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부처님 오신 날 사찰 순례
-보살사 연화사 비암사 고산사-
1. 보살사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
▣ 청주 보살사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낙가산로 168 (용암동)
·개요
청주시 남동쪽의 낙가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보살사는 청주시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567년(위덕왕 14)에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이 창건하였다. 778년(혜공왕 14)에 진표의 제자 융종이 중창했고, 918년(태조 1)에 고려 태조의 5번째 아들이자 당대의 고승이었던 증통이 3번째 중창을 했으며, 1107년(예종 2)에 자정이 다시 중창했다. 1458년(세조 4)에는 세조의 명으로 중수했으며, 1626년(인조 4)에 벽암 각성(覺性)의 제자 경특이 중수하고, 1683년(숙종 9)에 일륜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보살사의 유물과 의의
보살사에는 청주 보살사 극락보전(충북유형문화재 56)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수각, 요사 및 부속 건물이 있다. 극락보전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선조 때에 중수되었으며, 내부에는 청주 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충북유형문화재 24)과 지장보살상, 삼존불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밖에 오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65)과 중수비, 석탑옥개석, 동종 등이 있으며, 오층석탑은 1703년(숙종 29)에 건립된 것으로 조선 중기의 석탑 양식을 고증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보살사 극락보전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56호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건물로 기단은 2단의 석단(石壇)에서 현재 단정한 막돌 바른층 쌓기의 3단 석단으로 정돈되었으며, 기단 위 초석은 보살사 창건 당시에 사용된 원형 초석에 원주(圓住)를 올렸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굵고 높은 편이며, 두공(枓?)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조선중기 건축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준다. 창호는 측면의 협칸 없이 정면 3칸이 개방된 정자형(丁字形) 분합문(分閤問)이 달려 있으며, 처마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범자문(梵字文)과 기년명(紀年銘)이 장엄되어 있다.
▣ 청주보살사 오층석탑
시대 : 조선 1703년(숙종 29)
문화재 지정 :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65호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요약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보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석탑
내용 : 높이 3m.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5호. 이 탑은 극락보전 앞에 서 있는데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과 상륜(相輪)을 받고 있다.
지대석(地臺石)은 1주석(柱石)으로 그 위에 면석(面石)이 아닌 3단으로 된 기단 굄을 조성하였는데, 3단의 기단 굄은 차례로 체감되었고, 그위에 상대갑석(上臺甲石)을 받고 있다. 상대갑석은 1석으로 조성되어 8판복엽(八瓣複葉)의 복련(覆蓮)이 각출(刻出)되었으며 그 상면에 탑신 굄이 1단 조출(彫出)되었다. 초층옥신(初層屋身)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새겼으며, 그 가운데 사각형과 내원(內圓)을 음각하고 범자(梵字)를 음각하였다. 초층 옥개석(屋蓋石)은 1석으로 2단의 층급받침이 표현되었으며,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없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2층옥신도 초층옥신과 같은 수법을 따랐는데, 한 면에 ‘康熙癸未(강희계미)’라는 명문이 있어 1703년(숙종 29)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3·4·5층 옥신과 옥개석도 모두 1석으로 그 표현수법은 1층과 같다. 상륜은 노반(露盤)이 생략된 채 복발(覆鉢)과 보륜(寶輪)·연봉이 남아 있다
▣ 청주보살사 영산회 괘불탱
청주 보살사 영산회 괘불탱(淸州 菩薩寺 靈山會 掛佛幀)은 충청북도 청주시, 보살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탱화이다. 1997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58호로 지정되었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화를 말하며, 영산회상도는 그 중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보살사 영산회괘불탱은 길이 6.13m, 폭 4.26m로 삼베 위에 그린 것이며,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녹색·황색 등 중간색을 넣어 밝은 화면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글을 통해 조선 인조 27년(1649)에 경기도·충청도 등지에서 활약했던 신겸, 덕희, 경윤 등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석가모니 본존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니며 당당한 신체에서는 중후한 모습을 풍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손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하단의 8대보살, 중단의 10대제자 등은 석가불 주변을 빽빽하게 에워싸며 좌우대칭의 구도를 보이고 있다. 본존불의 얼굴이 또렷하고 신체가 당당하여 화면을 압도하는 듯하며, 선명한 색채·화려한 문양·석가를 둘러싼 무리들의 세밀하고 단아한 묘사로 당대 불화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청주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좌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
