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 동유럽/발칸 여행 제 4일차(10월 16일) - 부다페스트 →자그레브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도 4시도 안되어 잠이 깬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미 날이 밝고 활동을 하고 있을 시간이다. 여행기를 정리하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면서 나라 꼴을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잠들어 있는 아내에게 미안해서 불을 끄고 또 잠을 청해본다. 1시간 정도 더 자고 일어났다. 오늘은 시내 관광이라 8시 30분에 출발이다. 유럽인들이 출근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에 더 일찍 나갈 수도 없다. 그래서 덜 피곤하다. 미국에서는 대부분 이동시간이 길어 5시에 출발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관광 코스는 부다 지역의 겔레르트 언덕을 보고, 마챠시교회를 둘러본 다음 부다왕궁에 간다. 마챠시 교회에서 어부의 요새를 본 다음 페스트 지역의 영웅광장에 간다. 영욱광장에 들렀다가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먹은 다음 자그레브로 간다. 약 5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
겔레르트 언덕(Gellért Hegy)
12세기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다 순교한 이탈리아인 성 겔레르트가 순교한 장소로, 그의 이름을 따서 겔레르트 언덕이라고 부른다. 해발 약 235m의 언덕으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이곳은 매춘가와 도박장이 밀집되어 있던 장소로 나란히 위치한 부다 왕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 도나우 강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유명하지만 관광지와 조금은 떨어져 있다.
부다페스트의 관광 명소는 이곳에 거의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다페스트의 주요 랜드마크가 몰려 있는 곳이 부다 지역이다. 13세기부터 헝가리의 왕들이 거주했던 왕궁 지역으로, 상업과 예술이 발달한 페스트 지역과 다르게 역사적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며 페스트 지역의 전망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이다. 겔레르트 언덕은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 어부의 요새가 있는 성채의 언덕과 나란히 자리한 언덕이며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먼저 찾아간 곳은 겔레르트언덕이다. 버스로 아주 잠깐이면 되었다. 언덕 아래에서 차를 내려서 걸어 올라갔다. 그렇게 높지 않은데도 숨이 찼다. 이곳에 많은 유적지가 몰려 있는 것 같았다. 다뉴브강(도나우강)이 아름다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벽을 따라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지난 밤에 배를 타고 야경을 구경했던 도나우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다 내려다 보였다. 부다페스트는 강을 중심으로 하여 부다지역과 페스트지역으로 나뉜다고 한다. 부다지역은 헝가리를 지배한 왕들이 거주한 지역이고 페스트 지역은 상공인이나 문화 예술인이 살았던 지역이다. 부다지역과 페스트지역은 시체니 다라로 연결된다. 어떤 의미에서 계금의 차이로 생활의 지역을 구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도자가 다리를 놓음으로써 그러한 구분을 해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런던에 갓을 때도 템즈강의 다리를 중심으로 장안과 장 밖을 구분하여 귀족과 서민의 구분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성을 쌓아 대문을 만들고 성안과 성밖으로 신분의 차이를 두었다. 서울 같으면 4대문 안에 사는 사람과 성 밖의 사람이 구분되었다. 내가 사는 청주도 남문이 있고 서문이 있고 북문이 있었다. 이렇한 계층의 구분은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모양이다.
