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신비의 섬 울릉도 우리 땅 독도 3- 셋째 날

느림보 이방주 2013. 11. 8. 14:43

2013. 11. 1.

 

 

신비의 섬 울릉도, 영원한 우리 땅 독도 3 - 울릉도 A 코스, 성인봉 등반

 

▣ 여정 

울릉도 관광 A코스 : 사동항→ 옥천동 → 가두봉 터널 →통구미 몽돌해변 → 거북바위 → 통구미 → 남양터널 →남양(국수바위, 몽돌해변, 투구봉) → 곰바위 → 태하 → 성하신당 → 황토굴 → 태하해안산책로 대풍감 → 현포 고분군 현포항→노인봉 미륵산→울릉천국(이장희집)→ 성불사 → 용출소 →죽암몽돌해변→딴바위→삼선암→관음도→내수천일출전망대→백운동→천부리 → 홍살문 → 투막집→ 너와집→나리분지 관광지구 (07:00-12:00)

 성인봉 등반 : 성인봉 원시림 →울릉국화 군락지 → 투막집 → 신령수 → 알봉 전망대→ 성인정 → 성인봉(986.7m) → 바람등대 → 팔각정 → 안평전(16:20) → 도동  (12:00-17:10)

 

 거북바위와 마주하고 있는 향나무 자생지

 

1. 울릉도  A 코스 관광

 

울릉도에서 첫잠을 자고 일찍 일어났다. 아침 6시, 역시 부지런한 정선생님 부부가 문 앞에 와서 기다린다. 모텔 구내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식사를 하러 가자는 것이다. 과연 무료 식사는 어떤 수준일까? 그러나 이런 접객업소에서 그렇게 형편 없는 식사를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을 하면서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한식 뷔페였다. 울릉도 특산품 부지깽이나물무침, 총각김치, 오징어젓갈, 계란찜, 고등어조림, 미역국 등 성찬이었다.  울릉도 사람들의 손님맞이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아침 식사를 흡족하게 하고 간단한 짐을 챙겨 가지고 도동 사람들이 말하는 소공원으로 나갔다. 소공원은 여객터미널의 대합실도 되고 오징어잡이 배의 선착장도 되고, 문화관광버스의 출발지도 되고, 택시의 출발지도 되고, 오징어를 받는 아낙네들의 어시장도 되었다. 물론 여행객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붐비고 북적거렸다. 우리는 여기서 관광안내 택시를 7시에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남아 BS와 JS는 일출을 본다고 여객터미널 옥상으로 가고 정선생과 나는 벤치에 앉아 오늘의 일정의 협의하면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일출은 수평선 근처에 구름이 머물러 화려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늘은 우리에게 일출까지 보여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택시를 찾고 곧 BS와 JS가 돌아와서 택시에 올라 오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골목에는 여행객들과 이를 실어나르는 차들이 북적인다 그런데도 택시는 기막히게 골목을 빠져 도동리 마을을 거슬러 올라간다. 실로 울릉도 기사들은 운전의 귀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차를 가지고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앉고 이런 길을 운전할 자신도 없어 그냥 온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여객선에 운송료 정도면 택시로 충분하다.

 

울릉도는 경상북도에 속한 하나의 행정자치군으로 되어 있다. 지방자치가 되기 전에도 경상북도 울릉군이었다. 도동읍, 서면, 북면 등 1읍 2면 10개리로 자연부락 수는 5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후포에서 159km, 묵호에서 161km, 강릉에서 178km, 포항에서 217km 떨어져 있으며, 독도는 도동에서 87.4km 동쪽으로 더 가야 된다.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은 울진군 죽변에서 130.3km라고 한다. 그러니 동해의 가장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논은 거의 없고 밭이 있기는 하나 산기슭 비탈밭이 전부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노레일을 설치하여 비탈밭에 여러가지 산나물(부지깽이나물, 미역취, 산마늘, 더덕 등)을 길러 소득을 높이고 있다고 한다. 1970년대 한때 3만 명에 이르던 인구는 지금은 1만 명을 약간 웃도는데 최근에 약간씩 늘어나는 기세라니 반가운 일이긴 하다.

