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부여 가림성(扶餘 加林城 성흥산성) 답사

느림보 이방주 2017. 4. 17. 18:26

부여 임천면 가림성(扶餘 加林城, 聖興山城) 답사



▣ 부여 가림성(부여군 사적 제 4호)

▣ 시대 : 백제  (동성광 23년, 서기 501년)  

▣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 1-1번지

▣ 종류 : 석성 테메식산성, 편축식

▣ 시설 : 우물지 3개소, 문지(남문 동문, 서문) 외성에 북문과 남문수구터, 군창터

▣ 규모 : 해발 250m 성흥산 정상부,  둘레 1200m, 높이 3~4m, 내성과 외성이 있는 겹성

▣ 답사일 : 2017년 4월 16일 (함께 간 사람 없음)


가림성 남문지

가림성 위치도

가림성 위치도


가림성 개요

가림성(사적 제 4)은 해발 250m의 성흥산 정상부를 감싸고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으로 돌을 이용해 쌓아 올렸다. 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에 높은 봉우리가 없어 사방이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사비도성을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에 쌓은 성으로 당시 상위관직인 위사좌평을 성주로 삼았다는 것에서도 이 성의 중요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이 가림성을 동성왕 23(501)년에 축조했다는 명확한 연대를 적고 있어 고대사 연구에 큰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가림성은 성흥산 정상부에 그 주변 지형을 따라 쌓았기 때문에 긴 네모 형태를 보이며 전체 둘레는 1,200m에 달한다. 발굴조사를 거쳐 성문과 건물터,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가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림성은 백제부응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다.

 

성벽은 3~4m 정도의 높이로 남아있는데, 성돌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성벽은 밖에서 보이는 외벽 부분만 정연하게 쌓는 편축식을 사용했고, 성돌은 가로로 길게 네모진 돌을 사용하여 한 단, 한 단 수평이 맞게 올리는 바른층쌓기를 했다. 그러나 성문 주변은 특별히 안쪽과 외쪽을 모두 고르게 쌓아 올리는 협축식을 사용했다.

백제는 초기부터 많은 성을 쌓았는데, 성을 쌓는 재료도 흙을 사용한 토성과 돌을 사용한 석성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만들 줄 아는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백제멸망 이후 백제인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같이 전파가 되었는데, 특히 일본 규슈에 백제유민들이 만든 일명 조선식 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가림성 개념도


답사기


1. 답사에 앞서

가림성은 부여군 임천면의 성흥산 정상부에 있는 석성이다. 사비성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 보인다. 부여에서 논산을 동남쪽에 두고 서천 군산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임존성, 학성산성, 장곡산성이 사비성의 북서쪽으로 예산 홍성 쪽의 산줄기에서 서쪽을 방어하는 산성이라면 가림성은 금강의 하구에서 몰려오는 적을 방어하는 산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산성답사는 연기 주변의 산성으로부터 서천에 이르는 산성이라면 건지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성인데 이제서 답사에 나서게 된 것이다.

가림성을 반드시 답사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것은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에서 나온 《백제부흥운동사연구》를 읽고 나서부터이다. 신라는 문무왕이 직접 28명이나 되는 장수를 이끌고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과 웅진성에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백제부흥운동의 본부라고 생각되는 주류성(현재 임존성이라고 가정)보다도 먼제 외곽이라고 생각되는 임천의 가림성을 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이유는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지이므로 이를 내버려두고 주류성을 쳤을 경우 부흥군이 뒤를 칠 것이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의 유인궤가 이것을 반대하면서 가림성보다 주류성을 공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가림성이 워낙 험하고 견고하므로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 있고, 주류성이 백제부흥군의 심장부이므로 이를 공격하여 항복시키면 다른 성들은 자동으로 항복해 온다는 주장이었다. 유인궤는 손자 병법에서 '피실격허避實擊虛' 를 주장하여 '實' 즉 가림성을 피하고 '虛' 즉 주류성을 친다는 의미이다. 유인궤의 이 주장에 따라 가림성을 피하고 주류성을 공격하여 부흥백제국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663년은 백제부흥국의 시련의 해이다. 이 해 백제부흥군은 백강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고 임존성이 함락되었다. 임존성의 함락은 포로가 된 백제부흥군의 흑치상지장군을 통하여 以夷制夷 작전을 쓴것도 당의 유인궤였다. 