왕궁의 성벽에는 총탄자국이 나 많다. 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하여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의 강대국 틈에서 무한히 시련을 겪었던 나라이다. 시련의 상처 같아 마음 아팠다. 헝가리인은 우리처럼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와 매우 가까운 족속이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유럽에서 이민족에게 시련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된 날이 얼마 되지 않는데 국민 소득은 거의 우리나라 수준이다. 나는 이것을 정치가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헝가리에 처음 들어설 때는 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가 생각나서 헝가리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이 한때 소비에트연방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로부터 풀려나 지금은 자유국가가 되었으니 오히려 우리가 더 불안한 셈이다. 남북이 대치되어 있는데도 인터넷 뉴스를 보면 오늘의 경제나 정치도 말이 아니다. 김춘수의 시는 우리를 걱정한 것이지 헝가리를 걱정한 것은 아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 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 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시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건 하나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으로 역(逆)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非情)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이 시는 자유와 정의의 소중함을 노래한 것이다. 1956년 부다페스트의 대학생 청년 학도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역사적 소재로 하여 약소국가의 자유와 평화를 소망한 시이다. 가만히 읽다보면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녀의 죽음도 노래했다. 약소국가에서도 가장 약한 사람들인 소녀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제일 먼저 시련을 당하게 마련이다. 다뉴브강의 소녀나 한강의 소녀나 다들 연약한 존재이다.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졌을 때의 소녀들에게 돌아가는 핍박은 결국 국가와 민족에게 돌아가는 핍박이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 소녀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가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시련 중에 있다. 경제는 멈춰 있고 정치는 난장판이다. 누구나 자유를 말하지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영역의 둘레가 튼튼하지 못하면 그것을 말할 자유조차도 잃어버리게 된다. 국민은 아무 말없이 묵묵히 피땀 흘려 일한다 해도 정치가 잘못되면 소녀가 희생 당하게 된다. 소련의 총탄에 강자의 총탄에 의해 소녀로부터 유린당하게 된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자꾸 생각하면서도 헝가리인들의 검소하고 밝은 모습이 부럽다.
겔레르트 언덕위에서 내려다 보는 도나우 강은 가을이 한창이다. 언덕도 온통 가을의 빛깔이 아름답다. 단풍과 맑은 도나우강과 고색창연한 옛 건축물로 가득한 이 도시가 참 부럽다. 그리고 그러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 있는 것도 부럽다. 도나우강은 어찌 물이 줄지도 않고 저렇게 가득할까? 강물은 흐르는지 마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모든 역사의 국록을 다 짚어왔으니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해진 시간 때문에 빨리 걸어서 성벽을 돌아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정상 부근으로 올라갔다. 성채 언덕위에 세워진 거대한 왕궁인 부다 왕궁을 지난다. 이 왕궁은 건축과 파괴를 반복하여 헝가리의 수난사와 함께 한다. 18세기 헝가리 독립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04년에 재건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된다. 20세기에 들어다시 건립하여 박물관으로 쓰인다고 한다. 건물 여기 저기에서 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어부의 요새는 어부들이 왕궁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도나우강과 페스트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사람들이 많아 올라갔으나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았다. 뾰족한 7개의 탑은 마자르족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차시성당은 첨탑이 하도 높아서 한 눈에 바라볼 수 없었다. 헝가리 국왕들이 대관식과 결혼식을 이곳에서 올렸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에르제베트(엘리자베스 시시) 황후의 대관식도 이곳에서 열렸다고하는 왕실의 성당격이다. 마치 백제시대에는 왕궁내에 내불당이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세기 벨러 4세의 명으로 건축된 초기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어부의 요새, 세체니 다리와 함께 부다페스트의 랜드마크 중 하나라고 한다. 1470년 마차시 왕의 명령으로 증축된 88m 높이의 첨탑과 원색의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이 볼 만하다. 교회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다.
어부의 요새 등 겔레르트언덕을 여기 저기 둘러보고 약속 시간인 10 시 20분에 모두 모였다.
영웅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오페라하우스, 디스트음악학원, 한국대사관을 보았다. 영웅광장에는 14명의 왕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유럽 사람들은 동상을 참 좋아한다. 역사적인 인물들의 동상을 세워 놓고 기린다. 자기가 반대하는 인물이라 해서 밧줄을 걸어 끌어내리는 일은 없다. 우리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동상도 없고, 처음 한양으로 서울을 옮긴 태조 이성계의 동상이 서울 어디쯤 세워질 수 있는데 없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정주영, 이병철과 이들을 이끌어낸 박정희 동상이 있을 법 한데 없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120년 전에 지하철이 개통됐다고 한다. 그래서 거리가 모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성이스트반 성당은 외관만 보았다. 유로를 받지 않고 헝가리 화폐만 받는다.
