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토요일이라 수업이 없어서 구룡산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에 걸어서 출근한 다음 10시 40분 쯤 해서 이효정 선생님과 뒷산에 올랐다. 수자원공사 배수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서 흰돌교회로 내려왔다. 산벚은 이제 지기 시작했고, 진달래는 이미 파란 잎을 피웠다. 떡갈나무 잎은 어느새 손바닥 넓이만큼이나 넓어졌다. 녹색의 윤기가 온 산을 뒤덮었다.
일요일 아침, 구룡산 녹음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가 며느리를 보는 예식장에 들렀다가 서둘러 돌아왔다. 조치원 오봉산을 가보고 싶었다. 오봉산의 녹음이 다른 산에 비해 유별나게 좋아서도 아니고,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 만한 거리를 견딜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이다. 또 당연히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산책로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내게는 다시 처음부터 겸허하게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이다.
옷을 갈아 입었다. 거의 여름 날씨인데도 바람이 부는 것 같아 두꺼운 셔츠를 입었다. 땀을 흘리는 것이 감기 드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두꺼운 셔츠를 입고 자켓까지 준비했다. 충대 병원을 돌아 방죽말로 해서 석곡을 지나 태성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부강 쪽으로 가다가 사곡리 쪽으로 우회전했다. 동면으로 갈라지는 길에서 우회전하여 오송에서 36번도로와 만났다. 조치원에서 죄회전하여 공주쪽으로 가다가 1변 국도를 만나 북으로 1km쯤 달리다가 서면으로 좌회전하면 오봉산 맨발 등산길 입구와 만난다. 입구의 보리밥집은 아직도 보리밥을 팔고, 돌아들어가는 모텔 주차장에는 비닐로 만든 발이 여전히 차 번호를 가린다.
오봉산 입구로 진입하는 도로는 공사중이었다. 그러잖아도 비좁아서 갈 때마다 조마조마했는데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등산로 입구에 차가 많다. 날씨가 좋으니 충남 조치원 부근 사람들이 다 모여든 모양이다. 주차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걱정을 했는데 마침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빠져 나온다. 기다렸다가 주차하고 나서니 오후 2시 10분이다. 최씨 선영이 있는 곳에 빙 둘러 울타리를 쳐 놓았다. 사람들은 관청에서 만들어 놓은 좋은 길을 마다하고 굳이 자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산소 옆으로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질러다니는 길로 다녀야 할 정도로 시간과 힘이 아까우면 산에 가지 말면 될 것이 아닌가?
오봉산길은 황토 길이다. 그래서 비가 온다든지 해토머리에는 신발에 흙이 붙어서 곤란한 때가 많다. 다행히 길은 말라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부부 동행이고, 혹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정상까지 3km 밖에 안되어 완만하여 큰 부담을 주지 않는데다가 말 그대로 맨발 등산로이기 때문에 흙까지 부드러워 산책 정도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정상까지 작은 봉우리가 5개이다. 그래서 오봉산이다.
입구부터 산이 아름답다. 진달래꽃이 피고, 조팝나무꽃이 꿀단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향기를 흘리고 있다. 산기슭 과수원에는 배꽃이 피어 함박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얗다. 오후라 그런지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보다 내려오는 사람이 더 많다. 내려오는 이들의 얼굴은 모두 밝다. 산은 사람들의 얼굴을 맑게 헹구어내는 마력을 지니고 있나 보다. 녹음이 이미 황토길에 그늘을 지웠다. 이제 막 피어난 활엽수들은 반쯤 투명해서 하늘 빛이 보일 것 같다. 산에는 솔잎은 쓸어내는 사람이 없다. 양탄자를 깔아놓은 길을 걷는 기분이다. 그러나 자연의 길이 양탄자에 비기랴.