임존성이 함락되고 나서도 가림성은 671년까지 부흥군이 저항한 역사적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림성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성왕은 웅진천도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성, 우두성, 사현성 등을 축조하면서 가림성 축조공사를 시작한다. 이 때 16등 관직 가운데 가장 높은 품계인 위사좌평 백가苩加를 보내 관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축성이 완성되고도 백가를 조정으로 부르지 않고 가림성의 성주로 두었다. 백가는 앙심을 품고 사비성 서쪽 들판에 사냥온 동성왕을 자객을 보내 살해하고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에 의해 백가는 목이 베어져 백강에 물고기밥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바로 가림성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2, 가림성 찾아가기

7시 50분에 승용차 스마트키를 눌렀다. 가림성을 찾아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비게이션에 임천면사무소를 치고 그냥 달리는 무식한 방법이다. 차가 데려다 준다. 그런데 오늘은 3순환로를 바로 타지 않고 미평주유소에 가서 주유를 하고 양촌 나들목에서 3순환로로 들어섰다. 석곡, 구미를 거쳐 부강에서 세종시 쪽으로 달린다. 세종시 호수공원에 차가 밀린다. 사람들도 참 오늘같이 날씨 좋은 날 가림성을 가지 왜 호수로 모여드나?

그런데 내비가 웃긴다. 공주에서 우회도로를 타고 부여쪽으로 달리면 될 것을 시내 골목으로 들어서라 한다. 현대차 내비는 이게 병이다. 엄연히 우회도로가 있는데 도시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그래도 우회도로로 가면 "지도를 보십시오"하고 훈계도 한다. 오늘도 공주에서 헤맸다.차를 살 때 내비를 선택에 포함한 것을 후회했다. 내비게이션을 빼고 차를 산 다음에 설치했어야 한다. 그럭저럭 1시간 남짓이면 될 것을 2시간이나 걸렸다. 그래서 또 여행을 하는 거지 뭐.


9시 40분경 임천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조용하다. 장터였던 곳인지 공터가 있다. 면사무소까지 올라가지 않고 텅빈 마당에 차를 세웠다. 면사무소는 옛날 관아처럼 한가운데 산 기슭에 떡 버티고 있다. 주변에 초등학교 농협등이 함께 시위하듯 배치되었다. 면사무소 마당이 아주 넓고 깨끗하고 꽃나무를 잘 가꾸어놓아서 아름답다. 면사무소 앞에서 왼쪽 산기슭을 바라보니 가림성 성벽이 보였다. 먼데서 봐도 복원한 것이 뚜렷하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가림성 입구> 이정표가 있고 선정비나 선행 불망비가 즐비하다.  선정비가 많은 것으로 보아 임천면은 단순한 면소재지는 아닌 것 같다. 지도에 보니 향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군이나 현쯤 되었을 것이다. 동성왕 시대에는 가림군이었다고 한다. 이정표에서 조금 올라가니 목은 선생 영당이 있다. 이곳에도 한산이씨들이 많이 사는 모양이다.


안내 지도에는 가림성 주차장이 있다고 나와 있지만 걷기로 했다. 중간에 대조사라는 고찰도 있으니 함께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다. 길은 아스콘 포장이 되어 있어 걷기 좋고 주변에 꽃이 많아 눈도 즐겁다. 대조사까지 올라가는 길이 약간 가파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대조사는 미륵사찰로 석조미륵보살로 유명해진 사찰이다. 언젠가 친구 연선생부부와 우리 부부가 들렀던 사찰이다.관음보살이 새로 현신하여 날아와 앉은 자리에 원통보전을 세우고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대조사 이야기는 한국의 사찰 대조사 답사기를 쓰기로 하겠다.