 

택시를 타고 도동에서 사동으로 넘어가는데 터널이 있는데도 구길로 뺑뺑돌아 힘들게 넘어간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니 도동항과 사동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기사는 계속해서 울릉도의 행정, 자연, 사람들의 삶, 역사 등 우리가 낯선 것들을 설명해 준다. 꼬불꼬불 좁은 길을 돌고돌면서, 때로 우뚝 차를 멈추고 밖을 보게도 하고, 내려서 사진을 찍게도 하면서 술술 잘도 이야기 한다. 울릉도의 모든 것을 다 꿰뚫은 박학다식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믿음직 스러웠다. 설명한 내용을 간추려 여기에 적는다. 


(1) 울릉도 개척의 역사

울릉도 개척 100년이 넘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다만 전해 오는 이야기로 남았을 뿐이다. 개척 당시에도 본토와 왕래는 있었다. 주로 쌀을 가져오고 고기를 실어 나르는 일이었다. 배는 돛단배이므로 날씨가 순조로우면 왕복 5일이 걸리지만 파도가 심하면 석 달을 잡아야 했다. 그 때 닻줄은 40발이 되었고 돛과 노를 사용했는데 주로 노래를 주고받으며 일을 했다고 한다. 항해에는 규율이 매우 엄하여서 몸을 다쳐도 아프다는 소리를 못했으며 병이 났다는 소리를 하면 옷을 벗기고 바다에 쳐넣었다고 한다. 항해가 여러날 걸리므로 어른들은 배안에 술을 빚어 넣어서 먹기도 하고 아이들은 돛을 짜기도 하고 신을 삼기도 했다 한다. 배에서 주고 받는 의사 표시는 모두 노래로 하였다.


(2) 햇솔나무(주목)

큰 나무를 한 그루만 베면 기둥. 서까래. 마루. 문 할 것 없이 다 만들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로 정원수로 알고 귀하게 여기는데 주목과 비슷한 나무로 햇솔나무이라 한다. 나무를 벤 그루터기에 7 ~ 8명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무 하나를 베어서 배하나 만들고 나무의 속을 파내고 옥수수를 저장하는 두지(곡식 저장고)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3) 후박나무

몇 아름씩 되는 후박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독도에는 이 나무가 섬 가득히 있었지만 해방 전후해서 이 나무를 모두 베고 지금은 작은 나무들이 있는데 이 나무껍질을 벗겨서 한약재로 활용했다고 한다.


(4) 전복

바닷가에는 온갖 나무들이 바닷물에 잠겨 있었는데 이 나뭇가지나 줄기에 손바닥만한 전복들이 머루송이 달리듯이 붙어 있었다 한다.


(5) 깍새

깍새는 마치 갈매기 같이 바닷물에도 놀고 산에서도 논다는데 알은 주로 산에서 낳는다. 개척당시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이 깍새를 잡아먹었다는데, 어두운 밤이 되어 장작을 해다가 불을 놓으면 이 깍새들이 불에 날아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몽둥이로 이 새를 잡아서 나무에 꿰어서 불에 구웠다. 많이 잡으면 소금을 쳐서 간해 두었다가 양식으로 했다.


(6) 갈매기 알

바닷가에나 바다 가운데 바위에 갈매기가 알을 낳았는데 한 번에 수백 개씩 주워서는 양식으로 삼을 정도로 많았다.


(7) 옥수수와 쥐

처음 이 섬에 와서 옥수수를 심었는데 퍽 잘되었다. 그런데 막상 수확기가 되니 쥐들이 몰려와서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렸다. 그래서 겨울에는 깍새를 잡아먹다가 봄이 되면 명이로 명을 이었다 한다.  


(8) 오징어 

개척 당시 뿐만 아니라 해방 전에만 하여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육지 가까이에도 많았다. 이 오징어가 육지 가까이 오면 바다물빛이 희끄므레 할 정도였다고 한다 .


(9) 산염소

성인봉. 송곳산. 형제봉 일대에는 산염소가 여러 마리 있었다. 개척 당시에는 본토에서 가져다가 기르던 것이 산으로 가서 번식한 것일 거라고 하는데 어찌나 날래고 산을 잘 타는지 수 십 명이 둘러싸고 잡으려 해도 잘 잡지 못했다. 이 산염소는 영양이 좋고 약이 된다고 하여 매우 비쌌는데 주로 총으로 잡았다. 지금도 산중에 여러 마리 있다 한다.


