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삶과 문학

매화송이 같은 내고향

느림보 이방주 2005. 2. 7. 16:32
  상실의 슬픔 가운데 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고향을 잃는 것이다. 임진각의 망향비나 대청호의 망향비를 보면서 남의 일인 줄만 알았다. 고향을 빼앗긴다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들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90년대부터 우리 고향 흥덕구 죽림동 택지 개발 얘기가 두엄무더기 김 오르듯 솔솔 피어오르더니 99년에 보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을 넘어서자마자 현실화 되었다. 우선 마을 한 가운데로 2차 우회도로가 났다. 한 가족 같던 마을이 두 동강이가 났다.. 사람들 마음까지 갈라지는 아픔이 올까봐 마을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중장비들이 야산을 밀어 논과 밭은 땅 속에 쓸어 넣었다. 사람들이 살던 마을도 황토 아래로 묻혀버렸다. 아이들 연날리던 매화송이 같던 산봉우리는 벌건 폭군이 되어 마을 역사와 애환을 전설 속에 묻어 버렸다. 소를 몰아 써레질하던 논배미도, 아낙네들의 지난밤 얘기가 흥건하게 오고가던 개울가 빨래터도 황토에 덮여버렸다.

 

2004년 8월, 고향 사랑의 마음을 잃기 전에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하자는 모임이 있었다. 나는 고향을 떠났지만 그 자리에 초대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마을 유래비를 세우는 일이다. 죽림동의 유래를 기초로 하여 월천마을 택지 개발의 과정 등을 담아 돌에 새겨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 그 비문 닦는 일이 내게 맡겨졌다. 아버지가 계시면 당연히 쓰셔야 할 글인데, 궁여지책으로 내게 맡겨진 것이다. 나는 돌에 새기는 글을 써 본 일이 없어서 망설였다. 그러나 글이 좀 모자라더라도 고향에 뿌리를 둔 사람이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마을 어른들의 말씀을 좇기로 했다.

나는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해서 마을 사람들의 심회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앙도서관에 가서 충청북도지, 청주시지, 청원군지, 지명지 동국여지승람 등을 찾아 죽림동에 관한 기초 자료를 수집했다. 쓰고, 고치고, 또 다시 쓰면서 심혈을 기울였다. 그 기간에는 내가 해야 할 많은 일 가운데 가장 우선으로 삼았다. 다음이 몇 번을 고쳐서 겨우 완성한 글이다.

 

죽림동(竹林洞) 월천마을 유래비

우리 竹林洞은 남서쪽에 우뚝 솟은 용덕산의 힘찬 용틀임이 우렁봉에서 한 번 불끈 솟아올랐다가 매화송이처럼 내려앉은 산자락을 뒤로하고, 매름산(망일산)에서 발원한 月川이 길게 마을 앞들을 적시며 반달처럼 돌아든다. 남으로는 우렁봉 아래 능동을, 동으로는 매름산 줄기인 내평을, 서로는 흰봉재, 황새울고개, 막은고개를, 북으로는 미륵뎅이를 경계로 석판리, 성화동, 석곡동, 가경동과 경계를 이루었다. 남으로부터 옛서당 자리인 서당, 신라 석씨들이 살았다는 석구누굴(石基洞), 대나무가 많았다는 대산, 월천이 반달처럼 굽이치는 언저리에 월천형의 네 개 마을로 형성되어 대나무가 많고 힘써 학문하며 지조로 도를 실천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竹林이라는 이름과 같이 인재를 끊임없이 배출하였다.

우리 죽림동은 예로부터 현량 은사들이 낙향하여 학문을 닦고 도를 실천하며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리하여 400여 년 전 조선 정종대왕 후손인 진강령께서 낙향터를 잡으신 이래 전주리씨가 대성을 이루고 문화류씨 여흥민씨 청주한씨 보성오씨 순천박씨 경주김씨 나주정씨 구례손씨가 화목하게 살아왔다. 마을 이름을 처음에는 죽산 또는 대산이라 하다가 1914년 월천리를 통합하여 죽림리가 되었다가 1987년 청주시에 편입되어 죽림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바뀌어 1999년 우리 죽림동 월천 마을이 신시가지 조성계획에 따라 주공아파트 단지로 수용되었다. 점바위가 있는 꽃재부터 내평까지 우회도로가 나고 마을을 적시던 월천 냇물에는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벼 심어 밥짓고 콩 심어 장 담그던 월천앞들은 흙속에 묻히고 마을을 지키던 미륵뎅이로부터 방앗간 자리까지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서서 형제 같이 화목하던 마지막 열네 가구는 뿔뿔이 흩어져 행복한 삶의 꿈은 전설 속에 묻혀 버리게 되었다. 이에 천년을 이어온 유서 깊고 도덕 높은 마을의 유래를 기리고 화목하고 순박한 마음을 면면이 이어가고자 하는 우리 월천마을 주민의 작은 소망을 담아 여기 유래비를 세운다.

글   이방주   글씨  이범주

2004년  10 월 15 일


죽림동 월천마을 주민일동

 


                                       죽림동 월천마을 유래비

 

  나는 이 글을 세 문단으로 구성하였다. 첫 문단은 죽림동의 지리적인 형세를 중심으로 마을 이름의 유래를 밝혔다. 둘째 문단에서는 죽림동의 역사와 개발지역으로 편입되기까지의 과정을, 셋째 문단은 개발되는 과정에서 변하는 모습과 이주해야하는 월천 주민의 아픔과 소망을 담았다.

 

그러나 마을의 봉우리, 등성이, 논배미, 고샅마다 전해지는 이름과 유래를 다 기록하지 못했다. 그 많은 자료들을 다 소화할 수도 없었고, 돌에 새겨야 하는 글의 길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을이 품고 내려오던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냥 황토 속에 묻어 버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의 입에 가장 흔하게 오르내리던 지명 몇 개만이라도 수록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께 여쭈어야 하는 일을 혼자서 문헌 자료만 가지고 이렇게 중요한 글을 만든다는 것이 보통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비가 선 다음 마을 어른들의 질책이 두렵기도 하였다.

 

그 후에 이 글은 서예가인 재종형 범주의 필적으로 쓰여서 옛 방앗간 자리에 신설되는 죽림초등학교 앞에 건립하여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떡을 하고 술을 빚어 마을의 아름다운 추억을 오래 간직할 것을 다짐하는 제를 올렸다. 마을 사람들은 비문의 내용에 대해 모두들 만족하는 눈치였다. 나는 우선 안심이 되었다. 이제 이 비가 중심이 되어 이향민들이나 마을을 지키시는 분들이나 상실의 슬픔을 잊고 고향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도 우렁봉에서 바라보면 매화송이가 활짝 피어난 것 같던 봉우리들이 모두 허물어졌지만, 매화 송이 같던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2005. 2. 7)


             2005년 3월 개교하는 죽림초등학교 전경(교문 바로 맞은 편에 유래비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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