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전북 완주군 모악산

느림보 이방주 2009. 11. 19. 12:54

2009년 11월 22일

 

1. 간 곳 : 전북 완주군 모악산(794m)

2. 코스  : 금산사 주차장-금산사-금산사 부도전-심원암-정상 삼거리 헬기장-모악산(794m)- 쉰길바위-장근재-배재-청룡사-금산사 주차장

3. 함께 간 사람 : 백만사 회원 8명 (이용원 부부, 정우종 부부, 이효정 부부, 이방주 부부)

 

 

오늘은 백만사(백두산에서 만난 사람들)가 산행하는 날이다. 지난 10월에 춘천 삼악산을 잔뜩 기대하다가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이 생겨서 가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 산행이 어긋날까봐 조바심을 하였다. 출발하는 날까지 아무일도 없어 다행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새로 신차를 구입한 정우종 선생님이 차를 가져 간다고 해서 나는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더 한가하다. 

 

아침 7시 40분에 아파트 앞에서 정우종 선생님 새차를 타고 산남고등학교 교직원주차장으로 갔다. 차는 아무 소리도 없이 흔들림도 없이 굴러 간다. 얼음판에 미끄러지는 듯하다. 잠시 동안 부러웠다. 그래서 갑자기 머리가 혼란하다. 그러나 11년을 함께 지낸 내 무쏘를 배반할 수는 없다. 8시가 되자 회원들이 모두 모였다. 남자들은 이효정 선생님 차에, 여자분들은 정우종 선생님 차에 탔다. 신차는 누가 운전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원거리를 갈때는 늘 하던 대로 했을 것이다.

 

차는 청원 IC로 진입하여 회덕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약속대로 여산 휴게소에서 한 번 화장을 고치었다. 그런데 여산 휴게소는 한참 공사중이었다. 그래서 주차 공간이 좁고 어지럽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신 다음 쉼없이 달려 금산사 나들목으로 나와서 금산사로 들어갔다. 금산사 쪽으로 가면서 전에 모악산 등산을 해본 적이 있는 이효정 선생님이 모악산을 알려 주었다. 먼데서 보기에 꽤 높아 보인다. 정상에 있는 통신 시설이 먼 데서도 보인다.

 

  <모악산>

전라북도 김제시와 완주군 경계에 있는 산.


높이 793m이다. 전주시 남서쪽 12㎞ 지점에 위치하며, 아래로 김제평야와 만경평야가 펼쳐진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어 ‘모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남평야의 젖줄 구실을 하는 구이저수지·금평저수지·안덕저수지와 불선제·중인제·갈마제 등의 물이 모두 이 곳 모악산으로부터 흘러든다.


정상에 올라서면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으로는 내장산, 서쪽으로는 변산반도가 바라다 보인다. 동학농민운동과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큰 나무는 거의 베이거나 불에 타 사라졌지만, 4월에 피는 벚꽃과 배롱나무 꽃은 장관이다.


예로부터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新都安), 영주시 풍기읍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명당(名堂)이라 하여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각종 무속 신앙의 본거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신라 불교 오교구산(五敎九山)의 하나로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된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대원사(大院寺) 등의 사찰이 있다.

1971년 12월 산 일대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금산사미륵전(국보 62), 금산사석종(보물 26), 금산사대장전(보물 827), 귀신사대적광전(보물 826)

 

<등산 지도>

 