(10) 명이 (산마늘)

울릉도에서 아주 이른봄에 눈속에서 자라는 나물. 바로 "명이"라고 부르는 맛 좋은 산채(山菜)이다. 옛날 개척 당시에는 겨울을 지나고 나면 식량이 모두 바닥이 나서 굶주림에 시달리곤 했는데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산에 올라 눈을 헤치고 이 <명이>를 캐어다 삶아먹고 끼니를 이었다. 그래서 이 나물을 먹고 생명을 이었다고 해서 ‘명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안내 택시 기사는 울릉도 관광코스로 정해진 A코스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코스를 지나면서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계곡의 전설과 풍습, 산물 같은 것을 소개하고 다시 나와 제 코스로 가기도 하곤 했다. 그래서 여기에 그가 전해준 이야기를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감동 깊었던 몇 군데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가슴 속에 남기려 한다.

사동을 지나면서 들은 이야기는 울릉도에 공항이 생긴다면 바로 이 사동 지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깝게 잘 생긴 산을 하나 깎아서 바다를 메꿀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도 공항이 생기면 육지 사람들에게 울릉도는 더 가까워지고 울릉도의 생활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육지 사람들이 편하게 관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울릉도 사람들의 생활의 향상을 가져오는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도 더 확실해질 것이다. 어떤이는 나리 분지가 공항의 적합지라고 하는데 둘러싼 산봉우리 때문에 이착륙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울릉도는 지질공원이라고 한다.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땅에서 특이한 지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지질학자들이 계속해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지질학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화산활동에 의해서 생긴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다. 거북바위와 향나무 자생지를 지나면서 거북 모양의 거대한 바위와 거기에 파랗게 자라고 있는 향나무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다. 거북바위는 모두 여섯 마리의 거북모양 바위가 있다고 하나 우리는 세 마리의 거북만을 찾을 수 있었다, 푸른 바다와 기이하고 커다란 바위가 바로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거북 바위는 첫머리에 있는 사진 바로 맞은 편에 있다. 맨 첫머리 사진은 거북바위 맞은 편에 있는 향나무 자생지인데 향나무가 질이 좋아 조정에 올려 국가 제향에 쓸 수 있도록 했던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일제시대에 마구 베어 가서 그 개체수가 많이 줄었기 대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아침 햇살에 역광이라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은 것이 안타깝고, 바로 이 앞에서 우리 넷이서 기사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람만 크게 나오고 막상 바위는 믿동만 나왔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마음에 두는 곳을 시진으로 촬영하거나 함께 간 사람들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어 좋다. 그러나 막상 나를 찍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거북바위 앞에서 기사가 우리에게 생더덕즙을 사 주었다. 더덕을 우유인지 요구르트인지에 넣어 믹서기에 넣어 갈아낸 것인데 맛이 괜찮았다. 여기 아침 햇살이 따사롭다. 사람들은 아직 관광에 나서지 않았는지 관광객은 우리 뿐이다.  

순환로에서 골짜기로 한 10분쯤 비탈길로 구비구비 올라간 산밭이 있었다. 부지깽이나물과 미역취, 명이(산마늘)를 재배하는 산밭인데 경사가 심하고 범위가 넓어서 일하기 매우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길 중간으로 모노레일을 깔아서 어느 정도 불편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나물 밭은 잡초하나 없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 노인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풀을 매고 나물을 채취하여 레일에 싣고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산밭 아래에는 농장을 관리하는 집이 있고 나물을 삶아 내는 시설과 건조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생산한 깨끗한 나물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안내의 이야기를 들으면 농협에서 판매를 도와준다고 하니 세월도 많이 좋아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울릉도 주민들이 고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산나물 밭을 보면서 언뜻 스위스의 알프스 기슭에서 비탈에 초원을 만들고 거기서 소를 기르는 모습이 생각났다. 풀밭을 그렇게 깨끗하게 가꾸어 놓은 모습에 감동했었는데 여기가 바로 우리 나라의 알프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인간의 개척 정신에 의해서 결국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은 농민이나 기업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우리 같은 교직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은퇴를 하여 쉬고 있지만 뭔가 일을 찾아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좋고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노동이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힘이 닿는데까지 노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려오는 길에 밭둑에서 일하는 어느 노인의 구부러진 등을 보면서 더욱 그것을 느꼈다.

