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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 보고 계시는지요 - 증평 율리栗里 석조관음보살입상石造觀音菩薩立像 앞에서-

느림보 이방주 2015. 1. 27. 01:30

관세음보살觀音菩薩님보고 계시는지요

 - 증평 율리栗里 석조관음보살입상石造觀音菩薩立像 앞에서-

 

 

관세음보살님 정말 다 보고 계시는지요. 이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를 다 보고 계시는지요. 세상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까닭을 다 보아 알고 계시는지요. 얼마나 고고한 마루에 오르려기에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 눈물을 다 보아서 아시는지요. 정말로 세음世音을 관하셨는지요.

 

답답하다. 정말 답답하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답답한 내안을 드러내 보일 곳이 없어서 답답하다. 그래서 어제 가서 처음 뵙고 온 증평 율리栗里 석조관음보살입상石造觀音菩薩立像을 또 뵈러 갔다. 행여 소리도 낼 수 없는 내 답답한 세음世音을 다 보고 그 두터운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거라는 엷은 소망도 있었다.

율리 삼기저수지는 안개에 덮여 있었다. 꽝꽝 얼어붙은 수면이 열흘밖에 남지 않은 입춘이 두려운지 엉 쩡앓는 소리를 했다. 얼음 위에는 엷게 물이 괴어 버드나무 검은 그림자를 거꾸로 받아 안고 있었다. 관음보살은 차가운 안개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무겁게 서 있었다. 뒤로 배광도 없고 머리에는 화관도 없었다. 동향하여 좌구산을 바라보고 묵묵히 서 있었다. 법의의 주름은 그대로 남았는데 상호相好는 말이 아니게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마 아래 움푹 파인 곳은 눈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눈이 아니었다. 코도 없고 입도 없다. 귀만은 일부 살아서 세음을 들으려 하는 것 같았다. 세음을 듣고 관해야 하는데 귀가 보존되어 그 나마 다행스러웠다.

 

관음보살님, 내게는 왜 그렇게까지해야 하느냐고 비웃어도 좋았던 때가 있었지요. 관음성전인 보살사 법당에 백팔배를 올리며 하얀 와이셔츠를 다 적시던 때가 말이어요.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자식을 위해서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대입수능원서를 제출하는 날은 정말로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었어요.

얼굴 없는 관음보살님, 상호를 잃어버린 증평 율리 관음보살님, 정말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네요. 화장을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학교에서 도망가 버린 큰아기를 데리러 날마다 남의 아파트 마당에 차를 세우고 담배 두서너 개비를 연거푸 빨던 그런 날이 있었네요. 그렇게까지 하던 날이 말입니다. 오지 학교에서 야학을 하고 아침에도 국수를 삶는 이웃 학부모에게 자루 째 쌀을 내어줄 수밖에 없던 부질없는 날에 제게는 있었네요. 그렇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내 인생에 무엇을 바랐을까요. 혹 귀한 과녁이라도 노렸을까요.

관음보살님은 다 아시지요? 원효 대사는 해골 물을 달게 마시고 가던 길을 되돌려 민중에게 돌아갔다 하대요. 그것이 민중불교 운동이었다나요. 고고하기만 했던 불교, 귀족들이나 영위했던 호화스러운 불교를 민중에 전하기 위해 원효는 그렇게까지 했다고 하네요. 대중과 함께 술 마시고 흥청거리고 춤추고 거리에 휩쓸려 다니고요. 원효가 그렇게까지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부처님 앞에 인간은 높고 낮은 것이 없는 것, 부처님 앞에 중생은 깊고 얕은 것이 없는 것, 부처님 앞에 만물은 두텁고 엷은 것이 없는 것, 달빛은 받으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리라는 것, 그것이 속마음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계시지요? 민중이 불법을 알고 부처님의 진리를 알아야 무지렁이라는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얼어붙은 낙엽이 옅은 바람에 파르르 떤다. 차가운 빙판길에 물이 묻었다. 호수에 잠긴 버드나무 가느다란 가지마다 연두색 물이 들었다. 그런데 안개는 더욱 짙게 호수에서 피어오른다. 관음보살이 여원시무외인如願施無畏印을 한 가슴에 얹은 오른 손이 더 두텁게 보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왼손이 중생의 소망을 알고 어루만질 것만 같았다.

  음보살님, ‘그렇게까지해야 되는 까닭을 알고나 계시나요? 이 엷은 가슴에 드러내지 못하는 세음世音을 관하시고나 계시나요? 시끄러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으로 사는지 갈팡질팡하는 세상을 보고나 계신가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역사의식도 없고 규범도 없이 무너져버린 세상을 아시나요? 아 눈도 파이고 코도 떼이고 입도 무너진 관음보살님이 어떻게 아시겠어요. 아니 보살님은 관세음보살님이시니 보지도 듣지도 냄새 맡지도 못해도 관심觀心은 할 수 있지 않은가요? 내 타는 속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관음보살님, 이 우매한 중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수필문학의 대중화라고 떠벌이고 다녔지 뭡니까? 사실은 아무도 믿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중이 수필적 정서로 세계를 느끼고 수필적 철학으로 세계를 인식할 그때 보살님은 지금처럼 눈도 코도 입도 없어도 되고 조금 남은 귀마저 떨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걱정할 일이 아니겠지요.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서 내가 수필은 안고 대중으로 갈 줄을 모르고, 대중이 수필의 세계로 올라 올 때만 기다리고 있었지 뭡니까? 이런 우매를 용기 있게 걷어차고 한 발 앞으로 내디딜 줄 모르고 속만 태우고 있으니 이게 뭡니까? 목적만 진솔하면 내 이름을 헝겊에 써서 길가에 내걸든, 수필문학을 바가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춤을 춘며 다닌들 무슨 부끄러움이 있을까마는 그렇게까지해야 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으니 이 치졸한 속내를 알고나 계시는지요. 아니 그냥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대중이고 내가 바로 대중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산골의 지고지순한 소녀가 등잔을 들고 사랑하는 선비를 삼년이나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등잔길을 다시 걸었다. 그 소녀가 사랑한 선비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상을 가졌기에 고운 마음을 그렇게까지태웠을까 궁금했다김득신이 얻었다는 절구 한편을 읽으며 나도 수필문학의 대중화라는 꿈의 마당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민중과 한 자리에 함께 서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다지고 또 다진다. 그러면 지고지순한 소녀가 바람 앞에 등잔불 들고 나를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다.

 

行行路不盡 가도 가도 길은 다함이 없더니

萬水更千峰 만수 천봉이 갈고 바뀌었네.

忽覺招提近 문득 가까이 절이 있음을 알려주니

林端有暮鍾 숲이 끝나는 너머에 저녁 종소리 울리네

                                        (김득신의 行頭陀馬上有得 두타로 가는 길에 말에서 절구를 얻다)

(2015.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