 금산사 주차장에 10시쯤에 도착하였다. 전에는 주차요금을 받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요금소가 비어 있다. 주차장에는 버스가 몇 대 있고 승용차도 있었다. 그래도 주차장은 많이 비어 있다. 우리가 좀 일찍 도착한 편인가 보다. 멀리 우리가 가야 할 산의 정상과 등마루가 보인다. 아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알지도 못하고 아득하기만한 산을 올라야 하는가? 대답은 없다. 누군가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금산사 진입로를 따라 걸어 갔다. 진입로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진입로는 아주 평탄해서 걷기에 좋다. 청주는 가로수들이 이미 잎떨구기를 끝냈는데 여긴 아직 단풍이다. 인도에나 차도에는 낙엽이 뒹군다. 잎은 아직도 붉거나 노란 빛을 잃지 않았다. 단풍나무는 아직도 붉은 채 그대로이다. 주변에 보이는 낮은 산기슭은 아직도 울긋불긋하다. 11월 초쯤으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다. '母岳聖地'라는 글을 새긴 큰 돌이 보인다. '母岳'이란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어머니를 뜻하는 글자와 험한 산을 뜻하는 글자가 어울려 산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정상에서 장근재 쪽으로 가다보면 쉰길바위라는 절벽이 있다고 한다. 그 바위로 인하여 옛부터 엄뫼, 큰뫼로 불려져온 모악산은 이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과 같아서 모악산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금산사 주차장

 금산사 들머리에서

 모악산 산행지도

 

립공원 입장료는 없어졌지만 문화재 관람료는 받았다. 정문을 통과하여 한참을 걸어가니까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이 나왔다. 여기부터는 딴 생각을 하지 말자. 여기는 속세가 아니라 이미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성속이 다르지 않음을 표방하는 것이 바로 불가의 생각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둘이 떠받치는 맞배 지붕이다. 기둥은 양쪽에 하나씩이다. 어마어마하게 굵다. 聖俗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문이다. 보통 사람은 일주문을 통과하지 않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다.

 

금산사는 내려오면서 들르기로 했다. 금산사 옆으로 난 길은 등산객 뿐만이 아니라 심원암이나 청룡사로 올라가는 신도들이 다니는 길인 모양이다. 차량이 몇 대 오르내린다. 길 양쪽에 단풍이 아름답다. 아랫녁이라 아직 단풍이 남아 있는 것인지 미륵사찰인 금산사 부처님의 은혜로 아직도 단풍인지 아니면 모악산의 어머니 품에 안긴 모악산 계곡이라 따뜻함이 남아 있는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우리는 금산사의 웅장한 절집이 붙잡는 소매자락을 뿌리치고 심원암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금산사>

 

소 재 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가 대가람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이라는 대사구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대공전·광교원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이 재건의 역사를 벌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 때에 이르러 미륵전·대장전·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금강문·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은 혜덕왕사 이외에도 도생승통·원명·진묵·소요·남악 등 대사가 거쳐 갔거나 죽거나 하였다.

 

주요 건물

미륵전(국보 62)·

대적광전(보물 476)·

대장전(보물 827)·

명부전·나한전·일주문·금강문·보제루 등과, 방등계단(보물 26)·

5층석탑(보물 215)·

6각다층석탑(보물 27)·

석련대(보물 23)·

당간지주(보물 28)·

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24)

 

 일주문을 향하여 걷고 있는 백만사 회원들

 금산사 옆으로 난 길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아름다운 단풍길

 

심원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지 않다. 심원암으로 가는 길에 금산사 부도전이 가까이 보인다. 주변에 아직도 푸른 산이 잘 어울린다. 가운데 참 어울리지 않게 플라스틱(이름을 뭐라고 하나?)으로 지붕을 덮어 보호하는 것이 보물 24호인 혜덕왕사진흥탑비라고 한다. 보물 보호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이다. 일을 쉽게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물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역사의식만 있어도 저렇지는 않을 것이다. 씁쓸하다. 

 

올라가는  길에 붉은 감이 파란 하늘에 아름답다. 감은 잎을 다 떨구었을 때 아름답다. 청주에서는 감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이미 홍시로 변했는데 여긴 아직도 싱싱하다. 껍질을 벗겨 매달면 바로 곶감이 될 것만 같다. 심원암 가는 길에 한 200m 쯤 곁길로 올라가서 연리지를 보았다. 소나무 가지 하나가 옆의 소나무로 파고 들었다. 꼭 19세 이하는 관람 불가로 지정해야 할 정도로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심원암으로 가는 길 양 옆은 완전히 소나무 숲이다. 심원암은 그야말로 절간같이 고요하다. 붉게 익은 감만 파란 하늘에 법석이다. 마당에도 법당에도 스님은 자리를 비웠다. 마당에는 관세음보살님 혼자서 합장을 하고 중생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관세음 보살님은 세상의 아픈 소리를 다 듣고 어머니처럼 자상한 손길로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실 것만 같았다.

