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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애국지사 일완 홍범식 고택 답사

느림보 이방주 2015. 9. 10. 12:50

일완 홍범식, 벽초 홍명희 고택 답사

 

답사일 : 2015년 9월 9일

답사한 곳  :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홍범식 홍명희 고택)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365   (홍범식 홍명희 고택)

 

홍범식/홍명희 고택

 

벽초 홍명희의 가문은 우리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홍명희의 할아버지는 중추원 찬의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사실 따지고 보면 아픈 역사의 희생물이다. 친일파가 있어서 나라를 빼앗겼다고 할 수 있지만 어찌보면 나라를 빼앗겨서 친일파가 되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친일파를 생각할 때마다, 친일파를 원망할 때마다 유신시대에 유신을 혐오하면서도 공무원으로 어쩔 수 없이 명맥을 유지했던 나는 챈일파를 욕할 자신이 없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정의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지 못한 한스러운 젊은 날이었다. 내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가 유신시대니 그나마 다행이지 일제 강점기였다면 목숨 걸어 일제에 저항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친일파를 아비로 둔 홍범식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인 군수를 거쳐 1909년에 금산군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그는 1907년 태인군수로 있으면서 의병을 보호하여 일본 헌병이 의병을 체포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금산군수로 부임해서도 선정을 베풀어 주민의 칭찬을 받았다.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 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 등은 그의 군수 재임 시의 선정을 칭송하는 군민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그는 1910년 국권상실 후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의 유서조차 일본 경찰에게 압수 당하여 전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홍범식의 아들은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 선생이다.  홍명희는 1888년 괴산에서 태어나 조선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을 소재로 소설 <임꺽정>을 지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다가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조광>에 다시 연재된 이 소설은 민중의 풍속과 사상과 언어는 물론 민중의 꿈이 담겨 있는 한국문학의 역사를 새롭게한 문학 작품이다. 민중의 사상과 언어 풍속 문화를 담은 역사 소설로서의 가치를 제고한 명작이라 할 수 있다. 홍명희는 부친 홍범식의 유서를 간직하고 유훈을 받들어 독립운동 가문으로 일으키는데 혼신을 다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홍명희는 동부리 생가에서 괴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홍명희는 해방 후 1948년 4월 백범 김구 선생과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한으로 넘어가 그곳에 잔류하게 되었다. 그가 사회주의자였기에 남은 것인지 계속 민족국가로서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설득하기 위하여 남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북한에서  정치적으로 고위직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일보다 주로 문화적인 일을 맡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68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까지 지낸 사실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임꺽정이란 명작을 창작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감추고자 하는 것도 역사적 콤플렉스가 아닌가 한다. 당당하게 역사를 인정하고 그의 공과를 밝힐 수는 없는 것인가 의문이다.

 

홍기문은 홍명희의 아들로 북한에서 공헌을 세운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북한 사회 과학원장을 역임했고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버지 홍명희의 가르침으로 할아버지의 유훈을 끝까지 지켜 집안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소설 <황진이> 를 써서 만해 문학상을 받은 홍석중도 그의 핏줄이다.

 

홍범식의 생가는 괴산 동부리에 남아 있었는데 괴산 민속자료 146호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일부 건물이 없어지고 허물어져 문화재 가치를 상실하였다. 2002년 괴산군이 매입하여 보수하고 안채, 사랑채, 광채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괴산은 세계유기농엑스포로 준비가 한창이었다. 군청앞 너른 둔치에는 이미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꽃을 심고 마지막 주변정리를 하고 있어서 도로가 부산하다. 군수가 구속된 군청 마을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괴산 군민당' 소속이라고 끝까지 기존 정당에 합류하지 않는 임각수 군수는 갖가지 고발과 의혹 제기 속에 버티고 버티더니 드디어 전국에서 몇 안되는 무소속 민선군수 3선을 달성하여 의욕적으로 일하였던 끈기로도 버티지 못하고 금년 여름 구속되었다. 유기농엑스포를 의욕적으로 준비하다가 마지막 정리를 못하고 큰집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아직도 괴산 군민은 그의 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군수가 되면서 괴산군은 마른 나무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활기가 나기 시작했다. 군청 앞에서 차를 세우고 한참 서 있었다

