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진눈개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파란데 앞산 소나무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아파트 마당에 세워둔 승용차들의 지붕에도 눈이 쌓여 젖어 있다. 새로 이사할 아파트 입주일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집을 비워주게 되었다. 그래서 어제 살림살이를 다 내려 창고로 실려 보내고 빈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냈는데 밤사이 3월의 눈이 내린 것이다. 땅도 젖어 있고, 나무도 젖어 있고, 미끄럼틀도 젖어 있다. 3월의 눈에 대지가 온통 다 젖었다. 밖을 내다보던 아내 마음도 젖어 있는 모양이다.
아파트 놀이터 한편에 딱지를 붙여 내놓은 장롱이 진눈개비에 젖어 있다. 파란 하늘에서 아직도 아쉬운지 젖은 눈발이 드문드문 장롱에 흩날린다. 20년전 아파트 입주 기념으로 산 열두 자짜리 장롱이다. 마흔 평이 넘는 새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장모님이 보내주신 자개 박힌 장롱을 그 어른의 정성과 함께 버리고 새로 장만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돈을 들인 호사품이었다. 아내가 장롱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오랫동안 썼는데도 흠집 하나 없다. 장롱이 들어오는 날 상기되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나도 이렇게 안타까운데 아직도 새것 같은 장롱을 버리는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아릴까. 우리 내외는 어떻게든 버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새로 입주할 아파트에 가서 방의 이곳저곳을 줄자로 재면서 장롱 놓을 자리를 찾았다. 아내는 친지들 중에서 가져다 쓸 사람이 있는지 두루두루 알아보았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일단 버리기로 마음먹은 다음부터 아내는 버려야 하는 물건이 생길 때마다 '장롱도 버렸는데 이까짓 것'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장롱은 이십년간이나 우리 집 소중한 것을 모두 안고 있던 가구 중의 가구이다. 등기 권리증이나 크고 작은 패물이나 아내가 끈질기게 모아 간직한 적금 통장이나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내가 아끼는 넥타이도 손빨래로 반지르르하게 다림질한 새하얀 와이셔츠도 아끼는 양복도 다 그것이 품고 있었다. 아이들 이부자리도 속옷도 배냇저고리도 다 깨끗하고 뽀송뽀송하게 보관해 준 은인이다. 만지고 쓰다듬는 동안 아내의 손때가 묻어 반짝반짝 윤이 난다. 장롱이 지녀온 수택은 바로 아내가 쌓아온 정의 윤기이다.
농을 비우고 인부들이 사다리차에 실어 아파트 마당 한편에 쌓았다. 나는 동사무소에서 떼어온 폐기물 딱지를 붙였다. 버리는 과정은 이렇게 단순했다. 아내는 그 꼴을 보지 않으려고 주방에 돌아 앉아 하릴없이 그릇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내의 보물은 대형 폐기물이란 딱지가 붙어버렸다. 딱지를 붙이는 순간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쓰레기가 된 것이다.
집을 옮기려니 버려야 하는 것이 많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어쩔 수 없이 버려지는 것들이 허다하다. 나는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수십 년간 모아온 서책을 3분의 2나 버렸다. 명작소설 전집은 물론 백과사전도 버리고 영인본 사상계, 국어국문학, 文章도 버렸다. 1973년부터 모아온 월간 문학사상도 버렸다. 서가도 두 개나 버렸다. 장독도 버리고 화분도 몇 개를 버렸는지 모른다. 아내는 시집올 때 가져온 밥그릇도 버렸다. 따지고 보면 이십년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 아버지의 종신을 맞았던 집도 버린 것이다. 정든 모든 것을 그렇게 버렸다.
세상은 쓸모없는 것을 버린다. 아니 쓸모없다고 규정지은 것들을 버린다. 세상이 바뀌고 취향이 바뀌면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을 모두 버린다. 자판기에서 뺀 커피를 마시고 종이컵을 버리듯이 쓸모가 다하면 뭐든지 버린다. 일회용을 버린다고 나무라지만 무엇이든 버려지는 것은 모두 일회용이다. 1분을 사용하고 버리든 20년을 사용하고 버리든 버려지는 것은 모두 1회용인 것이다. 지니고 있던 시간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버려지는 것은 다 1회용이다.
우리는 사람을 버리기도 한다. 만남은 결국 서로를 버릴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서로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국은 이별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버리는 마음이 미안하고 버려지는 마음이 섭섭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버려야 하는 것이 인간사이다. 아무리 누가 나를 버리지 않더라도 역사는 나를 버리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나도 언젠가는 버려질 운명이다. 아니 지금도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있을 것이다. 자연도 나를 서서히 버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누구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내가 나를 버릴 것이다. 내가 나를 버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그건 섭리이다.
버릴 책을 선별하는데 2주나 걸렸다. 한 번도 안 읽은 책, 최근 몇 년간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책을 모두 버렸다. 세로쓰기로 된 책, 글씨가 잘아 잘 보이지 않는 책도 버렸다. 그런 중에도 내 글이 실린 책을 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버림 받지 않는 책들이라고 영원히 내 서재에 꽂혀있으라는 법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책을 버렸다 해서 책에 담긴 저자의 영혼까지 버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그 책을 읽었다면 저자의 사상 일부가 나의 영혼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버리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딱딱한 호두를 깨뜨려 보면 고소한 알맹이가 나온다. 언젠가 이 호두 알맹이가 꼭 인간의 뇌의 모양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고소한 호두 알맹이를 반으로 나누어 보면 병원에서 본 뇌의 그림과 똑같다. 그래서 나는 호두 알갱이를 영혼의 형상이라고 말해 왔다. 우리는 껍데기를 버리고 고소한 알맹이를 먹는다. 호두를 먹을 때는 누군가의 영혼을 취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지만 육신은 버리고 영혼은 취하게 된다. 순간의 일이지만 껍데기보다 소중한 것은 영혼 같은 알맹이이다. 우리는 물질을 버리지만 깊은 정까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버려져도 그의 영혼은 세상에 남는다.
아, 그렇구나. 장롱은 버렸지만 장롱에 담긴 아내의 정은 가족사에 영원히 남는 것이다. 남길 것은 장롱이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바로 영혼이라는 알맹이이다. 영혼은 남는 것이다. 영혼의 그릇인 책은 버림 받았지만 책에 담긴 사상은 내 영혼이 되어 남아 있다. 세상에 오래 남는 것은 고소한 영혼이다. 껍데기는 진눈개비에 젖어도 정은 영혼이 되어 세상에 남는 것이다.
(2014.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