 

절집 옆 감나무 아래서 과일을 먹었다. 나는 얼른 바나나를 내놓았다. 그래서 짐을 덜었다. 아침 식사를 일찍해서 그런지 출출했다. 사실 여산 휴게소에서 호떡을 사먹고 싶었는데 호떡집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짊어지고 온 바나나가 꼭 일곱개였다. 나누어 주다 보니 한 개가 모자라다. 내가 그냥 참아야 한다. 이럴 때가 참 곤란하다. 뭐, 먹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섭섭할 것도 억울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남들이 맛나게 먹고 있는데 어떻게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지를 정하지 못한다. 차영미인가 누군가의 시에서 그런 걸 읽은 적이 있다. "순대국밥집에서 남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혼자 국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고독을 알겠느냐?"  그렇다면 바나나를 나누어 주다가 내것 하나가 모자라는 경우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어색함을 알겠는가?  그 어색함을 아는 아내가 먹다가 반을 주었다. 얼른 받아서 불편한 얼굴을 씻었다. 

금산사 부도전

 하늘에 붉은 공을 툭툭 던져놓은 것과 같은 감

                 연리지 

 

연리지 앞에서

 소나무 숲길을 걷고 있는 백만사 회원들

 편백나무

 심원암 앞 이정표

 심원앞, 푸른 하늘, 붉은 감, 회원들 

 나무관세음 보살

 절집과 감나무

 

심원암에서 정상까지는 3km이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이다. 적어도 12시 반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심원암에서 정상으로 가는  등마루로 오르는 길은 매우 잘 가꾸었다. 양쪽에는 활엽수들이 이미 잎을 떨구었고 그 아래 산죽만이 푸릇푸릇하다. 산죽은 우리 고향집뒤 울타리에 난 대나무처럼 키가 크다. 대나무 사이를 걷는 운치도 견줄 데 없다. 능선 안부에 올라 배를 먹었다. 시원하다. 달다. 물이 많다. 여기까지 올라 오는 길에 산성의 흔적이 있다. 성인지 건물이 있던 자리의 축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삼거리인데 심원암에서 우리가 올라온 길보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연리지 쪽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낙엽이 매우 운치있게 흩어져 있다.

 

우리는 다시 산죽이 우거진 숲을 지나 정상을 향해 걸었다. 가파른 길도 여럿이 가니 고단하지 않다. 우리도 일찍 출발했는데 벌써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햇살이 퍼진다. 날은 매우 따뜻하다. 등산하기에는 최적이다. 모두 자켓을 벗고 셔츠 바람으로 걸었다. 한 날망에 오르니 정상이 가깝다. 여기서 소주 파티를 했다. 삶은 계란을 안주로 산 위에서 마시는 소주는 정말 일품이다. 나는 더 마시고 싶었지만 오르막길임을 생각해서 한 잔으로 만족했다.

 

정상 삼거리 헬기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해 보니 우리와 반대쪽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앉을 자리는 없다. 햇살이 따뜻하니까 모두들 그늘을 버리고 헬기장 너른 광장에서 식사를 한다. 전망이 좋다. 12시가 좀 넘었다.

 

우리는 한 날망을 더 올라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정상 바로 아래에도 넓고 한적한 곳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제일 좋은 자리를 선택하여 상을 차렸다. 집에서 조금씩 준비해 와도 여기서는 화려한 성찬이 이루어진다. 그래도 산에서는 라면이 인기가 있다. 나는 밥을 가져 왔으면서도 라면에 자꾸 눈이 갔다. 점심을 먹고 사과를 먹었다. 배낭이 아주 가벼워졌다.  