 

홍범식 생가 앞에 이르니 입구 표지판에 홍명희라는 이름은 없었다. 홍범식 생가라고만 되어 있다. 얘기를 들으니 이 표지판이 여러번 바뀌었다고 한다. 북으로 나즈막한 뒷산이  바람을 막고 마당 건너 도로를 횡단하면 달래강 물이 흐른다. 겨울에도 참 따뜻하겠다는 느낌이다. 안온한 안양에 든 것 만큼이나 편안하다. 비석도 홍범식의 행장을 적은 비석만 서 있다. 다만 이 앞의 길 이름이 임꺽정로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통일이 되면 옆에 홍명희나 홍기문의 일생도 비로 서게 될지 의문이다. 역사는 역사로 그냥 인정하면 안 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이 고가는 홍범식이 나고 자란 곳이다. 뿐만 아니라 홍명희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내판에 홍명희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괴산에서 홍명희를 제대로 기리는 것은 시간을 더 요하는 것 같다.

 

생가는 복원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홍범식 선생의 유품 한 점도 없다.  그의 사진이나, 군수시절의 사진, 유서라도 복사해서 걸어 놓으면 안되는가? 글씨 한점도 걸려 있지 않아 너무나 쓸쓸하다. 하다못해 정읍이나 태인 같은데 있는 선정비 탁본이라도 걸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홍범식의 추모비에 임각수 군수 이름만 선명하다. 금산에서는 오히려 홍범식을 기리는 행사를 한다는데 괴산에서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홍명희 문학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겉으로는 말끔하게 다시 세운 듯하지만 안에는 이 가문의 내력을 알아볼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 눈만 바로 뜨면 소설 임꺽정이라도 한 질 갖다 전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늘은 한없이 맑고 깨끗하다. 어떻게 구름이 한 점도 없을까? 홍범식의 가족사 만큼이나 복잡한 오늘의 정치는 오늘도 권모와 술수가 휩쓸고 있다. 부친은 친일파, 일완선생과 아들 홍명희는 독립 운동가, 임꺽정의 저자 벽초선생과 그의 아들은 북한의 정치가가 되었다. 우리가 통일되고 몇 년이 지나면 신라의 후손이 계백을 존경하고 백제의 후손이 김유신을 추모하듯이 벽초도 우리 문단의 별이 될 것이다. 역사는 한 가정 뿐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를 이념의 혼돈 속으로 몰아 넣기도 하지만 또 거기에 초연하게 사는 방법도 가르친다. 씁쓸한 마음으로 제월리로 차를 돌린다.

 

홍범식 고택의 표지판-홍명희 이름은 없다

 

추모비

 

제월리 365번지는 바로 찾아 갈 수 있었다. 고가가 있었던 흔적은 분명했다. 북쪽을 막아 동으로 감싸 안은 나즈막한 산줄기가 마을에 찬 바람을 막아 더욱 따뜻해 보인다. 마을 앞에 뚱딴지(돼지감자)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꽃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마당에 차를 세우고 보니 고가 한 채가 서 있고 뒤 편으로 새로 지은 전원 주택이 서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잔디가 깔려 있고 새로 지은 정자도 한 채 서 있다. 잔디밭에는 예쁜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돌로 현대식 정원을 꾸며 놓았다. 정원 한 귀퉁이에 옛날 기와가 쌓여 있어서 옛집의 허물어진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잔디밭은 들어갈 수 없게 철조망을 쳐 놓았다. 열고 들더 가보고 싶었지만 철조망은 들어오지 말리는 의미인 것 같아 카메라 렌즈를 당겨 보니 홍명희 생가라는 표지석이었다.

