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에 뜬 그림자 |
-저자 : 이방주
-출판 : 수필과비평사
-정가 : 1만3천원
-쪽수 : 268쪽
| 최근에 출간한 수필집『풀등에 뜬 그림자』는 가히 섬세한 인문주의의 정수라 할 만하다.
그의 촉수는 특히 촉각과 미각에서 남다르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충분히 느껴지리라.
그의 사유와 언어는 생태학과 지리학, 역사학과 인류학을 넘나든다.
작가의 인문적 촉수는 '문장'을 향한 열망과 끝없는 질문에서 드러난다.
요즘 독자는 질문을 싫어한다. 대부분 진중한 대답을 요하거나 깊은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문도 뉴스도 머리기사만 읽고, 책도 목차만 훑어보기 일쑤이다. 그러기에 작품집 전편에 흐르는 많은 질문은 독자 입장에선 불편한 부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일상에서 삶을 대하는 촉수이자 무엇보다 인문적 촉수를 향하여 있다.
자신이 질문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의 뇌리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생각은 깊어지리라.
답이 어떤 것이든 질문의 답으로 그의 사유는 깊어지고 더 깊어지니, 작품은 평범한 사람이 내놓은 것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산하 굽이굽이 틀어 앉은 비슷비슷한 소나무에도 그의 촉수는 남다르다.
단순한 시각이 아닌 유별하게 반응한다. 소나무를 바라보며 노인이 무심히 던진 혼잣말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작품으로 의미화 한다.
소나무에서 세상 살아가는 지혜와 심오한 철학을 배우며 시 한 편을 읽는 작가이다.
그는 사물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대상의 변화를 경이롭게 느끼는 사람이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보이는 혜안은 노인이 되어야만 볼 수 있단다.
오죽하면, 1962년 유네스코 세계학술기조연설에서 아프리카 현자라는 아마두 테나 씨도 "노인 한 분이 죽으면 그 지방 도서관이 하나 불탄 것 같다."라고 역설하였던가.
또한 음식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독특하다. 작가는 우리 밥상에는 민족의 정서와 삶의 철학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고 말한다.
단언하건대, 그가 펼쳐놓은 활자를 따라가노라면, 입안에 절로 군침이 돌아 먹고 싶은 충동이 일 것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물을 보고 다른 이의 가슴을 울리고 감동을 얻어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만물을 자신에게 끌어안아 설(說)과 학(學)으로 세우는 이런 사람이 인문적 촉수를 가진 이가 아닐까 싶다. 생활에서 인문적 태도를 지닌 덕분이다.
그를 '느림보'라 부른다. 작가의 아호처럼 불리는 호칭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 느리지 않다. 일상에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방랑시인 김삿갓처럼 전국 방방 곳곳을 떠도는 작가이다.
우리 산하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역사적 위치를 직접 찾아가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의 평론 등단작 또한 고 목성균 수필가의 작품집을 서너 번 읽고 직접 생가와 마을을 돌아보고 확인한 것만 봐도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
< 풀등에 뜬 그림자>수필집에 발표된 작품들이 그가 발로 뛰고 온몸의 촉수를 펼친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서문에서 "세계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선물하려고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무엇보다 "내가 찾는 것은 사실이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수필에서 얄팍한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진정성이 담긴 작품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과 아울러 이 시대의 문화를 기억하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평소 문인들 앞에서 "문학이 시로부터 출발하였다면 그 완성은 수필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하긴 요즘 내로라하는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수필의 옷을 입은 산문집을 너도나도 발표하고 있다.
심지어 기존 소설집보다 진성성이 드러나 좋다고 독자들이 평가한다. 그리 보면 접근성이 쉽고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수필은 무한정 열려 있다.
무한정 열린 길이 바로 문학의 완성인 수필로 가는 길이 아닌가싶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 여느 여성의 글보다 섬세하다. 글맛은 감칠맛이 넘친다.
또 어느 부문에선 강하여 부러질 것 같은 문장도 여럿 발견한다.
그리고 문장에 우리말을 부려 쓰는 작가이다. 말도 사용하지 않으면 사장된다고 했던가. 우리말의 생명력을 지킬 자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리는 일도 한 가지 책무라고 여기고 즐겨 애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집<풀등에 뜬 그림자>에서 우리말을 부려 쓴 몇 문장을 소개한다.
속물 같은 내 꼭뒤가 부끄러웠다…등마루에 올라섰다…논두렁콩이 바짓가랑이를 적실 정도로 무성해지면 이듬매기를 한다…하굣길은 대개 저녁곁두리 시간과 맞물렸다…겨울 고구마 맛을 한결 돋우는 것은 얼음이 자그락자그락하는 동치미이다…모지랑숟가락으로 만질만질한 껍질을 힘들여 벗겨야 한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날망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그 외에도 "푸서릿길에 질경이처럼, 농투사니, 웃여울, 이들이들하다" 등 작품집 전편에 우리말을 부려 쓰고 있어 반갑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에서 알토란같은 우리말을 만나길 원한다.
작가는 진정으로 '맛나는 글'을 쓰고 싶단다. 조만간에 음식을 주제로 한 독특한 수필집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을 듯싶다.
"진정 높은 것들은 높은 것들 속에서, 진정 깊은 것들은 깊은 것들에서 나오게 마련인가 보다."
그에게 꼭 맞는 구절인 듯싶다. 앞으로 남은 생애를 이들이들한 노각만큼 깊고 그윽한 맛으로 사회의 건강한 영양이 되는 길을 새롭게 나서고 싶단다.
그는 퇴직하자마자 벌써 그 길을 찾았고, 대학에서 수필 문학 강연을 하고 있다.
부디 그의 말대로 머지않은 날에 문학계에서 "문학의 완성은 수필"이라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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