 

 산죽 사이로 잘 정비된 등산로

 키 높이로 높은 산죽 사이를 걷는다

 산죽

헬기장에서 

 김제의 너른 들

  

 삼각점

 누가 빠졌을까

 통신 시설

 

밥을 먹고 서둘러 정상으로 올라갔다. 소주도 한 잔씩 했기에 힘이 솟았다. 점심 먹으려고 앉으면서 신발을 벗을 때 갑자기 장단지에 경련이 일어났다. 풀리기는 했는데 계속 아프다.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갑자기 힘을 주어서 그런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르막길 계단을 밟으려니까 처음에는 아프더니 조금식 풀리기 시작한다.

 

정상에는 통신 시설이 있어 올라갈 수가 없다. 다만 나무 계단을 밟고 나무다리를 건너 북쪽 전주시가 바라보이는 쪽 철조망 사이로 정상석이 보인다. 그곳에 조금 널찍하게 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다. 사진을 찍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전망이 아주 좋다. 전주시가 다 보인다. 들판 가운데 있는 시내는 아주 작게 보였다. 그곳에 동동주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난번 운길산 산행 때 예봉산이간 하는 곳에서 먹은 것과 비슷했다. 사람들이 동동주 앞에 몰려 있다. 바로 돌아 나왔다. 여기에 사람들이 몰려서 오가는 길이 불편하다.

 

쉰길 바위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모두 나무 사다리로 놓아 걷기에 편하다. 그런데 모롱이를 돌아 노는데 회원 두 분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내외가 아닌 남녀 회원이 함께 사라져서 그 분들의 반쪽들이 몹시 불안해 했다. 전화를 걸고 찾고 하는데 전화를 받기는 하지만 위치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회장으로서 모임의 기강이 흩어지는 것은 아닌가 해서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돌아오기는 했는데 회원들의 질타가 보통이 아니었다. 없어진 분이 누군가 밝히기는 미래를 생각해서 매우 곤란하다. 그런데 그 분들은 우리가 점심을 먹은 헬기장으로 다시 내려갔었다고 한다. 올라오면서 이효정 선생님이 하산로를 잘 설명했는데도 착각을 한 것 같다. 일부러 한 탈선일까? 아니겠지. 정상 부근에서 파는 감로주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늘 있는 일이다. 멀리까지 삶의 길이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온 길이나 앞으로 갈 길이 다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만나서 길을 다잡아 통신시설 뒤편으로 올라갔다. 여기도 너른 공간이 있다. 헬기장이다. 사람들도 여긴 없다. 쉰길 바위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쉰길 바위는 쉰길이나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게 험하지 않다. 다만 이 바위 생김새 때문에 모악산이 되었다고 하니 의미 있는 바위가 아닐까?

 정상에서

 정상에서

 멀리 보이는 전주시

 헬기장으로 오르는 계단길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통신시설

 다시 산죽사이로

 

장근재를 지나 배재까지 가는 길은 매우 평탄하다. 잠시 내리막길이 있다가는 다시 평탄해지고, 또 한번 내리막길이 있으면 다시 평탄한 낙엽쌓인 길이 나타나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쉼없이 걸었다.

배재에서 한 번 쉬었다. 배재에서 청룡사까지는 비교적 가파른 비탈길이다. 그러나 힘들지 않았다. 지그재그로 낙엽길을 만들어 놓아서 운치가 있다. 한참을 내려오니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나온다. 청룡사 입구이다.