임천면 소재지

면사무소와 선정 불망비

가림성 입구

목은선생 영당


안내지도

대조사 앞 이정표



대조사에서 나와 성흥산성(가림성) 가는 길로 올라간다. 벚꽃이 지느라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눈송이처럼 날린다. 길은 아주 순탄하다. 가족단위로 산성을 돌아보는 아침운동을 마치고 내려오는 지역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주차장까지 차를 가지고 오는 중년 남녀도 볼 수 있었다. 올라가는 중에 신도비가 하나 있게에 다가보니 고려 태조 왕건의 신하 유금필의 신도비이다. 가림성에서 유금필이 군량미를 풀어 빈민을 구제했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신도비가 선 연도나 성안에 유금필 사당을 봐도 태조 왕건의 드라마가 있은 이후에 그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유금필庾\弼 (?~941년)

본관은 평산. 태조 왕건(王建)을 섬겨 마군장군(馬軍將軍)이 되었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대광이 되었다. 920년(태조 3) 동북방 국경에 있는 골암진이 여진족의 침공을 당하자, 태조의 명을 받아 개정군 3,000여 명을 인솔하고 성을 축성했다. 923년에도 골암성과 그 주변의 여진족을 초유(招諭)했다.

925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후백제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으며, 이어 임존군(任存郡)을 공격했다. 그해 태조가 견훤의 군대와 조물군(曹物郡)에서 전투할 때 태조를 도왔다. 928년 탕정군에 성을 쌓고 있다가 청주로 쳐들어온 후백제군 3,000여 명을 격파하고 포로 300여 명을 잡았다. 이듬해 12월 고창에서 태조를 도와 견훤 휘하의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931년 참소를 당하여 곡도로 귀양갔는데, 이듬해 후백제의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자, 곡도와 포을도의 장정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했다.

그 다음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의성부(義城府)를 지켰는데, 이때 후백제군에게 공격받는 신라를 구하라는 태조의 명을 받고 출전하여 크게 승리했다. 돌아오는 길에 신검(神劒)을 자도(子道)에서 만나 싸워 승리했다. 934년 태조가 운주(運州)를 칠 때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견훤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듬해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임명되어 나주에 가서 후백제군을 정벌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994년(성종 13)에 태사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절이다.


신도비에서 숨을 고른 다음 서두를 것도 없이 급할 것도 없이 유람하듯 천천히 걸었다. 배낭에 물도 한 병 있고 떡 한 덩이 모나카 과자도 두어 개 가져 왔으니 오늘 양식은 충분하다. 혼자 다닐 때 가장 어색한 것이 밥 먹는 일이다. 산에서 떡이나 빵을 먹을 때도 그렇고, 식당에 가서 해장국 한 그릇을 먹어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정말 혼자가 된다면 어떡할까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아니 이렇게 유유자적하면 된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된다. 나는 내 길이 있다. 그렇게 살면되는 것이다. 당장은 가림성에 오르는 것이다.


주차장을 지나니 커다란 바위벽이 나타나고 바위 곁으로 작은 돌계단이 있다. 그 아래 휴식처가 있었다. 휴식처 앞에는 가림성에 대한 안내판과 지표조사하는 사진과 개요가 있어서 가림성의 개요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를 맡은 연구회에서 마련하여 놓은 것 같다. 그런데 주변에 성벽 발굴 조사에 쓰인 부목이나 굴삭기 삽 같은 것이 널려 있어 보기 안좋았다.


유금필 장군 신도비

마지막 휴식처 앞의 바위와 발굴 개요도와 안내판

가림성에 대한 안내


3. 가림성에서

여기서 과자를 두개 먹고 물을 마셨다. 어차피 성에 올라가면 답사가 끝날 때까지 과자는 커녕 물을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아까운 계단을 하나씩 밟아 성으로 올라간다. 이 순간도 성벽을 맞닥뜨렸을 때만큼 긴장한다. 처음 가는 성을 올라갈 때의 엷은 기대감과 긴장감에서 오는 쾌감도 나를 자꾸 성으로 불러내는 요인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을 준비하는 마지막 단계의 흥분과 기대감이라고 말한다면 외설일까?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어찌 지내느냐고 물으면 '城생활을 하며 지낸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여자친구들은 황당해 한다. 아마도 '性生活'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이렇게 단언한다. '城生活은 性生活이다.' 일단 오르기 직전의 엷은 흥분과 기대감이 같지 않은가? 더구나 여기 남문을 지나면 커다란 사랑나무가 있다니 오늘은 더 설레나 보다. 계단 돌 틈에 노랗게 양지꽃이 피고 아기별꽃이 하얗게 피었다. 이 성을 오르다가 또는 오르는 적을 막다가 여기서 죽은 이들의 피가 노랗게 하얗게 피어난 것인가. 그들의 아픈 영혼이 꽃이 된 것은 아닌가?