1970년 사월초파일 행사 중 보살사 경내에서 발굴된 병립불상(竝立佛像)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일광이불상(一光二佛像)이다. 병립상은 대좌와 광배는 물론 두 불상이 한 돌에 나란히 부조(浮彫)된 모습으로, 동일한 조각수법에 동자(童子)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에 넓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젖살이 가시지 않은 도톰한 얼굴에는 천진스런 미소가 가득하다. 코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양 귀는 정제된 모습으로 어깨까지 흘러내려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여 고불(古佛)의 모습이 남아 있다. 신체는 3등신으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굴곡의 모습을 가지나 탄력과 힘이 없는 단아한 자태가 돋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신체에 비해 굵게 표현되었으며, 양발은 가지런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수인은 두 상이 대칭적인 모습으로 우상(右像)은 왼손으로 시무외인을 취하고 오른손은 쌍구형의 보주를 받들고 있으며, 좌상(左像)은 오른손을 시무외인하고 왼손은 복대의 띠 주름을 쥐고 있다. 3등신 동자의 애리한 신체에 천진한 미소와 상호의 표현에서 순진무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단아한 묘사와 고부조의 세련된 기법에서 고불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가불(釋迦佛)과 다보불(多寶佛)의 병존불좌상(竝尊佛坐像)과도 연관성이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한국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kbs 아침마당에서 마가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법문을 들으며 하나씩 나를 반성하고 오늘은 내가 다니는 보살사 말고도 사찰 세 군데를 순례하리라 마음 먹었다. 법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카메라를 챙겨가지고 일어섰다. 마가스님의 법문은 이랬다. '그래도'라는 화두를 가지고 살자. 말하자면 어떤 부정적인 현실에 처할 때 '그래도 ~ 는 있지 않는가' 이렇게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그래도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 그래도 우리 보살사에는 원각스님이 지키고 있지 않은가? 신도들이 존경하는 종산스님께서 병환에 계시자 상좌인 원각 스님이 와서 대신 지키고 계시다.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되지만 '그래도~'라 생각하기로 했다.
차를 몰고 보살사로 가면서 우선 법요식이 끝나는 대로 순례할 사찰을 정했다. 그렇다. 세종시 연화사-비암사-고산사를 순례하는 것이다. 이유는 비암사와 고산사는 백제 부흥군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사찰이고 연화사에는 불비석 진품 2점이 있고, 비암사에서 3점이 발견되었고, 고산사에는 백제 역대 국왕의 왕생극락을 비는 백제극락보전이 있다.
보살사에는 아직 신도들이 많이 모이지는 않았다. 경찰관의 안내에 따라 종산스님께서 환중에 계신 큰법당 앞에 주차하고 극락보전으로 올라갔다. 차는 없어도 신도들이 많다. 연등을 아름답게 달았고 그늘막을 쳐놓았고 이벤트회사에서 방송시스템을 설치하고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면서 원각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합장으로 인사했다. 상호가 인자하다. 웃는 얼굴이다. 밖으로 나왔다. 연등 접수를 맡은 아내에게 가서 눈인사를 했다. 절은 많이 깨끗해졌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법당 주변에 잡초도 없다. 스님들이 부지런히 수행하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은 조선 숙종 때의 건물이다. 밖에서 법당을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낙가산 정상에서 용암동 쪽으로 흘러내린 산 줄기와 바로 너머 김수녕양궁장 쪽 용정동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마치 연꽃 봉오리 모습이다. 꽃봉오리의 꽃잎들이 극락보전을 감싸안고 있다. 그 아늑한 곳에 아미타부처님의 연좌가 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그 중에서도 부처님오신날 즈음해서 녹음이 시작될 무렵 더 아름답다. 게다가 법당 앞에 아름들이 느티나무 수십 그루가 버티고 서서 법당을 지킨다. 느티나무들은 각기 동방지국천왕이 되고, 서방광목천왕이 되고, 남방증장천왕, 북방 비사문천왕이 되어 정작 사천왕 대신 부처님을 호위하고 있다.
극락보전의 기둥은 모두 배흘림기둥이다. 이 기둥은 부석사 무량수전만큼 아름답다. 무량수전에 가야 덤벙주추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덤벙주추와 배흘림기둥을 볼 수 있다. 법당 안에 석조이존여래병립상이 있다. 어찌보면 투박하고 어찌 보면 귀여운 부처님이다. 극락보전의 또 하나 아름다운 것은 바로 현판이다. 그 힘찬 글씨를 보면 전각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극락보전과 오층석탑이 잘 어울려 법당은 그런대로 천년고찰의 위용을 갖추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법당 외벽에 심우도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심우도를 시주한다면 보살사 극락보전은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을 것이다. 법당 안에 있는 괘불탱 또한 아름답다.