 

 

산나물 농장에서 나와서 퉁구미 터널을 지나게 되었는데 터널 앞에 신호등이 있었다. 길이 좁은데 터널이 길기 때문에 중간에서 차를 만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신호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울릉도에 있는 유일한 신호등이라고 해서 웃었다. 남양 터널이라는 터널을 또 하나 지나니 남양항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여기 계곡이 깊고 해안에 마을이 상상히 크다.계곡이 깊기 때문에 시냇물이 흐른다. 여기가 바로 서면 소재지이고 초등학교 중학교가 여기 있다고 하니 꽤 큰 마을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을 앞에 투구바위라는 큰 바위가 우뚝 서서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데 여기에 우산국 전설이 전한다고 한다. 남양 마을은 옛날에 우산국의 수도였던 것 같다. 옛날 우산국의 국왕인 우해왕이 여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나무 사자를  싣고 와서 우해왕을 위협하니 우해왕이 두려워 투구를 벗고 항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의 투구가 투구바위가 되고, 나무 사자는 사자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는 이렇게 역사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현재까지 그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념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파멸하고 만다. 우산국이 지금까지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조선 후기 울릉도를 개척할 때 점령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남의 나라를 점령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다면 여기는 1만명 정도의 국민을 가지고 있는 작은 국가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권을 가지고 와야 울릉도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울릉도는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려서 부유하게 사는 지상 낙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멀리 국수바위가 보인다. 제주에 있는 주상절리와 같은 화산 활동에 의한 암벽이다.

 

차는 달리다가 명승지가 나오면 대충 넘어갈 곳은 설명으로 넘어가고 중요한 곳은 정차하여 설명하고 더 중요한 곳은 하차하여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다. 사태감 터널을 지나고 버섯바위  곰바위 터널을 지났다. 곳곳이 다 명승지이다. 수충동 수충터널을 지나 만물상 전망대에 이르렀다. 만물상 전망대 민박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 차를 세웠다. 여기서 바다가 다 보였다. 여기는 1박2일팀이 촬영했던 장소라고도 한다. 여기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주인을 불러 산나물과 피데기(반건조 오징어)를 샀다. BS와 JS는 어린아이들처럼 강호동이 탔던 모노레일을 타며 즐거워한다. 여행은 사람들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사람들 마음을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여행은 결국 사람들을 천진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을 잊고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은 즐거운 추억을 남긴다. 여행 중에도 이렇게 섬여행이 더욱 그렇다. 해외 여행은 왠지 쓸쓸하고 피곤한데, 국내 섬여행은 현실을 떠나 탈속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홀가분하다. 그러나 늘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 현실의 끈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사이에도 부지불식간에 우리들 마음에 매달려 있다. 나물을 사는데 언니를 생각하고, 이웃 친구를 생각하고, 피데기를 사는데 자식들이 오징어를 좋아하는지를 기억해 낸다.

 

태하리에서 조선 고종 때 울릉도 개척의 선구자 이규원 검찰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이규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신라의 장수 이사부가 울릉도를 개척한 이후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울릉도 사람들을 본국으로 소개하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울릉도에서 살지 못하게 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큰 잘못이었나 후회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조선 말 고종대에 이르러 울릉도를 개척하기 시작한 일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고종은 1882년 그 해 검찰사 이규원을 보내 울릉도가 사람 살기에 적절한지 타당성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타당성이 인정되어 개척령이 내리고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주, 영일군 인근 사람들이 많이 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규원은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임금이 믿어준 만큼의 고초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암벽 해안를 돌아 걷기도 하고 원시림을 헤치고 산을 넘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에 이규원의 개척일기를 몇 편만 적어 본다. 당시엔 길도 제대로 없었을 터인데 도보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성인봉까지 오르고, 노를 저어 울릉도를 한바퀴 돈 것을 보면 이규원이 정말 성실하게 일을 수행했다고 생각된다. 역사는 성실한 일꾼에 의해서 개척되지만, 그의 이름으로 기록되기는 어렵다. 역사는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된다. 나는 40년을 교직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1000불 소득, 10억불 수출'이 목표였던 70년대를 넘어 2만불 소득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오늘날 경제적으로 대국을 이룬 이 나라가 평교사의 공적이었다고 기록된 역사는 없다. 대신 역사적 책임도 없다.

 

  

4월 7일

고종(高宗) 19년(1882년) 4월 7일 왕에게 인사를 하고


4월 10일

4월 10일에 등정(登程)하여 육로를 통해 원주(原州) - 평해(平海) - 구산포(丘山浦)에 4월 27일 도착하였다. 구산포는 평해읍에서 약 십리가 되는 곳이며 여기서 항해준비를 하고 순풍을 기다렸다.

 

4월 29일

4월 29일 이날 비로소 순풍을 얻어 구산포를 떠나 울릉도로 향해 배를 출발시킨 바 배 3척에 나누어 탄 일행은 다음과 같다.

