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아침에 캔 감자

느림보 이방주 2008. 6. 17. 06:27
 도반이라고 해도 좋은 지인으로부터 감자 한 상자를 받았다. 북바위산 정상에 올라 소나무 그늘진 너럭바위에 앉아 점심으로 먹으려고 배낭에서 시루떡을 꺼냈다. 막 김칫국을 마시려는 순간, 전화 메시지가 왔다. 오늘 아침에 캔 감자라고 한다. 벌써 목이 멘다. 뽀얗게 익은 감자 살이 입안 가득히 부서지는 느낌이다. 노릇노릇하게 눌은 한편으로 뽀얗게 터진 감자 살결이 눈에 선하다.

 

금방 캔 감자는 껍질이 잘 벗겨진다. 어린 시절, 비오는 날은 감자를 쪘다. 텃밭에 심은 감자는 몇 포기만 뽑아도 자배기에 그득하다. 금방 캐낸 감자는 껍질에 흙이 묻지 않는다. 큰애기의 볼 살처럼 뽀얗다. 향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샘가에 감자 자배기를 놓고 물을 부어 흙을 대충 씻어낸다. 그런 다음 자배기 밑바닥에 깔린 흙까지 씻어내고 장난하듯이 손으로 휘휘 저으면, 고 귀여운 감자알들이 저들끼리 몸을 부딪고 흠집을 내면서 얇고 투명한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더 세게 돌린다. 물을 가득 붓고 자배기 엉덩이를 슬쩍 들어주면 벗겨진 껍질이 동동 떠내려간다. 정말 벗기고 싶은 껍질만 벗겨진다. 살갗에 한 점 흠집도 나지 않는다. 감자알이 드문드문 뜨고 있는 눈알까지 껍질은 깨끗하게 벗겨진다. 달챙이로 다시 파내는 수고로움이 필요 없다. 그렇게 벗긴 감자알은 만져보면 만질만질하다. 그 유쾌한 느낌은 감자가 손에게도 내려준 고마운 반기이다.

 

이렇게 껍질 벗은 감자를 가마솥에 넣고 찐다. 감자를 찔 때는 물을 맞추기가 참 어렵다. 밥을 지을 때보다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마지막 감자가 물에 잠길 듯 말듯 물을 부으면 된다. 우리나라 가마솥은 어떤 음식을 하든지 물을 맞추는데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물을 자박자박하게 부은 다음 알이 굵은 천연 소금을 슬쩍 넣는다. 소금을 넣을 때는 누가 보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아주 적은 양을 팥죽에 들어 있는 새알심을 건져 먹듯이 슬쩍 넣어야 한다. 그래야 감자에 간이 밴 듯 만 듯 맛이 난다. 가마솥에 불을 지피면 김이 오르고, 눈물을 흘리고 하다가 노릇노릇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물을 제대로 맞추었다면 감자가 다 익은 것이다. 이 때 불을 더 세게 땐다. 냄새가 누릇누릇해진다. 때는 바야흐로 이 때다. 소댕꼭지를 움켜잡고 소두방을 한 번에 ‘확―’ 연다. 노르스름해진 연기인지 수증기인지 허공에 치솟는다. 감자가 익어 퍼지면서 속살이 튼다. 갈라진 살결에 하얀 분가루가 소보록하다. 맛은 물을 사이도 없다.

 

김칫국을 연신 마시면서 그토록 좋아하는 시루떡 맛을 모른다. 감자만 눈에 선하다. 박쥐봉에 녹음이 짙다.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청주까지는 한시간 반은 걸린다. 운전이 익은 길이라 때때로 깜빡깜빡 졸았다. 그 때마다 분가루 하얗게 터진 감자 살결이 보였다.

 

함께 저녁 먹자는 친구를 뿌리치고 현관을 들어서니, 감자 상자가 이미 와 있었다. 감자알이 꼭 고만하다. 꼭 옛날 그런 살결이다. 자배기가 없으니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아 옛날 흉내를 내보았다. 좁은 바가지 안에서 감자가 춤을 춘다. 여기엔 이런 가난도 있다. 에라, 껍질은 그냥  벗기자. 찜 냄비에 넣고 물을 꼭 고만하게 부었다. 가마솥하고 모양은 다르지만……. 아내가 볼세라 슬쩍 부뚜막의 소금을 집어넣었다. 가스레인지이지만 불을 붙였다. 제법 노릇노릇한 냄새가 난다. 슬쩍 뚜껑을 열어 보았다. 잘 되어간다. 괜히 열었다. 불을 최대로 돌렸다. 냄새가 누릇누릇해진다. 무겁지도 않은 냄비 뚜껑을 ‘확― ’열었다. 감자가 퍼진다. 갈라지는 게 보인다. 하얗다. 제 맛이다. 아침에 캔 감자, 그래서 제 맛이다.

 

저녁에는 감자찌개를 시도했다. 어린날 어머니가 텃밭에서 감자 캐고, 앞밭에서 풋고추 따고, 뒷밭에서 파를 뽑고, 장독에서 고추장 떠다가 끓인 감자찌개, 바로 그 맛에 도전한다. 감자를 또 벗겼다. 네 알이면 된다. 양파를 깠다. 한 알이면 된다. 풋고추를 찾는다. 그놈 참 실하다. 두 개면 충분하다. 대파를 찾았다. 한 줄이면 된다. 진부령 황태포 있나? 아내가 내놓았다. 마늘을 찾았다. 도마에 놓고 식칼 손잡이로 뒤끝으로 톡톡 바수었다. 준비는 끝이다. 과연 맛이 날까?

 

우리 농산물만 판다는데 이름만은 국적을 잃어버린 NH농협물류센터에서 반짝 세일할 때 일천 원에 사온 노랑양은냄비를 찾았다. 그래야 제 맛이 난다. 노랑양은냄비를 불 위에 놓고 달구었다. 금방 화기가 돈다. 냄비 달아오르듯 한다. 들기름을 넣고 네 도막 낸 감자 조각을 넣고 달달 볶는다. 거죽에 말갛게 화상을 입는다. 이때 물을 붓는다. ‘치지직―’ 고향 냄새를 내며 운다. 파와 양파만 빼고 이것저것 다 넣는다. 고추장을 푼다. 고춧가루를 색깔 좋게 넣는다. 집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금방 끓는다. 비오는 날의 툇마루 냄새가 난다. 양파도 넣고 파도 넣는다. 찌개 냄새가 일상의 권태를 극복한다.

 

금방 캔 감자는 찌개에서도 하얀 분을 낸다. 온몸에 고추장 물을 들이고도 꼭 하얀 분가루 같은 맛이다. 따끈따끈한 정이다. 우리 음식의 맛이다. 옛 어머니 맛이다. 잃어버린 옛정이 살아온다. 아침에 캐내어 서둘러 보냈기에 식지 않은 정이다. 이 시대에는 보기 힘든 따뜻하고 노릇노릇한 정이다.

 

이제 간장에 졸임도 하고, 채로 썰어 볶아도 먹고, 납족납족 썰어서 수제비에도 넣고, 반쪽씩 나누어 마른새우아욱된장국에도 넣고, 한두 개씩 밥에도 얹어 먹으리라. 

 

감자 상자를 번쩍 들어 다용도실 습하지도 않고 볕도 들지 않는 곳에 펼쳐 놓았다.  나도 이제 부자가 되었다.

                                                                                                                    (2008.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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