10시에 법요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의식에 참여했다. 스님께서 올해는 어떤 민망한 법문을 하시려나 했는데 갑자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염불하듯이 한 번 읊더니 죽음에 관한 법문을 했다. 석가모니부처님 탄생한 날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결국 탄생은 죽음으로 가는 길의 출발이니 뭐 이상할 것도 없다. 크게 기억에 남는 법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마음을 울리기는 했다.
보살사 점심공양의 특징은 법요식에 참여한 사람은 많지 않아도 공양에 참여하는 중생의 줄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줄을 섰다가 아무래도 시간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아내에게 부탁해서 사무실에 가서 '새치기' 공양을 했다. 밥의 양이 많아 걱정스러운데 어느 노보살께서 떡을 자꾸 권해서 과식을 했다. 그리고는 바로 차를 몰아 조치원 연화사로 향했다.
보살사 극라보전
보살사 극락보전
보살사 극락보전과 5층석탑
법요식에 참여하려고 모여드는 신도들
아기부처님
명부전, 삼성각
2. 세종시 연서면 연화사 연등
▣ 위치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연화사길 28-1
▣ 대한불교 태고종 사찰
▣ 보물 2점 : 보물 제 650호 연화사칠존불비상, 보물 649호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
세종시 연화사는 운주스님께 내가 진 빚이 있다. 언젠가 이 절에 소장되어 있는 무인명불비상과 칠존불비상을 친견하려고 찾아 갔었다. 법당에 아무도 없었다. 비로자나부처님 옆에 모셔져 있는 이 진품 보물을 사진 찍으려다가 찍지 못했다. 양심상 찍을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운주'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운주산의 운주와 동일해서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스님께서 내오신 커피를 마시며 거의 두 시간을 불비상에 얽힌 이야기, 연화사 연기설화, 백제 부흥운동과 오늘날 정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정말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백제부흥운동에 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 나눈 이야기는 이 블로그에 소개되어 있어 생략한다. 비암사에서 발견된 불비상은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이 작은 사찰에서 그토록 소중한 보물을 보관하고 있는게 의아하여 물어 보았다. "불비상은 제게는 부처님입니다. 박물관에 가는 순간 예술품이 됩니다." 그 말씀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불비상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간신히 허락받았다. 그래서 사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후 <연화사는 도리원에 있었네>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오늘 불비상에 참배하고 그간의 빚을 갚으리라. 비로전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파일인데 등도 별로 없다. 마당에 몇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넉넉하게 불전을 넣고 삼배를 드렸다. 삼배가 이렇게 송구한 날도 없었다. 그간 이 불비상의 부처님께 받은 감응이 얼마인가? 한동안 우러러 보면서 이 부처님을 치마폭에 싸서 모시고 숨어다니면서 기도했을 백제 유민들의 아픔과 절절한 불심을 생각했다.
스님 방에 가니 신도들 몇 명이 아직 남아 있다. 스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 보살이 내게 떡과 과일 그리고 커피를 내왔다. 일단 연등 접수를 했다. 등을 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가난한 스님께서 공연히 감사해 했다. 마가스님은 등을 다는 이유를 자신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밝히는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등을 달면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성정을 때가 묻지 않는 연꽃처럼 밝히는 것이다. 촛불을 켜는 이유는 그 순간 가장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5만원이 무슨 대수랴. 스님은 아주 인자한 모습이 변하지 않았다. 오늘은 좀 더 밝아 보인다. 몇몇의 신도라도 있어서 그런가 보다. 중은 신도가 있어야 행복하다. 나는 우리 수필창작교실에 수강생이 늘어나야 행복해질 것이다. 2학기에는 좀 늘어날려나. 이제 막 배꽃도 떨어지고 복숭아꽃도 떨어지고 파란 열매가 처녀 아이들 젖꼭지 불어나듯 불어나기 시작한다. 복숭아 과수원길에 아낙네가 작은 열매들을 솎아내고 있었다. 열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크기도 전에 솎아 내는가? 나는 상관없이 비암사로 향한다.