아래에서 바라본 큰 바위를 올라서서 왼쪽으로 돌아 몇 계단을 더 올라서니 정말 남문지라고 생각되는 성벽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있다. 느티나무는 참 예쁘게 생겼다. 이렇게 큰 나무가 이렇게 높은 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으니 사랑나무라 할만하다. 먼데서 보니 하트♤ 모양이다. 참 보기 좋다. 동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보니까 임천면 소재지는 물론이고 멀리 강경들에 하얀 비닐하우스와 생동하는 들판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너머로 금강의 모습이 빛을 받아 기다란 비단을 널어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런데 그 바위에 무슨 건물이나 초소가 있었는지 기둥을 세운 것과 같은 홈이 4개인지 4개 라고 해야 할지 파여 있었다. 분명 사람의 손에 의해 사각형과 원형으로 파여 있어 초소가 아닌가 하는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본다.


성벽을 보자 허겁지겁 서벽으로 내려갔다. 최근에 복원공사를 했는지 성벽 아래 공사장비가 드나든 흔적이 남아 있어서 다니기는 좋았다. 서쪽으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성벽이 잘 복원되어 있었다. 아마도 면소재지에서 잘 보이는 이곳을 먼저 복원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공사가 용이했을 수도 있다. 성벽은 산의 모양을 잘 이용하여 산의 경사를 잘 이용하여 성의 기능을 귿대화 하는 방법으로 쌓았다. 서벽은 편축식으로 밖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메우는 방식을 택했다. 성안에서 바로 성벽으로 달려드는 적에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은 성벽 아래 평지가 없어 비탈을 올라와서 바로 성벽에 붙어야 하므로 공격 장비도 놓을 수 없고 공격과 후퇴를 마음놓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인궤도 이 성을 공격하기를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사비에서 10~15km 밖에 되지 않는데가 금강어구와 부여의 남서부를 지키는 요새이기 때문에 고위직에 있는 백가를 파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복원한 부분도 성석은 단단한 화강암 소재로 본래의 성벽의 바른 쌓기 모양을 본따서 했다. 그런데 돌을 이곳의 무너진 성돌을 모아 한 것이 아니고 새로 들여와 다듬어 쓴 흔적이 드러난다. 옛것은 돌을 정으로 다듬어 정교하지 않은데 새로 쌓은 부분의 돌은 칼로 자른 것처럼 정교하다. 이곳에도 성돌을 주워다 방천 둑을 쌓고 마을의 건축에 사용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찻길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일제시대 더 했을지도 모른다.  기존의 성돌은 가로 45cm 높이 23cm 정도로 거의 비슷한데 복원한 부분은 35cm×40cm, 30cm×35cm, 20cm×20cm정도로 일정하지 않다. 같은 바른 쌓기인데 복원된 부분의 돌은 더 정교하게 다듬었는데 틈새는 더 벌어져 있고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옛 성벽은 단단하면서도 쐐기돌을 박아 무너질 염려는 더 없어 보였다. 돌 크기를 가늠하여 보려고 취재 노트를 돌 사이에 끼워 보았다. 대부분 성벽은 아랫부분은 큰돌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놓는데 본래의 성벽의 돌이 작은데 위에는 커다란 돌을 얹어 놓은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원형을 유지하여 복원하느라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공사장비가 드나든 곳이 길처럼 되어 있는데 장비가 드나드느라 파헤쳐서 그런지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널려 있다. 몇 조각을 모아 살펴보았다. 기와는 회색 점토를 구워 만들었는데 전문가라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것도 있고 빗살 비슷한 무늬가 남아 있었다. 이 기와 조각에서도 임존성의 그것처럼 명문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토기 조각은 중간 테두리 부분인지 볼록하게 나온 테두리가 보였다. 붉은 점토에 흑갈색 유약을 발라 구운 토기였다. 복원된 부분이 많았지만 원형을 살려 복원했기에 성벽이 나를 많이 흥분시켰다. 벽에 붙어서서 한동안 서 있다가 남문지로 올라갔다.


