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할미가 쌓은 노고산성老姑山城
노고산성은 지나갈 때마다 ‘저 산을 한 번 가야지’ 하고 생각만 했는데 오늘은 카메라만 들고 출발했다. 대학 평생교육원 강의를 끝내고 최근에 세종시에 편입된 부강으로 차를 돌렸다. 부강 약수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산에 붙었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청원군이 정비해서 세종시에 헌납한 셈이라 생각하니 좀 아깝기는 하다.
입구에 고구려산성 탐방이라고 적혀 있어서 의문이 일었다. 정말 고구려 산성으로 고증된 것일까. 고증했다면 역사를 통해서인지, 축성방식을 통해선지 궁금하다. 대개 고구려의 남쪽 영역은 중원 고구려비까지만 인정한다. 고구려 최남단 산성은 중원고구려비 근방의 장미산성이라고 본다. 전형적인 고구려의 축성법을 따른 장미산성은 신라나 백제 산성과 많이 다르고 오히려 중국의 동북삼성에서 발견되는 산성과 상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미산성의 가장 큰 특징은 겉 쌓기와 속 쌓기 방법으로 축성했다는 점이다. 겉 쌓기는 돌을 삼각형이나 사다리꼴 마름모꼴로 다듬어 이른바 견치석으로 맞물리게 하여 견고할 뿐 아니라 혹시 겉벽이 무너지더라도 속벽은 남아 있도록 했다. 노고산성이 고구려산성이려면 장미산성과 축성방법에서 동일해야 한다.
노고산성의 인근에 있는 남성골 산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5세기 후반의 고구려성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축성법을 따랐다 하니 고구려산성이라 할만하다. 이를 근거로 고구려가 장수왕 때 이곳까지 영역을 넓혔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노고산성, 애기바위성, 화봉산성을 모두 고구려산성길이라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부강면민이 은근히 상대적으로 강대국이었던 고구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고구려 산성을 자꾸 되뇌며 500m쯤 올라갔는데 어떤 남녀가 길가에 자리를 펴고 마주 앉아 있다. 가까이 가도 떨어질 줄 모른다. 남자는 50대 초반, 여자는 30대 후반처럼 보이는데 내가 지나가도 떨어질 줄 모른다. 어떻게 50대의 입술이 30대의 입맛에 맞을까? 혹시 이 사람들이 산성을 짓는데 동원되었던 장정과 그 정인은 아닐까. 나이 많은 고구려 남편과 어린 아내의 만남은 아닐까. 옛 정인들이 1500년 만에 시간을 넘어선 해후라 생각하고 눈이라도 감아 주어야 할까. 보고 싶으면 이렇게 바로 밀회를 즐길 수 있는 이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움을 모를 것이다. 노역에 끌려온 남정네가 젊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흘리던 눈물을 알까. 낭군을 기다리는 어린 아낙의 아픔을 알기나 할까? 이 성을 지키는 노고할미의 노염이 두렵지 않은가? 온갖 상념에 젖었다. 성에 오를 때마다 나는 항상 동원된 민중의 고통을 생각한다. 노역에 동원되어 생업도 가계도 다 엉망이 되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없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한참을 올라가니 노고산성과 화봉산성으로 가는 갈림길에 노고산성과 애기바위성에 대한 안내 돌비가 나왔다. 부용면 주민자치위원회 명의이고 부용면장 이규상이 쓰고 역사학박사 박상일이 감수를 했다고 적었다.
부용면 지역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해발 305m 노고봉(老姑峰)을 둘러싼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196m이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으로 서쪽이 좁고 동쪽이 넓다. 성내의 규모는 동서 방향의 길이가 70m정도이고 남북 방향의 길이가 42m 정도이다. 이 노고산성은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역으로 부용면 지역에 남아 있는 10개의 산성 가운데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성안에서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조각이 다수 발견된다.
역사학자의 감수를 거쳤다는 말은 그 만큼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쉬운 것은 노고산성에서 화봉산성에 이르는 길을 왜 고구려산성길이라고 했는지 언급이 없다. 갈림길 바로 옆에 애기바위성 안내 표지석도 있었다.