연화사 비로전
3. 운주산 비암사
▣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비암사길 137(다방리 4)
▣ 요약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비암사길(다방리) 운주산(雲住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6교구 마곡사 말사
▣ 역사 :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통일신라 초기인 673년에 백제의 유민인 혜명법사가 전씨 등의 도움을 받아 창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는 1960년 경내 삼층석탑 위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 제60호)에 쓰여진 '계유명 혜명대사'라는 명문에 근거한 것인데, 이 석불비상에는 백제왕과 대신, 그리고 칠세 부모의 영혼을 빌어주기 위하여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어 시납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 문화재
국보 106호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石像) 국립청주박물관소장
보물 367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보물 368호 미륵보살반가석상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극락보전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호
삼층석탑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3호
전의 비암사 영산회괘불탱화 -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2호
전의 비암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3호
비암사는 전에도 자주 왔지만 지난 4월 15일 다녀 갔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다. 그런데 4월 15일 백제영산재재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은가 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서 승용차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갔다. 봉축 법요식은 이미 끝나고 점심공양도 다 끝났는지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절집 바로 밑에 주차장까지 아스콘 포장길을 걸으면서 여러 대의 차를 피해 주어야 했다. 느티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모여 있다. 염주를 파는 장사들은 아직 돌아가지 않았고 사람들이 물건을 보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하는 화두가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우린 어차피 아니 온 듯 다녀 가야 할 사바세계의 중생이다.
바로 극락보전으로 올라갔다. 삼배를 올렸다. 삼배를 올리고 백제 역대제왕 7대부모 영가에도 합장배례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니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가지 않을 수 없다. 대웅전에 삼배를 올리고 아기부처님께도 합장 배례했다. 마당에 연등이 아름답다. 연등과 많은 사람들의 형형색색이 보기 좋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입은 옷의 색깔처럼 다른 생각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나고 죽고 살아 있는 동안 병들고 번민한다는 것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비암사는 백제부흥군이 패망한 663년 이후에도 유민들이 계속 쫓겨다니면서 저항하다가 673년 경에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이 부근의 천안전씨를 비롯한 백제 유민의 여망이 담긴 사찰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만 오면 경건해진다. 나의 백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결국 운주산성이나 비암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운주산 고산사 정대스님으로부터 의자왕과 도침대사, 복신,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에 연화사 운주스님에게 불비상에 대한 피눈물 나는 백제의 설움을 들었다. 그런 중심에 있는 사찰이 바로 비암사이다.
연등 접수하는 곳에 가서 여보살님들의 안내를 받아 등을 달았다. 아이들 이름을 다 적었다. 무슨 발원이 있으면 적으라고 한다. 그래서 올해 나올 산성산사 답사기가 의미 있는 책이 되도록 발원하려 했으나 모두 허망한 일로 생각되었다. 책이란 나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나오는 책은 나의 흔적을 남기기보다 백제의 역사를 답사하면서 발과 손에 묻혀온 흙이나 먼지를 한 줌이라도 더 적어 넣기로 했다. 나는 '아니 오신 듯 다녀 갈' 사람이다. 그래야 한다. 세상에 남길 흔적을 욕심내서는 안된다. 나를 더 나만 못하게 남길 것도 아니지만 나를 나보다 더 크게 하려고 애쓰는 것도 소용 없는 일이다. 나는 그냥 나인 것이다. 연꽃은 아무리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도 꽃에 진흙을 묻히지 않는다. 다만 연꽃 본래의 색깔과 아름다움만 가지고 피어난다.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 말이다. 홍련은 홍련으로 백련은 백련으로 핀다. 황련이 우아하다고 홍련이 황련을 닮으려하면 본질을 속이는 것이다. 연등에 불을 켜는 것은 바로 있는 그대로 본디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등을 달고 서둘러 고산사로 행한다. 그러고보니 비암사에서는 차 한잔도 못 얻어 마셨다. 대신 비암사의 맑은 공기과 연기지역 백제 유민의 날숨을 실컷 마셨다.
비암사 아니오신듯 다녀가소서
비암사 올라가는 길
비암사 느티나무
극락보전과 삼층석탑
극락보전
대웅전과 아기부처님
연등
4. 운주산 고산사 백제극락보전 참배
위치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6-1
백제를 생각하는 절 고산사 (2003년 07월 24일 동아일보) 황규호 한국문화재신문 편집국장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고색창연한 옛 절도 아니고, 명성을 크게 떨칠만큼 위세당당한 가람(伽藍)은 더욱 아니다. 1966년에 지었으니까 역사 또한 일천하다. 그런데 남다른 창건 사연을 간직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비명에 숨진 백제 부흥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 작은 절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운주산(雲住山) 중턱에 자리했다. 운주산 자락에다 절터를 잡은 까닭은 백제 부흥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주류성(周留城)이 연기군 지역 어딜 것이라는 믿음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운주산 정상부에는 백제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테메식 고대 산성이 있다. 바로 구름도 머물다 간다는 운주산성(雲住山城)이다. 산성에 올라서면, 일대 연기군 지역은 물론 천안과 청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역사 기록에 나오는 주류성이 여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운주산 언저리 계곡을 ‘피숫골’이라 하고, 운주산에 ‘삼천굴’이 있다는 전설은 백제 부흥군 최후의 항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얼마쯤은 역사의 요소를 바탕에 깔았다는 신화를 상기하면, 전설에도 역사가 스미게 마련이다. 백제 부흥군 부대가 ‘삼천굴’에 가까스로 피했다가 나당연합군에 들켜 몰살당하는 바람에 골짜기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는 ‘피숫골과 삼천굴 전설’은 논픽션의 사실(史實)과 맞물릴 가능성도 있다.