검찰사(儉察使) 이규원(李奎遠)

중추도사(中樞都使) 심선완(沈宣琬)

군관출신(軍官出身) 서상학(徐相鶴)

전수문장(前守門將) 고종팔(高宗八)

착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유연우(劉淵祐)

기타역원소격(其他役員沙格) 등 82명

포수(砲手) 20명


이날에 배 3척이 동시에 출항하여 항해를 계속하던 중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갑자기 바람이 강해지고 파도가 크게 일어 선체가 심하게 요동을 하는지라 크게 두려워하였으나 다시 순풍을 얻어 밤낮으로 항해를 계속하였다.


4월 30일

4월 30일 이날 아침 8시경이 되어 울릉도 서쪽 해변에 배 3척이 함께 도착하니 포구의 지명은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 학포)다. 바닷가에 움막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맞이하기에 뭍으로 내려와서 물어보니 , 전라도 낙양(樂陽) 삼도(三道) 사람 김재근(金載謹)이 데리고 온 자 스물세명이 조선(造船)과 벌목(伐木)에 종사하고 있다. 이날 일행 전원은 배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풍랑이 일어 선체가 요동하므로 모두 배에서 내려 전라도 사람의 배 움막에 머무르며 잠을 잤다.

검찰사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작성자 http://blog.naver.com돈마니

 

태하리에는 울릉도 심층수 공장이 있다. 대아에서 하는 기업인데 제법 큰 공장이다. 기사는 여기를 공장지대라고 했다. 울릉도는 섬지대이기 때문에 물이 귀할 것처럼 생각되지만 물은 충분하다고 한다. 산에서 솟아나는 물이 울릉도 사람들이 실컷 쓰고 남을 만큼 물이 충분하고 그 수질도 매우 좋다고 한다. 어쩐지 여관에서 몸을 씻을 때 물이 마치 백암 온천에 들어갔을 때처럼 매끄럽고 좋았다. 그것도 울릉도 사람들의 복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초등학교 분교가 있고 근처에 성하신당이 있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 준다고 한다. 성하신당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많이 있기에 여기서 생략한다. 이곳에 또 신기한 것은 울릉도 공설운동장이 있다는 사실이다. 공설운동장이 제법 큰 규모이다. 이렇게 큰 규모의 운동장을 만들기 위해 부지를 장만하는 일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태하에서 해안으로나가는 골목에 자장면집이 세 군데나 되었다. 이곳이 바로 울릉도의 차이나타운이라고 우스개소리를 해서 모두 웃었다. 해안으로 나가니 거기가 바로 태하 해안 산책로이다. 여기서 차를 세우고 산책로 입구까지 걸었다. 산책로 입구로 들어가는 곳은 나선형 사다리가 있어 재미있게 올라갔다. 광장에는 음료수를 파는 가게가 몇 군데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더덕막걸리를 한잔씩 마시고 음료수를 사서 기사에게도 대접했다. 산책로 입구에 황토굴이 있는데 다른 흙과 달리 유난히 붉은 황토이다. 화산 작용으로 응회암이 형성되었는데 황토의 붉은 색은 응회암에 포함된 철 성분의 산화작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울릉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이 황토를 조금씩 가져가서 그 증거로 삼았다고도 한다. 해안 산책로는 주로 목제 잔도를 조성해 놓았는데 매우 멀리까지 갈 수 있으나 전망대처럼 높은 곳에서 멀리까지 보이므로 중간에 내려와서 다음 코스로 향했다.

 

현포항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차를 세우고 주변의 경관을 다 구경했다. 노인봉 주변의 바다를 둘러 보았다. 현포항 등대에 차를 세우고 등대까지 걸어 보았다.

 

울릉도 영추산 성불사는 일본으로부터 우리 땅 독도를 지키기위해서 세운 사찰이라고 한다. 대한 불교 조계종 종단 소속이다.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스님들이 부지런한지 경내를 깔끔하게 가꾸어 놓았다. 절집 뒤를 감싸고 있는 영추산은 송곳봉이라고도 하는데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리뻗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일제 때는 일본인들이 저 바위 꼭대기에 쇠말뚝을 세 개나 박았다고 한다. 쇠말뚝을 다 뽑지는 못했으나 뽑아내려는 노력은 계속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 놈들이 쇠말뚝을 박는 이유는 정기를 끊어버린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한 편으로는 우리 민족의 패배의식을 역이용한 의미도 있는 듯하다. 나라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쇠말뚝을 박았기 때문에 의당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믿고 자포자기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주저앉아 다시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일본은 그것을 노렸을 것이다. 일본인은 교묘하고 악랄한데다가 영악하기까지 하다. 쇠말뚝이 있어 정기가 훼손된다면 지금 봉우리마다 있는 송신탑은 얼마나 나라의 정기를 훼손할까?