겔레르트 언덕은 성벽을 다라 올라간다
성벽의 총탄자국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 본 도나우강-멀리 시체니다리가 보인다
겔레르트언덕 에서 도나우강을 배경으로
언덕에서 본 풍경
도나우강을 배경으로
거리의 모습
성벽을 돌아
자유의 여신상
부다페스트 시내의 모습-멀리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성벽을 걸으며
어부의 요새
어부의 요새
마차시성당
마차시 성당 부근에서
어부의 요새의 뾰족탑
어부의 요새 부근에서
마차시 성당 앞에서
어부의 요새 앞에서
마차시성당 앞의 광장과 마차시 동상
부다왕궁 유적지
헝가리 대통령 집무실
왕궁의 유적과 대통령 집무실
영웅광장
시체니 다리가 보이는 풍경
부다왕궁의 건물 지금은 박물관이다.
왕궁 언덕에서 보이는 풍경
언덕에서 보이는 풍경
부다왕궁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부다 왕궁의 정문
거리
영웅광장과 기념비 36m라고 한다
점심에는 중국음식을 먹었다. 쌀밥은 푸수수하지만 그래도 밥이다. 일행 중에서 고추장을 가져온 분이 있어서 비벼 먹었다. 토마토 계란탕은 먹지 않았다. 두부조림은 맛이 괜찮았다. 무우볶음은 참 맛이 없었다. 생선찜이 나왔는데 비린내가 났다. 우리나라 식으로 음식을 했으면 참 좋은 먹거리인데 말이다.
점심을 먹고 크로아티아 자그래브로 이동한다. 버스는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평원을 달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린다. 지루하다. 차는 쉬지 않는다. 운전기사는 성격이 좀 원만하지 못해 인솔 가이드와 가끔 충돌하는 모습이다. 아침에 호텔에서 조금 일찍 나와도 신경질이고 조금 늦게 나와도 신경질이다. 헝가리의 평원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오스트리아 평원만큼 아름답다. 크로아티아와 국경지대에 오니 출입국 수속을 해야 한다고 한다. EU에 가입한 나라들은 셍겐조약에 가입하는데 아마도 크로아티아가 가입하지 않은 모양이다.
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이란 유럽연합 (European Union) 회원국 간 국경 시스템을 최소화하는 국경 개방 조약이다. 유럽 각국의 자유로운 인적 교류를 목적으로 가입국 간 국경을 철폐하고 정보를 교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솅겐조약에 가입된 솅겐국가(Schengenland) 범위 안에서는 한 국가를 여행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솅겐조약 가입국 사이에는 별도의 출입국심사가 없으며, 이동 시 여권이나 비자 등이 필요하지 않다.
북서쪽으로는 슬로베니아, 북쪽으로는 헝가리, 동쪽으로는 세르비아(보이보디나 자치구), 남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이루며,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에 면해 있다. 수도는 자그래브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던 공화국이었으나, 1980년대말 소련과 동유럽을 휩쓴 개혁의 흐름 속에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크로아티아의 경제는 농업과 가축사육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슬라보니아의 판노니아 평원에서 재배되는 곡물류를 비롯하여 콩·감자·사탕무·아마·대마·과일 등이 주요작물이었으며, 연안의 섬들에서는 포도재배가 활발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존의 목재산업이 중요성을 유지하는 한편 경공업이 발달하고 매장량이 많은 유전들이 발견되면서 크로아티아는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 공업국으로 변해갔다. 이스트라와 달마치야의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포도나 올리브를 재배하거나 어업 및 항해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 지역에서도 해운업과 관광업(특히 달마치야에서)이 발달했으며, 천연자원(석유·석탄·보크사이트)을 기반으로 한 공업개발에 많은 관심이 주어졌다. 주요 산업으로 식품가공·포도주·섬유·화학·석유·천연 가스 산업 등이 있다. 체티나·크르카 강에 주요 수력발전소가 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크로아티아는 처음에는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했지만 연방 내에서 자치권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선거를 통해 비공산주의계 정부가 탄생했으며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자극을 받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세르비아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군의 도움으로 크로아티아 내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1992년 4월 15일 한국이 크로아티아를 승인한 뒤, 1992년 11월 18일에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북한과는 1992년 5월 12일 승인이 이루어지고 1992년 11월 30일에 수교를 했다. 공관장은 주헝가리 대사가 겸하고 있으며, 진출업체로 현대종합상사·삼성물산 등이 있다. 한국은 승용차·텔레비전·오디오 등을 수출하며, 크로아티아는 종이·직물·의약품 등을 수출한다. 대한 수입액은 3,127만 달러이고 대한 수출액은 160만 달러이다. 1997년 현재 체류자는 15명이다.