노고산성에는 '늙은 시어머니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대전시 동구 직티리의 노고산성이나 보은의 노고산성이나 전국의 많은 노고산 또는 노고산성에는 비슷한 유형의 전설이 전한다. 여성신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옛날 이곳에 힘센 장사 가족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모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들이 산신의 노여움을 사서 힘을 뺏겨 죽고 말았다. 아들과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한 집에서 살다보니 매일 싸우며 언쟁을 벌였다. 이에 산신은 두 사람의 언쟁이 끝이 없으니 내기를 해서 지는 쪽이 집을 나가기로 했다. 내기는 시어머니는 노고산에 성을 쌓고 며느리는 널빤지를 써서 문주산을 허물어 곡식이 많이 나도록 전답을 만들어 평지를 이루도록 하고 기한은 백일로 정했다. 그 결과 산신의 도움을 받은 며느리가 이겼다. 내기에 진 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곳을 떠나 만뢰 땅에 들어가 성을 쌓으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거기서 죽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쌓은 성을 노고성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약한 며느리와 성격 나쁜 시어머니의 '힘겨루기' 전설이다. 시어머니 전설과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이 합해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청주 초정의 구녀성은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이 전하는데 노고산성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힘겨루기 전설이다. 전설의 경우 대개 주인공이 패배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노고산성 전설은 나쁜 시어머니가 패배하여 권선징악이라는 민중의 정신이 부도덕한 시어머니를 응징하는 민중 공동심의로 승화하여 내포되었다. 전설은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면서 지역과 민중의 가치관에 의해 변형 굴절되는 경우도 많아 이런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가파른 길을 마지막으로 올라가니 사방이 탁 트인 성의 내부가 나타난다. 노고산성은 노고산 정상부를 빙 둘러싸면서 타원형으로 쌓은 테메식 산성임이 뚜렷하다. 군사는 한 40명 정도 주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내에서 보니 북쪽으로는 산세가 완만하지만 남쪽으로는 경사가 급해서 지형을 이용한 축성으로 방어에 효과적일 될 것 같았다. 성 전체의 둘레가 〈청원군지>나 <한국의 성곽과 봉수>에 196m라고 기록되었는데 어림짐작으로 봐도 그보다는 훨씬 클 것 같다.
북쪽 경사면에 무너진 성벽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는 봉수대를 쌓은 성돌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돌이 아니고 자연적인 막돌이었다. 처음에는 너덜이 아닌가 했으나, 너덜이 있을 산이 아니니 자연석으로 쌓은 성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돌무더기를 헤집으면서 살피면 기와편이나 토기편이 발견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성내를 돌면서 지팡이로 헤집어 봐도 그런 인공의 파편은 발견되지 않았다. 성벽의 원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장미산성의 축성법과 대조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설상으로 고구려산성이라지만 축성양식이나 역사적으로 신라산성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 위에서는 사방이 다 보인다. 동으로 남이면 척산의 봉무산으로부터 현도에서 부강으로 흐르는 금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북으로는 부강면 소재지 마을과 세종시 아파트촌까지 한눈에 보인다. 노고산성이 군사적 요충지로 대접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멀리 세종시의 첫마을 아파트촌이 하얗게 보인다. 또한 정부청사 부근의 웅장한 건물들이 다 보인다. 이 성을 쌓으면서 여기 행정 수도 역할을 하는 이른바 '행복도시'가 들어서고 행복도시 근방의 금강 상류에 저렇게 아름다운 다리가 들어설 것이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이 성을 쌓으면서 오늘을 예견한 영웅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다시 뽕나무밭이 된다지만 30년 만에 변한 이 고장을 높은 곳에서 훑어보는 마음이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부강면에서 그랬는지 청원군에서 그랬는지 성내를 평평하게 닦고 여러 가지 구조물을 만들어 놓았다. 운동기구를 올려다 시설을 해 놓고, 데크를 설치해서 전망대를 만들어 놓고, 원탁 의자까지 들여 놓았다. 완전히 놀이판 일색이다. 지표조사 후에 이렇게 한 것인지, 그렇더라도 문화재를 이렇게 훼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데도 힘든데 누가 기본 체력 향상 운동을 한다고 아파트나 체육공원에나 있을 법한 운동시설을 해 놓았을까. 또 서있는 몇 개의 안내판에는 주변 산세를 설명하거나 산성과 관련된 역사와 지역의 변화를 알려주는 글은 없었다. 지역 유지들이 하나씩 맡아 글을 써서 세웠다. 문화유적은 역사의 증좌이고 민족의 자존심이다. 무너지고 잡목에 묻혀 산성도 안타까운데 잘못된 개발로 인한 왜곡과 훼손은 재고해야 할 것으로 한다.
▣ 위치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문곡리 (노고봉 정상부 해발 305m)
▣ 성격 : 테메식 석축산성
▣ 규모 : 둘레 196m 높이는 측정할 수 없음
▣ 답사일 : 2014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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