 

영추산(송곳봉)은 산의 일부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 신비스럽다. 경내에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이 관광객으로 다른 절과는 좀 다르게 특이한 절집에 대해 신비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내는 서둘러 약사여래불 앞에 삼배를 드리고 나도 선채로 삼배를 드렸다. 부처님의 바람대로 이 나라에 풍랑이 일지 않기를 발원했다.

성불사와 송곳봉 전경

 

사설 식물원이라는 예림원을 돌아 가수 이장희가 만들어 놓은 울릉천국에 들렀다. 아담한 골짜기 큰 바위 아래 작은 집을 짓고 정말로 천국을 만들어 놓았다. 연못을 파고 연못에는 수련이 피었다. 바윗돌에는 친구들의 사인이 새겨 있고 정말로 천국같이 만들어 놓았다. 부러웠다. 군에서 만들어 주었는지 작은 연주회를 할 수 있는 공연장도 있었다. 무대가 있고 객석이 있는 그야말로 낭만적인 공간이다. 꽃이 피는 봄날이나 지금같이 단풍이 드는 가을 해가 설핏할 무렵 여기서 연주회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송창식이나 이장희가 기타를 치면서 우수어린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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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울릉국화라는 꽃이 활짝 피었다.  산은 단풍이 들어 아름답다. 그냥 여기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관리인인지 커다란 개를 데리고 주변을 산책한다. 그런데 아뿔싸 여기서 카메라 메모리가 끝이 났다. 또 나를 원망한다. 청주 주변 산행을 할 때는 커다란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느라 고생하면서 3박 4일이나 되는 여행에 왜 요렇게 간이 카메라를 들고 왔나. 사실 사진도 쓸만한 게 없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부터는 네 명이 가진 스마트폰에 의지할 수밖에 ----.

 

우리는 울릉천국에 한참을 머물렀다. 이장희씨 뿐 아니라 송창식씨, 김세환씨, 조영남씨, 윤형주씨, 그리고 연예기자였던 이상벽씨, 이들의 우정과 음악생활에 대하여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사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세대이다. 우리가 고등학교나 대학 다니던 70년대 대중음악을 선도한 이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암울했던 70년대를 살지 않았는가? 나는 그 시대 벽지학교 교사로서 국립대학 출신으로 의무연한에 묶여 목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살았다. 벽지 청년들에게 중학교 강의록으로 야학을 열었다가 얼마나 많은 눈총을 받았던가? 그들의 노래를 벽지 면소재지 술집에서 큰소리로 부르면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단양에 출장 갔다가 해가 저물어 의풍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영춘 태화여인숙이라는 곳에 묵으면서 영춘학교에 있는 친구들에게 술을 얻어 마시면서 강가를 헤매면서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질러댔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것도 교사라는 신분으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어린 나이 혈기 왕성한 나이에 '스승의 길'이라는 굴레 때문에 얽매여 있을 때, 송창식은 장발을 하고 기타를 치면서 피리부는 사나이, 왜불러 같은 노래를 질러댔다. 그 당시 그들은 우리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노래로라도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불타는 청춘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불꺼진 창 같은 노래를 울릉천국에서 불러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주변에 불타는 단풍을 보면서 당시에 안경이 반쯤 덮이고, 뒷머리가 양복 깃을 덮도록 장발을 하고 방학 때만 되면 시내의 뒷골목으로만 다니던 생각이 났다. 장발을 경찰에게 적발되면 대로상에서 교사든 공무원이든 머리에 고속도로를 냈던 기억이 나서 피익 웃음이 나왔다. 울릉천국에 모인 이들은 60이 다 넘은 지금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한평생은 마찬가지인걸 지지고 볶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규범에 매어 살아온 40년 교직 생활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울릉천국에서 내려오니 새삼 절경이 마음에 없다. 그래도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아주 작은 죽암 몽돌 해변을 지나 딴바위를 지나 삼선암을 보았다. 삼선암은 두루봉 아래 선녀탕에서 목욕하던 선녀가 하늘의 벌을 받고 바위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딴바위는 자기는 삼선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에서 딴 바위라고 한다. 고나선 터널 바로 앞에 관음도로 가는 다리가 있으나 공사관계로 폐쇄되었고 여기서 저동 쪽으로 해안 산책로 공사가 있어 길이 막혀 버렸다. 공사가 끝나면 해안 순환도로가 생겨 걸어서 울릉도를 한 바퀴 돌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다시 한번 올까?