그런저런 역사를 좇아 운주산 자락에 절을 지은 고산사 창건주는 운주문화연구원 최병식 원장이다. 백제 역사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연구소까지 차린 그는 늦깎이 고고학자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의 꿈을 접고, 한양대 대학원에서 고고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운주산에 절을 짓기 이전인 1996년부터 백제 부흥군 천도재를 겸한 ‘백제 고산제(高山祭)’를 해마다 올렸다. 백제 고산제는 올해로 10회째를 맞는다. ‘은산별신굿’과 ‘범패’ 연희자를 초청했고, 서울대 최몽룡 교수(고고학) 등 여러 고고학자와 사학자들이 고산제 현장에 내려와 학술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고산제는 ‘여지도서(與地圖書)’와 ‘충청읍지(忠淸邑誌)’ 등에 나오는 운주산의 옛 이름 고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고산사라는 절 이름도 마찬가지다. 최 원장의 백제사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집념은 지난해 운주산 곳곳을 시추하는 시추 작업으로 이어졌다. ‘삼천굴’ 흔적을 아직 찾지는 못했으나, 미련은 버리지 않고 있다. ‘백제국의자대왕위혼비(百濟國義慈大王慰魂碑)’를 절 앞에 세운 그는 고산제 같은 큰 행사와 학술조사 비용 모두를 사재로 충당했다.
그는 올해 가을 고산제 때 회향(回向)할 여법(如法)한 극락전을 짓고 있다. 고산사에 모셔온 스님 한 분과 함께 건사하기 어려운 절집 살림을 직접 챙기면서 낡은 가건물 극락전을 헐고 절집 전통양식의 새 건물 건립에 착수한 것이다. 26일 상량법회를 여는 고산사 아래 피숫골 계곡물이 장마로 불어나 포말을 튕기건만, 전날의 산사는 여전히 적막했다.
비암사에서 대전 카톨릭대학교 앞을 지났다. 대전카톨릭대학교 뒷산에 李城, 鵲城, 金伊城과 그 사이에 수많은 보루가 있다. 그리고 비암사 바로 뒷산인 비암산에도 보루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 보루를 비암산보루라고 이름 붙였다. 2차선 도로를 달리면서 지난해 봄에 답사했던 이 성들이 있는 산줄기를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차가 기우뚱거렸다. 고산사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산사 입구 운주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새 고산사가 일주문을 잘 지었다. 일주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지는 않지만 이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가 힘겹다. 백제루를 지나 큰 마당에 이르니 아직 돌아가지 못한 신도들이 마당에 서성이고 나처럼 뒤늦게 온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둘러 보고 있다. 나는 우선 도침대사의 영가를 모신 도침당을 향해 합장 배례하고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 앞에 합장배례했다. 주지스님은 바뀌었는지 모르는 분이다. 정대스님이 아니라 섭섭하기는 했지만 따로 인사를 드리지는 않았다.
백제극락보전에 가서 삼배를 올렀다. 극락보전 앞에 아기부처님이 있다. 백제극락보전에는 백제역대제왕의 단을 잘 모셔 놓았고, 백제부흥군의 장수였던 흑치상지, 복신 등과 함께 왜국의 장수들의 넋을 위로하는 영가가 있다. 거기 삼배를 올렸다. 돌아나오는 길에 사진 전시회를 돌아 보았다. 스님방에 가보니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방안에 가득 앉아 있다.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셨으면 했는데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차는 무엇하나. 아니 온 듯 가면 되는 거지.
돌아오는 길이 은근히 피곤하다. 병천으로 돌아올까 하다가 그냥 조치원, 청주역, 공단 뒷길을 달려 집에 돌아 왔다. 피곤하다. 그래도 오늘 할일은 충실히 한 것 같다. 마음이 개운하다.
운주산 고산사 일주문
고산사 백제루 범종각
백제 의자왕 추모단과 백제 글락보전
도침당
백제극락보전
백제극락보전 내부 백제역대국왕 추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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