것처럼 뜨겁다. SNS 가족사랑방에 하산 끝을 보고 했다.
상지리 마을 유래비
길이 없는 산비탈를 기어 롤라갔다
성티산성 안내판
남문지로 보이는 곳 남은 성벽
동벽 무너진 모습
흙에 묻힌 동벽
서벽 수구터 부근의 성벽
수구부근의 성벽
수구와 성벽이 고스란이 남아 있는 성벽
수구와 성벽
수구
수구
수구를 넘어 이어지는 성벽
은행리 금산리 부근의 들판
간신히 촬영한 동영상
상지리 마을 유래비 앞에서 물을 마시고 준비해 간 빵으로 점심을 먹었다. 내가 앉아 있으니 마을 노인들이 다가와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사람은 63세라 했고 한 분은 7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63세인 사람은 성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다 하고 70대는 나무하러 가서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멀리까지 나무를 하러 갔었냐고 하니까 그랬다고 한다. 수구가 있는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고 옛날에 전쟁할 때는 그 성벽을 기어 올라가고 위에서 돌을 던지고 했다는 것까지 상상해서 설명했다. 다만 수구를 굴이라고 표현해서 내가 수구라 하니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안으로 사람이 드나든 곳이다'면서 큰 소리를 했다.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가뭄 이야기를 했다. 아무려면 그 분들 만큼 가뭄이 걱정되겠는가.
옥천을 거쳐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를 되짚어 돌아왔다.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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