 

우리는 차를 돌려 내수전 일출 전망대까지 갔다. 여기서 죽도가 내려다 보인다. 죽도를 지나 멀리 날씨가 좋은 날은 독도가 보인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간식을 먹은 다음 울릉 둘레길을 바라보면서 내일 일정을 구상해 본다. 그러나 오늘 성인봉 등산을 마치면 내수전 둘레길을 걷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는 그러지 말고 도동에서 저동까지 이어지는 행남 해안 산책길을 걷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참 좋은 기사이다. 여기까지 안내를 또 부탁하면 자기 일거리가 생기는데 참 솔직하다. 이런 분들이 잘 사는 나라가 좋은 나라인데 싶었다.

 

차를 돌려 좋은 길을 버리고 아주 두메 45도 이상되는 비탈길은 내려와 나리분지로 향했다. 나리분지는 분지 내부가 온통 불타는 듯하다. 알봉을 비롯한 주변 산들이 단풍이 한창이다. 성인봉으로 가는 입구까지 갔다가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았다. 기사는 여기서 돌아가야 한다. 친절하게 안내해 준 기사에게 점심 대접을 하고 싶었다 극구 사양하는 그를 졸라 나리분지 야영장 식당이라는 곳에 갔다. 난로를 피웠다. 산채비빔밥은 1인분이 8,000원이라고 한다.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 지금부터 4시간 혹은 5시간을 걸어야 한다. 반찬이 모두 맛있다. 비빔밥을 먹으면서도 산마늘 초절이를 계속 주문했다. 식당 남자는 친절하고 부인은 따뜻하고 정중하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아 마치 4촌 여동생 집에 밥 먹으러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리분지 민박야영장 식당 :054-791-0773, 011-5530 270)

 

나리분지는 울릉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었다 해안도로에서 홍살문을 지나니 둘레 산봉우리들이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분지를 사고 있고 홍살문은 소왕국으로 들어가는 성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분지 안에 넓은 농토들이 많이 유휴지가 되어 잡초가 무성한 곳이 여기저기 보인다.. 여기에 와서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도 관광객을 맞기 위한 식당이나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모양이다. 정부에서 이런 곳에 농사 짓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시책을 세워 제공한다면 여기 많은 농민들이 특용작물을 농사지을 수 있고, 그렇게 농가의 소득을 올리고 관광자원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여기와서 사는 사람들도 도동으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든 아까운 땅이란 것만은 틀림없다.

 

나리분지에서 바라본 농토와 단풍 든 산봉우리

 

2. 성인봉 등산

성인봉 등산은 정확하게 12시 정각에 나리분지 성인봉 입구에서 시작하였다. 우리는 스틱을 키 높이로 조절하고 배낭을 고쳐 맨 다음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리분지 원시림을 걷기 시작했다. 원시림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숲은 단풍이 들어 곱기도 하고 말할 수 없이 깨끗했다. 우리는 큰 소리로 말할 수 없어 아주 조용히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이 순하고 경사도 없어 완만하다. 그러다가 성인봉 원시림 천연기념물 표시탑부터 서서이 경사가 시작되더니 드디어 나무 계단이 나왔다. 나무 계단은 아주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계단이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계단 사이의 너비가 우리 보폭과 꼭 맞고, 높이 또한 힘들지 않을 만큼의 높이였다.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다. 게다가 주변 단풍이 곱기 이를데 없다. 단풍은 높이 올라갈수록 멀리 볼 수 있고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우리는 계속 형형색색의 단풍에 탄성을 올리면서 올라가니 어느새 알봉 전망대에 이르렀다. 알봉전망대는 알봉에 있어서가 아니라 알봉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그렇게 이름 지은 것 같았다. 여기서 드디어 부부인지 한 쌍의 남녀를 만났다. 우리는 물을 마시고 쉬면서 아내가 준비해 온 초콜릿을 먹었다. 전망대에서는 나리 분지를 두르고 있는 산봉우리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산은 그냥 불타고 있다. 카메라가 없어 각자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자연은 이렇게 아름답다. 여기 서서 계절마다 풍경을 그려 보았다. 봄 풍경도 아름답겠지만 눈이 많이 내린다는 겨울 풍경은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알봉전망대에서 정선생님 부부 - 비빔밥은 똑 같이 한 그릇씩 먹었는데

 

전망대부터는 약간의 오르막이 있은 다음 능선을 걸었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을 올라 도동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지 능선에 올라서니 내려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모두 도동에서 나리분지로 넘어간다고 했다. 아니면 도동에서 성인봉을 올라 다시 도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는 것 같다. 성인정이라는 약수에서 목을 축였다. 우리가 가져온 음료수도 있지만 이름이 성인정이라니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 물맛이 그만이다. 여기서 몇팀이 성인봉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직도 멀었다면서 엄포를 놓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도상으로 그렇게 멀지 않음을 나도 알고 있었다.

