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서 길어 올린 영혼의 속삭임
입춘 지절에 읽을 책 박영자 수필가의 ≪은단말의 봄≫
이방주
(수필가 수필문학평론가)
박영자 수필가는 우리지방 뿐 아니라 한국수필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수필가이다. 수필문학의 정수를 알고 수필을 쓰는 흔치 않은 작가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제 봄이다. 봄을 맞아 작가가 2000년에 등단 후 처음으로 내 놓은 수필집 ≪은단말의 봄≫을 소개한다.
물가에 앉아 흐르는 세월에 꽃잎을 띄우듯 그렇게 쓴 글이니 치열하게 쓰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넓고 큰 세상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는…
≪은단말의 봄≫의 서두 「책을 내면서」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글은 그냥 자신의 감회를 술회한 듯하지만, 그의 수필문학관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하면, '치열하게' 쓰고 싶은 것이 수필에 대한 이상인데, '세월에 꽃잎을 띄우듯' 써온 수필가의 고뇌와 '세상을 씻어낼 한 방울 물'이 되고 싶은 작품의 역할에 대한 소망이 드러나 있다. 전편을 통해서 드러난 담담한 사색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맑은 영혼 같은 삶의 철학은 세상을 정화하는 한 방울 물의 차원을 넘어서서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진주'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은단말의 봄≫에 수록된 54편에 드러난 제재를 대별하면, 자연, 가족, 고향, 직업, 사회로 구분된다. 작가는 자아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은단말의 봄'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가 앉은 물가는 '은단말'이라는 공간과 '봄'이라는 시간이며, 그가 바라보는 꽃잎은 자연과 가족과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내용으로 한다. 결국 '은단말'이라는 공간성과 '봄'이라는 시간성이 두 개의 축으로 드러나 박영자의 문학세계를 대표하는 시간과 공간의 언어로 집약되고 있다
박영자는 자연을 삶의 동반자로 보고 명상을 통하여 삶을 관조하고 자신을 정화하여 조화하고 융합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그의 아름다운 문장에 감응하여 일상의 웅얼거림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자연은 '가슴을 틔워 주고 상처를 치유해 주기'도 하고, '맑은 영혼의 새들과 함께 노래하는', '세파에 찌든 모든 시름들을 잠재우기'도 한다. 자연은 감응과 조화의 대상일 뿐 아니라, 영원한 일상적 삶의 동반자, ‘회귀回歸의 원향原鄕’으로 생각하는 슬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은단말의 봄≫에 수록된 작품에 나타난 인간관은 바람직한 인간 모습, 가족관, 부부관 등으로 크게 나누어 제시한 가치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그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유리」에서는 '유리같이 말갛게 들여다보이는' 인간을 「며느리 숟가락」에서 '햇살 가득한' 내리사랑의 가족관을, 「아버지의 조롱박」에서는 아버지를 '따뜻한 햇살'로 표현하여 생명의 원천임을 확인하였고, 「어머니의 사계」에서 보양의 그리움이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두레상을 그리워하며」, 「시어머니 수업」, 「친정 나들이」등에서 부모로서의 사랑을, 「부부」에서 부부의 투박한 사랑을 드러내었다.
결국 투명한 사람만이 가슴 더운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인간관과 부모로부터 받은 햇살을 내리사랑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되어 햇살 가득한 봄날을 연상하게 한다.
'칼라 테스트'에서 심혈을 경주한 뤼스헤어L sher는 색의 상징성을 통하여 작가의 개성이나 가치관을 알아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조롱박」에 쓰인 색채어 52개 가운데 고요함과 만족, 평화적임, 상징적으로 조용하고 따뜻한 성격이고 여성적인 상징성을 지니는 푸른색이 절반 가까이 쓰인 점에 주목할 만하다. 가치관이나 개성이 푸른색의 상징적 의미와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의 색채관은 한국의 사계의 순환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뷔퐁Buffon은 '문체는 사람이다'라 했고, 쇼러Mark Sohorer는 '문체는 주제다'라 했다. 수필은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되어야 한다. 박영자의 수필에 사용된 언어는 현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지성이 용해된 유아어로 높은 경지의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 ‘겨우내 조롱조롱 달고 있던 방울들을’ ‘잎눈들은 어느새 통통하게 커져’. ‘쑥이 새파랗게 자라고 양지꽃이 노랗게 웃는다‘, ’보리밭엔 바람이 손을 잡고 초록빛 파도를 넘는다‘ 같은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수필은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 아침이슬처럼 반짝이는 소중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색과 관조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서정범 교수는 『은단말의 봄』 발문跋文에서 '작가의 글은 화려하고 눈부시지 않으나 조용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듯한 여유와 고즈넉함을 느끼게 하고, 삽상한 가을바람 같은 인품과 향기가 담백하게 풍겨 나온다.'면서 그것은 '진실하게 살아온 작가의 삶이 그대로 글 속에 녹아 비추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은단말의 봄≫이 앞에서 말한 수필의 성격을 충분히 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물가에 앉아 흐르는 세월에 꽃잎을 띄우듯' 쓴 글에서도 '꽃잎을 건져 올리듯' 삶의 진실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아침이슬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박영자의 ≪은단말의 봄≫은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철학이 격조 높은 유아적 언어와 영롱한 색채어에 실려 깊은 사색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영혼의 속삭임으로 안목 있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영원한 교향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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