남문 앞에서 바라본 임천면 소재지

강경쪽의 아름다운 들판과 금강


남문지 앞의 큰 바위에 있는 건물 기둥자리 흔적

남문지 부근에서 바라본 서벽

복원된 부분과 원형이 만나는 부분

성돌의 색깔이 다르다.

복원된 부분이나 본래의 성벽이나 성석을 다듬어 바른쌓기를 한 것은 같은데 모양은 다르다.

돌을 깎은 모습이 다르다

주변에 널려 있는 기와편 한가운데 있는 것은 토기편


남문지에 올라서서 본 서벽의 모습


남문지는 서벽에서 동벽으로 돌아가는 모서리에 있었다. 동벽으로 돌아가는 곳이 일부 치성의 기능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를테면 남문에서 동벽이 전혀 보이지 않아 서벽을 공격하는 적과 동벽을 공격하는 적이 상호 소통도 어렵고 한 명의 장수가 한번에 지휘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반면에 아군은 한군데서 동벽과 서벽을 지키는 군사에게 한 번에 작전을 하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참으로 백제인의 지혜를 한 눈으로 보는 듯하다. 남문 부분이 치성처럼 남쪽으로 튀어 나와서 남뽁 대조사쪽 능선으로 올라오는 적을 막아내기에도 용이해 보였다.


남문으로 들어가니 성안은 매우 평평한 광장이다. 이것은 당시에 건물이 있던 자리인지 후대에 이곳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하기 위해서 평평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다. 잔디를 심어 가꾸었나본데 잡초가 많이 나 있고 민들레를 비롯한 많은 꽃이 피어났다. 광장 가운데로 들어가 보았다. 소나무 그늘에서 두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었다. 성은 전체적으로 광장이 있고 내부로 장대처럼 높은 곳이 있다. 아마도 멀리 관측할 수 있는 보루인가 보다. 보루로 올라가는 길에 유금필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이고 건물 아래 우물이 있다. 동벽 쪽으로 가서 보니 발굴조사가 한창이고 멀리서 보아도 옛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의 느티나무를 살펴볼 사이도 없이 남문으로 다시 나갔다. 느티나무 아래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서로 스마트폰 사진을 찍는 커플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온 남녀 라이딩족이 떠들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편하게 혼자서 답사를 왔지만 이럴 때 약간 외롭다. 나도 느티나무 아래서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참 요상한 아재'라 할 것 같아 그냥 내려왔다. 사실은 발굴한 성벽도 궁금하고-----


남문지를 나와서 동벽으로 돌아갔다. 이미 복원한 부분을 한 50m쯤 지나 구부러진 성벽이 나왔다. 이곳에서 성벽이 바깥쪽으로 일부 튀어 나와 있는데 외성으로 가는 흔적이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골짜기를 계란 모양의 타원형으로 안고 돌아 다시 동문쪽으로 올라오는 것이 외성이다. 외성의 규모는 약 870m정도라 한다.  모롱이를 돌아가니 한 80~100m 정도 발굴하여 지표조사를 하는 곳이 보였다. 다행히 공휴일이라 지키는 사람이 없이 비닐 끈으로 접근을 금지선만 표시해 놓았다. 접근금지 안내판은 없다. 다리가 긴 나는 서슴지 않고 넘어갔다. 조금 양심에 걸리기는 했지만 나도 백제 역사 발굴 조사단에 버금 갈 만큼 백제를 사랑한다.