 

청룡사는 입구부터 어마어마하다. 입구 옹벽이 엄청난 공사이다. 시멘트 콘크리트를 하고 그 위에 대리석을 다시 쌓았다. 튼튼하기도 하고 보기도 좋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압감을 주었다. 청룡사는 한창 중수중인지 여러가지 재목이 쌓여 있고, 다듬는 중인 대리석이 창고에 가득하다. 요사채를 새로 짓고 마당을 넓힌다. 새로 짓는 요사채에는 스님들이 공부 중인지 접근을 금지하는 바리케이트를 쳐 놓았다. 대웅전이 앉은 곳은 그야말로 천혜의 명당으로 보였다. 뒤에는 암벽이 둘러싸고 암벽 위에는 아름다운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우거졌다. 앞으로는 금산사가 내려다 보였다. 모악산 산 줄기가 다 보였다. 마치 금수산 정방사가 생각난다. 그러나 정방사의 풍광을 따라가진 못할 것 같다. 이 절은 아마도 열악한 절이었는데 어느 뜻있는 신도가 불사를 일으켜 중수를 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풍이 떨어져 쌓인 내리막길

 청룡사 입구 소나무

청룡사 옹벽

 

 청룡사 관음전

 

<청룡사 관음전>

전각은 앞면 4칸, 옆면 2칸이며, 원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이고 주심포양식을 하고 있는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에는 지방문화재 제156호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관음전 내부에는 닫집 아래 화려한 수미단 위에 비로자나삼존불이 있으며, 그 앞에는 법상이 놓여 있다. 불화로는 왼쪽에 주칠 금분으로 그린 신중탱, 아미타9품탱, 오른쪽에는 칠성탱, 산신탱이 있다. 이곳이 용천암이었음을 알려주는‘용천암중창기’(불기 2520년, 1975년)에 시주자 명단이 있다

 

이곳에 한 일주일만 머물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물을 마시고, 찬물에 머리를 감은 다음 아름들이 소나무 숲을 거닐고 돌아와 마당가에 앉아 멀리 금산사를 싸안은 모악산 백호를 바라보면 세상 만사가 다 멀리 생각될 것이다. 특히 소나무가 좋고 앞이 틔여서 좋다. 산은 아직 단풍이다. 마당에는 메주가 볕을 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계의 사람이 아니다. 일주문을 나가야 한다. 더 머물 시간이 없다.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은행잎이 잎 떨구기를 시작했다. 괴산 원풍리에 갔을 때 삼관문 은행나무는 이미 낙엽이 지고 노란 빛깔조차 퇴색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은행잎이 날리는 하산로를 걷는 여인들

 

하산로는 아주 순탄하다. 내려오는 길에 금산사에 들렀다. 금산사는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웅장하면서도 아늑하다. 모악산의 좌청룡 우백호가 고스란히 감싸 안아서 바람도 맞지 않고 물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바로 몇백년이나 버티고 서있었는지 느티나무가 그 것을 잘 말해 준다. 금산사에는 보물도 많다. 당간 지주가 그렇고 미륵불전이 그렇다. 규모도 대단하고 그 아름다움이 비길 데가 없을 것 같았다. 미륵불전은 보수중이었다. 들어갈 수는 없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미륵이 어마어마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안쓰러울 뿐이다.  다만 봄이 오면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주변의 나무들을 보미 벚꽃이 필 때 쯤은 그 아름다움을 더할 것만 같았다. 종일 금산사에서만 보내도 볼 것을 다 보지 못할 것 같다.

 

<금산사 미륵전>

종목 : 국보 제62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수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금산사
시대 : 조선시대

무악산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처음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며,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로 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미륵전에는 3층 제일 위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있다. 미래불이다. 그런데 2층에는 용화지회라는 현판이 또 있다. 용화지회는 용화세계를 만드는 일꾼들이 모인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자보전은 미륵불을 한자로 표현하면 자씨보살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대웅전은 보통 사찰의 대웅전보다도 더 크고 웅장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내년에 다시 오기로 하고 절을 돌아나왔다.

 

 금산사 느티나무와 당간지주

 

 대웅전

미륵전

 

미륵전 앞에서

 석탑

 

돌아오는 차안에서 졸았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 운전하는 분의 어려움은 벌써 잊었다. 자다 깨니 미안하다. 산남고 주차장에서 오늘 참석하지 못한 이완호 선생님내외분과 만나 율량동 소주방에서 생굴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오늘의 산행을 끝낸다. 모든 삶의 찌꺼기가 다 빠져 나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