 

그러면 동부리 집과 이 집은 어느 것이 정말 홍명희 생가이고 홍범식 생가일까? 이에 대하여 충북대학교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고가는 한동안 홍명희의 생가로 잘못 알려져 왔다. 당초 이곳은 풍산 홍씨의 묘소를 관리하던 묘막이었다. 홍범식의 「제적부」에는 1919년 5월 5일에 이곳으로 이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괴산의 3·1운동 주도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제월리에 홍범식 일가의 선영이 있으니 이 집은 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실로서 규모가 크기도 하지만 그러나 엣날 명문가의 재실은 명문 만큼 실용성 있게 크게 지었으니 그런 것이라고 할 만도 하다. 한 채 남아 있는 고가에는 누군가 살고 있는 듯했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남의 집을 굳이 들어 갈 수가 없어 밖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특히 뜰의 섬돌이라든지 마당에서 올라가는 계단이라든지 담장에 옛 돌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그 돌이 상당히 다듬어진 것으로 봐서 고가임을 알 수 있다.

 

뒤에 보이는 붉은 지붕의 현대식 건물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 놓고 보니 나는 그 집이 아주 보기 싫었다. 서구에서는 옛 에술가들의 생가라든지 명인들의 집을 잘 관리하여 명소로 만들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데 우리는 홍명희 같은 명인의 연유 사적을 이렇게 소홀히 하는지 모르겠다. 노르웨이에서 베르그의 생가에 갔을 때 마치 베르그가 살아서 맞아 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역사적 의미를 뭉개고 있는 우리가 안타깝다.

 

제월리 고가

문에서 들여다 보니 섬돌이 보인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계단 돌

홍명희가 나고 자란 엣집이라고 되어 있다.

잘 다듬은 정원

 

정원에 쌓아 놓은 옛기와

 

그냥 집으로 돌아설까 하다가 괴산의 면소재지 중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도에 갔다. 목도로 가는 길에는 우람한 중원대학교가 서 있고 중원대학교에서 조금 더 가니 학생군사학교가 있다. 괴산에 생동감을 불어 넣어 주는 건물로 생각되어 반가웠다. 옛 장터를 구경하려고 갔는데 시장은 새 건물이 들어서고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어서 전통 장터라는 풍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장에는 사람도 없고 전방의 주인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없다. 꽃을 파는 아낙네만이 꽃 앞에서 졸고 있다. 목도 복숭아가 하도 소담해서 사려고 한 참을 서서 기다려도 주인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다방에 있을 거라고 가보라는데 다방까지 들어가 재미지게 노는 그를 불러내기 미안했다. 시장만 두 바퀴 돌고 그냥 돌아왔다. 목도 장터도 옛날처럼 흥청거리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목도시장 입구

주인도 고객도 없는 텅빈 전방

일흥 영양탕이란 곳에 들어 갔는데 -----

 

칠성 괴산 잡곡에 가서 보리쌀을 샀다. 보리쌀이 쌀보다 비사다. 그러나 농협에서 사는 것보다 싸다. 특히 이 괴산 잡곡에서 사는 모든 잡곡은 온전히 국내산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서 좋다. 직원들이 무척 친절하다. 작년에 수수쌀 40kg, 기장쌀 20kg을 사다 먹어 보았다. 정말 품질이 좋다. 보리쌀은 처음이지만 밥을 지어 먹어보니 옛맛이 그대로 살아난다.

돌아오는 길에 모래재를 내려오며 자기 키만큼이나 큰 고추를 들고 서 있는 임꺽정 상을 흘낏 쳐다 보았다. 소설 임꺽정을 읽어본 사람들이 우스꽝스러운 저 모습을 보면 뭐라 할까? 칠성면 입구에는 이와 비슷한 상이 서 있었는데 언젠가 태풍에 넘어졌다. 그런데 최근에 좌대보다 훨씬 작아서 더 이상한 모습으로 임꺽정이 고추를 들고 서 있다. 괴산에서는 임꺽정을 벽초의 한국인의 정서와 사상과 언어 풍습을 담은 훌륭한 문학 작품으로 진정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주인공 임꺽정이란 인물이 민중의 울분을 토로한 시대의 대변자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