이곳은 2011년에 1차적으로 발굴조사하고 2015년에 2차로 발굴조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도 서벽과 마찬가지로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산 모양을 이용하여 성벽의 기능을 극대화했다. 저 끝 동문지로 보이는 곳까지 서벽과 같은 방법으로 외벽은 석축하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돌의 모습은 매우 일정하다. 작은 돌은 작은돌끼리 바른쌓기를 하고 큰 돌은 작은 돌의 두배 정도로 다듬어 가로줄을 맞추었다. 물론 큰돌끼리 쌓은 곳도 있다. 쌓는 방법이 매우 정교하여 흙속에서 1500년을 견디었어도 돌과 돌 사이 틈도 없다. 아마도 성 내부에서 흘러내린 흙에 성벽이 덮였을 것이다. 전체 성벽이 고스란히 남은 곳은 아무래도 5~6m는 되는 것 같고 무너진 부분도 최소 3m정도는 남아 있었다. 이곳에 파헤친 흙 사이로 기와편과 토기편이 즐비하다. 그만큼 큰 건물이 많이 있었고, 상주한 군사나 인력이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발굴하는 곳을 지나가며 사진만 찍고 정말 돌을 만져보고 싶은데 참았다. 흙 한 줌이라도 연구하는 분들의 의도와 다르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돌과 성돌 사이에서 문화재가 나올 수도 있다. 명문이 있는 토기편이나 기와편 혹 인골이라고 나온다면 백제의 역사가 일부 바뀔 수도 있다. 정말 감개무량하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발굴공사를 하기 위해 중장비가 드나든 곳이라도 내가 밟는 것이 미안하여 조심조심 밟았다. 동문까지 가서 되돌아 보았다. 감회가 깊다. 이곳에서 있었을 1500년 과거를 상상해 본다. 아우성, 함성, 외마디 소리, 나팔소리, 호각소리 북치는 소리가 마구 들려나오는 듯하다. 


방송과 영화로 나온 사랑의 느티나무

복원된 동벽

발굴된 부분과 복우너한 부분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된다. 끝부분 튀어나온 부분이 외성으로 갈라지는 곳

발굴하고 있는 부분

축성의 모습이 뚜렷한 부분-매우 정교하고 빈틈도 없다

성벽 아래-공사 흔적이 보인다.

옛 역사는 이렇게 남아 있다.

무너진 부분과 남아 있는 부분

동문쪽에서 돌아본 발굴 부분


동문지는 새로 복원한 듯 정제되어 있다. 문지 치성처럼 보이는 양쪽 성첩 위에는  키가 비슷한 커다란 참나무가 역시 장수처럼 지키고 서있다. 여기서 내성은 북으로 돌아가고 동문 성벽에서 갈라져 산 아래로 내려가 남문에서 동문으로 오는 한 50m 지점으로 연결되는 것이 외성이다. 동문 성가퀴는 약간 높아서 장대 기능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다시 남문으로 왔다.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골똘하다. 그옆을 지나니 우물이 있다. 우물이 있는 곳은 묘하게 둔덕으로 둘러 싸여 있다. 양철지붕으로 지붕을 했는데 지금은 먹지는 못할 것 같다. 물의 양은 많다. 우물을 잘 청소하고 수시로 물을 퍼내면 지금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올라가면 유금필 사당이 나오고 최근에 지은 성흥루가 있다. 성흥루 위에 봉화제단이 있었다. 봉화제단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아마 이곳에서 제를 올리는 모양이다. 임천면에서도 4월 말 경에 백제 대제를 지낸다고 하니 그런 제가 아닌가 한다.

다시 내려와서 성경을 읽고 있는 분에 사랑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가림성에 간 유일한 인증이다.


동문 부근의 복원된 부분

동문지의 참나무 두 그루-처음에 느티나무인 줄 알았는데 참나무였다.

되돌아오면서 본 2011년 발굴지역

우물

우물

우금필 사당

보루와 성흥루

봉화제단으로 가는 보루- 흙으로 높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나무 앞에서 인증샷

남문지에서 돌아본 금강 유역


다시 동문지로 갔다. 성위의 평지는 700평 정도는 족히 되어 보인다. 가는 도중에 들마루가 있기에 앉아서 떡과 바나나 한 개를 먹었다. 허기를 면한다. 떡 한 덩이가 남았는데 사진 찍어 준 이를 줄까 하다가 말았다. 떡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음식을 남에게  나누어 줄 때는 이상하게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냥 가방에 넣고 너른 평지를 지나 동문지로 왔다. 여기서 돌아서면 바로 북벽이다. 북벽도 발굴 준비를 하는 것인지, 발굴을 끝내고 복원공사를 하지 않았는지, 발굴중인지 비닐로 덮어 놓았다. 그 부근에 건물지도 있고 우물지도 있다.