성 마르코 성당은 지붕에 크로아티아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크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작고 아담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않고 잘 살고 못사는 것의 기준이 얼마나 즐겁고 여유있게 사는 것이지 남보다 더 돈이 많은 것을 기대하며 경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그래브대성당은 웅장하고 고딕양식으로 뾰족한 첨탑이 눈에 띄었다. 하늘로 치솟은 첨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신에게 가까이 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독재 체제에 있는 유고의 연방이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유고의 티토대통령은 특히 김일성과 친해서 교류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으로 천주교를 심하게 탄압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티토가 어린시절 신부의 시종으로 미사에 참여했는데 잘못해서 포도주를 엎질렀다고 한다. 그런데 신부가 꾸짖으며 다시는 교회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후 그는 교회를 떠나고 빨치산이 되어 공산주의 운동을 한 다음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어 독재를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미사 집전 중에 어린 시종의 뺨을 때리는 신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티토의 천주교 학대를 합리화하려고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자그래브 성 마르코 성당
자그래브 대성당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
반 젤라치크광장
광장 주변
자그래브 대성당 앞의 분수대
자그래브 대성당 성슈테판 성당이라고도 한다
성마르코 성당 앞에서
저녁 거리 관광을 마치고 호텔에 들었다. 저녁 식사는 호텔식이다. 밥을 잊고 빵으로 입맛이 바뀌는 기분이다. 이제 빵에 더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먹거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유럽 같은 곳은 그냥 빵과 치즈 요구르트 고기 정도이다. 밀가루는 빵을 만들고 고기는 굽거나 훈제를 한다. 계란은 삶아 먹는다. 그들은 맛보다 식재료에 중심을 두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만드는 과정도 하나의 문화이다. 하나의 식재료로 요리하는 과정에 따라 다른 맛을 내고 영양과 섭취가 다르다. 저녁에 쉬고 내일은 라스토케 마을 관광을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사진을 많이 훼손했는데 아들이 무진 애를 써서 다시 살렸다. 그래도 아름다운 크로아티아 사진이 가장 많이 망가졌다. 경치 좋은 곳을 많이 살리지 못했다. 사진이 망가졌을 뿐 아니라 촬영 날짜와 시간이 다 지워지고 섞여서 가늠하기가 어렵다. 아내의 핸드폰 사진을 겨우 살려 여기에 싣는다. 안타까울 뿐이다. 큰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여행과 답사 > 해외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바이/ 동유럽 발칸 제 6일차 - 블레드 → 짤쯔브르크 (0) | 2016.11.06 |
---|---|
두바이/ 동유럽 발칸 제 5일차 (10월 17일) - 자그래브 - 블레드 (0) | 2016.11.05 |
두바이 동유럽/발칸 여행 제 3일(비엔나→부다페스트) (0) | 2016.11.02 |
두바이 동유럽/ 발칸 7국 여행 제 1일, 2일 (두바이 →비엔나) (0) | 2016.11.02 |
러시아 북유럽 일주 12 - 여행을 마치며 (0) | 2015.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