능선길을 걸으며 산 기슭을 내려다보니 하얀 무더기들이 아름답다. 꽃은 어떤 꽃도 예쁘다. 꽃은 서로 예쁨을 경쟁하지 않아도 보이는 대로 예쁘다. 꽃은 성형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차별없이 예쁘다. 꽃은 자신이 더 예쁘다하여 자만하지도 않고, 자신이 덜 예쁘다하여 좌절하지도 않는다. 산으로 갈수록 자연이다. 그러나 공원 언저리에 말하자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꽃들은 징그럽다. 연산홍의 붉은 빛이 그렇고 만들어 놓은 철쭉이 그렇다. 꽃은 자연일 때 아름답다. 철쭉은 연분홍으로 예쁘고 산벚꽃은 촌스럽지만 그런 대로 우아하다. 때 지난 산벚이 꽃송이 뒤로 초록색 잎을 달고 있다. 그 성숙의 미가 새롭다. 길가의 보랏빛 오랑캐꽃이나 노란 양지꽃도 들여다볼수록 아름답다.
오봉산은 중간 중간에 쉼터가 있고 운동 기구도 있다. 또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압을 할 수 있는 옥돌길도 있다. 물론 옥돌은 아니겠지만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겸한 길이다. 정자도 몇 군데 지어 놓았다. 사람들이 정자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웃는 소리가 경쾌하다.
오봉산은 정상까지 붉은 황토이다. 붉은색은 활기의 색이다. 붉은색을 대하면 삶의 활기를 느낀다. 황토길은 오를수록 힘들지 않고 오를수록 지치지 않는다. 황토길은 사람에게 의지와 의욕을 불러 일으킨다. 황토길을 걷는 여인들의 발걸음이 빠르다. 산에서는 이렇게 간편한 옷을 입은 여인이 아름답다. 티셔츠에 원색 쪼끼를 입고, 차양 넓은 모자를 쓰고, 경등산화를 신은 여인들은 모두가 다리가 길고 허리가 날씬해 보인다. 옅은 화장으로도 길가에 화사한 철쭉과 견줄 만하다. 황토와 철쭉과 여인들의 모습이 살아 있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철쭉은 더 화사하다. 이 정도 높이의 산에 자연산 철쭉이 이렇게 많이 피어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활짝 피어난 철쭉은 연분홍으로 세상을 밝히지만 나는 막 피어나려고 하는 꽃봉오리가 아름답다. 분홍이 짙다 못해 붉은 색을 띤다. 봉오리 끄트머리는 아주 뾰족하다. 진달래 꽃봉오리가 사춘기 소녀의 젖망울 같다면, 그보다 크고 붉은 철쭉의 꽃봉오리는 30대 초반 여인의 발기한 젖꼭지 같다.
드디어 정상이다. 산 아래에서 여기까지는 3km이다. 꼭 3시 10분이다. 걸어온 시간은 한 시간이다. 빠른 걸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렇게 느린 것도 아니다. 한 번 쉬면서 물을 마시기도 했지만, 힘에 겨울 정도는 아니었다. 정상에는 두세 쌍의 부부가 쉬고 있다. 의자에 앉아 사과를 깎고 있다. 정상석에는 고도 표시도 없다. 고도를 알면 무엇하랴. 멀리 고복 저수지가 보인다. 북으로는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와 홍익대학교 조치원 캠퍼스가 보인다. 그 너머 멀리 운주산이 꽤 높아 보인다.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고 마을마다 길이 통한다. 농촌의 소도읍인 조치원에도 아파트가 많다. 가까이서 보면 괴물이지만 멀리서 보면 자연 속에 조화로운 문명이다. 잘 정리된 들판은 초록의 생기가 완연하다. 정상석 부근에는 사람이 심은 철쭉과 연산홍이 피어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사람의 마음대로 성형한 자연이 치졸하다.
내려오는 길이 수월하다. 40분 걸렸다. 얼굴에 땀이 흘렀다. 목덜미에 거친 모래알이 만져진다. 땀이 흘러 다시 염분이 되었다. 이 정도의 산책에 피로를 느끼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마음에 가슴 뿌듯했다. 이제 곧 4시간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다시 백두대간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11시간을 걷던 내가 아닌가? 철쭉과 황토와 녹음에서 다시 생기를 받는다.
돌아오는 길, 과수원마다 복숭아꽃이 화려하다. 배꽃이 애련하다. 좋다. 아주 좋다. 내일이면 병원에서 완치되었다는 통보를 받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200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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