거기서 돌아가니 흙에 덮인 북벽 위로 성길이 나 있다. 사람들의 산책로로 한적하다. 남문지 부근은 광활한데 이곳은 숲이 우거지고 이곳 저곳에 꽃이 만발하여 은밀한 데이트코스로 적합했다. 성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사랑나무라 하는지 모른다. 숨이 턱에 닿도록 가파르게 올라가는 곳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북벽 부분도 모두 가파른 산 기슭을 이용하여 쌓았다.

서문지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서문지에서 휴양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다시 보루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보루 쪽을 택했다. 서문은 복원도 발굴도 하지 않아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주변이 평평하고 역시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여기서 가파르게 올라가다 보니 무연고 무덤인지 백제문화원에서 신고하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지난 가을 벌초를 한 것으로 보아 완전 무연고는 아닌 것 같다. 묘지를 지나니 성의 모습이 뚜렷한데 이곳은 한쪽면만 쌓은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쌓은 협축부분인 것으로 보였다. 성벽의 높이나 성가퀴의 너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너비는 약 6~8m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낙엽이 쌓이고 사람의 손을 댄 흔적이 전혀 없다.


다시 유금필 사당 옆으로 돌아 주차장에서 휴양림 쪽으로 내려왔다. 대나무숲을 지날 때까지 잘 왔으나 마을까지 다 내려와서 길이 없어졌다. 간신히 길을 찾았는데 남의 집 복수아 과수원이다. 그런데 난감한 것은 그 길이 남의 집 마당으로 나 있다. 할 수 없다. 그냥 들어서서 나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바로 옆이 향교이다. 아마도 향교 관리인의 집인가 보다.


외성으로 나가는 성벽

북벽 발굴지

북벽 발굴지 부근의 건물지

북벽의 모습

호젓한 성길 북벽

서문지-건물이 있던 자리인가 널직하다

협축식 쌓기의 흔적-너비를 짐작할 수 있다.




내려오는 길 대숲길

임천 향교


4. 돌아오는 길

1시 50분에 차에 시동을 넣었다. 돌아오는 길에 청양의 두릉윤성 앞을 지났다. 여기도 답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피곤하다. 그러면 또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그런걸 계산하는 사이 성 앞을 지났다. 올라갈 걸----

오늘 큰 수확을 얻었다. 가림성 답사를 빼놓고 백제 부흥운동 산성을 다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이제 정말 두릉윤성 한 군데만 더 돌아보리라. 녹음이 짙어지기 전에 가야지. 좋다. 4월 29일이다.

흙속에 묻힌 성을 보는 것은 역사를 보는 것이고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성돌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그들의 날숨을 내가 또 들어마시는 기분이었다. 사람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마찬가지이다. 삶의 양식과 문화의 수준이 다르지만 어느 것이 법이고 어느 것이 진리인지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민족끼리 편을 갈라서 서로 물고 찢고 싸울 필요는 없다. 산성이라는 문화유적은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자산이지만 한편으로 가슴아픈 과거이다. 쓸데없이 민족의 저력을 낭비했던 흔적이다. 한반도 압록강 두만강 안 쪽, 아니면 간도라하는 중국의 동북삼성까지 통일되어 싸우지 않고 살아왔다면 얼마나 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일까? 그러나 지금 그나마 반쪽으로 나뉘어 대치되어 있으면서도 그 반쪽이 갈갈이 찢겨 오늘도 물고 뜯고 찢으며 싸우고 있다. 한심하다.


5. 후일담 : 가림성 사랑나무

가림성加林城 사랑나무

      

부여 성흥산 가림성 남문지에는 수령 400년쯤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사랑나무라고 부른다. 사랑나무는 가까이에서 보나 멀리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아래에서 보나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닌다.

