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김치와 우리

느림보 이방주 2008. 6. 1. 06:47
  정원에 어느새 녹음이 우거졌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이 작은 정원을 걷는 재미는 쏠쏠하다. “김치 주는 선생님!” 나의 사색에 끼어드는 아이들이다. 아직 내 이름도 전공도 모르는지 그렇게 부른다. 쌍꺼풀 없이 작고 예쁜 눈에는 열없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건 무슨 나무예요?” “산딸나무” “꽃이 예뻐요.” “그래 예쁘네.” “화나셨어요?” “아냐.” 그래도 속 좁은 선생은 조금 섭섭하다. ‘아가, 아무리 이름을 모른다 해도 미안해 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김치 주는 선생님이라니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표정이 너무 천진스럽다.

 

김치를 먹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이러다가는 김치가 식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구내식당에서는 도리질을 해대는 아이들 때문에 벌써 가감대로 쫓겨났다. 그래도 아직은 남아 있는 김치 먹는 아이들이 물결처럼 흐르던 배식의 행렬을 가감대 앞에서 가끔씩 멈추게 한다. 내가 처음 김치를 나누어주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이다. 위생복을 입지 않았어도 ‘감사합니다.’하고 미소도 보낸다. 가감대의 막힘은 금방 풀린다.

 

이틀 쯤 지났을 때 김치를 받아가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귀찮아서 그냥 돌아서려던 아이들이 식반을 내민다. 선생이 집어주는 김치를 부끄러워하던 아이들도 머뭇거리다가 돌아온다. 김치를 싫어하는 아이들만 돌아서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가감대 앞을 떠날 수가 없다.

 

김치를 들어 보이면 도리질하는 아이들이 아직은 많다. 안타깝다. 얄밉다. “아가 한 쪽만 먹어봐라.” 이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아이들도 있다. ‘김치를 먹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에 좋다. 그래야 배달겨레가 된다.’ 김치 장수처럼 이렇게 외치고 싶다. 한번 맛만 들이면 내가 여기 서있을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김치만큼 ‘우리’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음식이 어디 있겠나?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샐러드는 잘 먹으면서 김치를 먹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들은 마늘, 파, 생강, 고추에서 나는 매운 맛과 젓갈의 비릿한 냄새를 극복하지 못한다. 샐러드는 조리법이 단순한 만큼 맛도 단순하다. 우리 김치는 간장 된장과 같은 발효 문화의 산물이다. 잘 여문 배추 맛은 신비스럽다. 달콤한 듯 고소한 듯, 매콤한 듯 시원한 듯, 형언할 수조차 없다. 그런 배추에 생강이나 마늘, 파, 고추 같은 갖은 양념, 갓이나 채로 썰어 버무린 무에서 우러나온 국물이 매콤하고 야릇한 향에 시원하기까지 하다. 여기에 여러 가지 젓갈 같은 동물성 먹거리가 묘하게 배합하여 발효되어 감칠맛을 내는 것이다. 붉은 고추 국물이 푹 배면 색깔까지 먹음직스럽다. 거부감을 극복하면 도리어 그 맛에 취하게 된다.

 

김치는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김치를 곁들이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떡이나 빵 같이 팍팍한 음식에 곁들이면 침을 솟아나게 하여 부드럽게 먹을 수 있다. 김치는 양식에 곁들여도 좋고, 일식에 곁들여도 어울린다. 어떤 음식도 김칫국을 먼저 마셔야만 한다.

 

김치가 발효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젖산균은 장을 깨끗이 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김치의 효능을 잘 모른다. 김치 맛을 통해 지킬 수 있는 우리 얼이 더 소중하다. 김치는 순간적인 향과 맛으로 사람을 유혹하지 않는다. 김치맛과 향은 순간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김치는 깊은 맛과 그윽한 향으로 느릿느릿 우리의 혀를 매료시킨다. 김치의 은은한 맛이 바로 우리 민족의 은근과 끈기라는 정서의 바탕이 된다. 누구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덕의 씨앗이 된다. 단순한 조리법은 맛을 단순하게 하고, 단순한 맛은 정서를 단순하게 한다.

 

우리학교 구내식당에는 우리 농산물만을 들여온다. 특히 김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우리 땅의 기운과 우리 농민의 땀이 배어 있다. 그래서 더욱 김치를 먹어야 한다. 우리 땅의 기운을 받고, 만든 이들의 사랑을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김치를 먹어야 한다. 김치를 먹어야 우리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진정으로 우리의 정서를 가진 ‘우리’가 된다.

 

김치는 먹어 본 사람만이 맛을 안다. 맛을 아는 사람이 김치를 더 먹는다. 은은한 맛, 그윽한 향, 거침없는 어울림이 김치의 덕이다. 이제 김치를 받아 가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많이 주세요.’하는 아이들은 더 예쁘다. 학교에서 처음 김치를 먹게 되었다는 아이들도 있다. 집개를 든 손아귀가 뻐근하다. 아이들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 사랑스런 큰애기들이 속 깊은 여성의 덕을 쌓은 어른이 되어, 또 다시 우리 아이들에게 김치를 권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김치 먹는 아이들에게서 김치 향이 그윽하다. 나도 ‘김치 주는 선생’으로 불리는 것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과 나는 어느새 우리가 되었다. 산딸나무 꽃잎에 큰애기들의 잘 익은 웃음이 햇살처럼 하얗게 부서진다.  

                                                                                          (2008.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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