 

다시 날망에 올라 왼쪽으로 10여분 올라가니 바로 성인봉 정상이다. 오후 2시 5분이다. 나리분지에서 2시간 5분이 걸린 것이다. 정상에서 조망은 그렇게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동단의 정상에 올랐다는 감격에 가슴이 멍멍했다. 정선생님이 어디에서 태극기를 가져와서 우리는 태극기를 흔들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정상석 아래 내려와서 배낭을 풀어 정상주를 마셨다. 소주를 두어 잔씩 마시니 가슴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나는 이 감격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어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냈다. 바로 답이 온다. 참 좋은 세상이다. 성인봉 정상에 선 나의 모습이 서울과 청주에 있는 아이들이 바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스마트한 세상인가?

 

 

하산길은 경사가 더 급하다. 애초에 kbs중계소나 대원사 코스로 내려오려고 했었는데, 울릉도 현지인이라는 여인이 안평전 코스가 내려가기 좋으니 반드시 그쪽으로 내려가라고 한다. 다시 지도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안평전 코스를 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안평전 코스는 산행거리는 12.8km로 가장 짧지만 도동까지 시멘트포장길을 걸어야 했다.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동네 주민들이 40분이면 걸어가는데 뭣하려 택시를 부르느냐고 힐란이다. 그도 그럴 듯 싶었다. 시간이 넉넉하니 걸으면서 울릉도를 더 만끽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시간 산행에서 아프지 않은 무릎과 발을 여기서 다쳤다. 피로감이 말도 못한다. 차라리 대원사(14.1km)쪽으로 내려오면 한 2km를 산길을 걷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덜 걸을 수 있는 것을 그랬다. 그러나 그 바람에 사동항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고 도동에서 사동쪽의 경치를 만끽하였다.

 

거의 40여분을 걸어 도동에 도착했다. 도동에 도착해서는 낮에 운전기사가 말해준 대로 골짜기 길을 따라 내려오니 바로 마을 끄트머리에 닿았다. 여기서 오늘은 울릉도 약소구이로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두리번거리며 괜찮을 것 같은 약소구이집을 찾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별로 없는 어느 식당으로 들어 갔다. 1인당 21,000원이다. 우리는 소주 네 병을 비웠다. 왕년의 개신동 각 1병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피로가 가시는 듯하다.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없는 걸음으로 여관으로 내려왔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오늘 잠자리 약주는 생략하기로 했다.

 

3. 감회

울릉도 마지막 밤을 이렇게 보낸다. 울릉도에 와서 독도를 밟고 성인봉까지 밟았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갈 수 없다는 독도, 그리고 성인봉을 한꺼번에 다 밟아 본 것이다. 더구나 성인봉을 나리분지에서 시작하여 도동으로 내려왔으니 울릉도를 종주한 것이다. 하루에 울릉도를 거의 한 바퀴 돌고 그리고 가로지른 것이다. 하늘이 돕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백두산은 백번 가서 두번 보면 잘 보는 것이라고 백두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번에 우리가 밟을 수 있는 천지 주위 반 바퀴를 돌았다. 한라산은 두 번이나 가서 한번은 백록담 옆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야영했다. 한번은 3m 폭설을 밟고 올라가 찬란한 햇빛을 보았다. 울릉도는 이렇게 한번에 다 보았다. 하늘에 감사했다. 속이 후련하다. 엷은 피로의 쾌감을 느끼며 잠자리에 누워 내일 일정을 생각해 본다. 이제 큰 욕심을 내지 않으리라. 이렇게 좋은 울릉도, 내년 봄에 다시 한 번 오리라 마음 먹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와서 보는 것이 우리땅이라는 확신이 더 굳게 선다. 모두에게 권한다. 여행사에 맡길 것도 없이 이렇게 계획해서 오면 되는 것이다. 그냥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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