남문지에서 동문지까지 약 700여 평 정도 되는 평지를 지나 동문지로 가다가 사랑나무를 되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이 느티나무가 하트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무 전체의 모습은 역으로 하트모양이고 오른쪽 맨 아래 가지 모양이 남문과 더불어 바른 하트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성흥산은 해발 260m의 낮은 산인데도 사랑나무 주변에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서 느티나무만 보인다. 멀리 강경들에 봄볕에 반짝이는 금강 줄기만이 그야말로 비단이 되어 백제의 빛으로 흐르고 있다. 다만 느티나무 곁에 스승을 닮은 크고 작은 젊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착한 제자처럼 서 있다. 산성 보루로 올라가는 길옆에 잘 생긴 소나무 여남은이 주군을 시위侍衛하듯 모여 공수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나무라 했구나.

조금 있으려니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끌고 올라왔다. 쌍쌍이는 아니라도 자전거 동호회에서 봄맞이 라이딩riding을 나온 모양이다. 여성회원 웃음소리가 크면 남성회원은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쌍쌍이 데이트 코스로 잡은 젊은이들도 두세 쌍 되었다. 손잡고 사진 찍고, 얼굴 맞대고 셀카 찍고, 갖은 포즈를 다 취한다. 사진을 함께 보면서 한동안 행복할 것이다. 사랑나무 밑에 혼자 선 나는 잠시 외로웠다. 그러나 내게는 가림성이라는 사랑이 있으니까 성벽과 사랑을 속삭이면 된다. 성이 옆에 있으니 그와 성생활城生活을 하면 되는 것이다.

외로움도 잠시, 남녀가 노니는 사랑나무를 스마트 폰으로 찍어 딸에게 보냈다. 제발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보라는 의미였는데 이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닌지라 아빠나 젊은이 감성으로 슬쩍 사랑을 만들어 보세요.” 파격적인 충고이다. 정말 그래볼까? 딸애의 말을 듣고 이 사랑나무 그림을 보면 감탄할만한 어느 여인에게 사진을 보내 보았다. 답이 없다. 5분 쯤 지나 또 열어 보니 아직 답이 없다. 여성들도 쉰 세대가 되면 감성이 무디어지나보다고 묻어 두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책이겠지. 다시는 그런 공허한 짓을 하지 않으리. 이 나이에 젊은 날의 사랑을 추억하기만도 바쁘다.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타령을 하는 것을 보니까 역사적인 의미만 생각하고 가림성에 왔다가 사랑나무에 취해 버렸구나.

가림성은 SBS에서 2005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서동요의 촬영지로 사용되었다. 드라마에서 선화공주가 서동과 평민으로서 살아갈 마음으로 움막을 친 곳이 이곳이며, 사랑나무는 선화공주와 서동이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의 배경이 되었다. 그 후 젊은이들이 여기서 고백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니, 똑똑한 젊은이들도 속설에 기대어 자신의 사랑을 확정지으려 하는가 보다. 참 복도 많은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남문지로 도로 나와 20112015년에 발굴 조사한 동벽을 답사했다. 성벽이 흙무더기를 벗고 1500년 동안 감추었던 알몸을 내 앞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랑나무보다 더 매혹적이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줄자로 성돌의 크기나 성벽의 높이를 재면서 성벽과 사랑을 나누었다. 행여 흙 한줌이라도 떨어질까, 쐐기돌 하나라도 훼손될까 나의 애무는 애면글면 조심스러웠다. 노년에 하는 익은 사랑, 참사랑은 바로 가림성 사랑이다. 그때 카톡이 왔다. “이제서 봤어요. 느티나무가 하트 모양이네요. 하트가 두 개나 있어요.” 아 숨어 있는 하트모양까지 찾았구나. 그 분의 감성을 믿었던 내가 기특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미 가림성과 오르가슴orgasme에 이르렀어요.’라는 말은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답사를 마치고 동문지로 올라와서 사랑나무를 돌아보았다.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의 처절했던 백강전투와 슬픈 부흥백제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부터는 사랑이라고 깨우치는 건지, 늘어진 가지가 멀리 금강의 물빛을 받으며 여전히 사랑을 만들고 있었다.

(2017.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