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바다에 산다. 바다에 살 수밖에 없다. 무수히 뭍에 오르려고 애를 써도 파도는 바다에 살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바다 여행을 했다. 기대에 부풀었는데 파랑주의보가 내렸다고 한다. 풍랑이 심하면 어떠랴. 시간에 촉박한 버스가 통영 항구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급히 달린 까닭에 속이 약간 울렁거렸다. 부두에 도착하자 비릿한 바다 냄새 때문에 속이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러나 또 그쯤이야 어떠랴 했다.
출렁거리는 배에 오르니 눈이 날린다. 바닷바람이 한번 ‘휘이익’ 불어온다. 부딪히는 바람이 꼭 차가운 소금을 얼굴에 뿌려대는 것처럼 습습하고 따갑다. 그래도 뱃전에 기대서서 하얀 목도리라도 날리며,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멋을 부려 보고 싶다. 배가 황소처럼 숨을 몰아 목을 빼고 고동을 울리더니 ‘부르릉’ 바다로 나선다.
바다는 잔잔하다. 날리는 눈발도 잔잔한 수면에 떨어져 하얀 매화꽃잎처럼 떠다닐 것만 같다. 꽁지부리에 파란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진다. 푸른 물은 부서지면 왜 하얗게 되는 것인가? 나는 어린 아이처럼 작은 의문을 가졌다. 내가 가진 그리움도 하얗게 부서질 수 있을까? 꽁지부리에서 품어대는 하얀 물보라 때문에 약간 일렁거릴 뿐 바다는 잔잔하다. 무섭게 일겠다던 파도는 어디에 갔나? 뭍으로라도 기어 올라갔나?
잔잔하던 배는 한산도를 지나자 요동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파도가 하얗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밀려온다. 성난 양떼 같다. 하얀 제복을 입은 일진의 군사들이 질풍처럼 달려드는 모습이다. 너울이다. 파도는 은하를 건너는 조각달 같이 작은 배에 부딪친다. 바닷물이 갑자기 하얀 옥양목 휘장처럼 널따랗게 퍼지며 배를 뒤덮는다. 하얗게 부서져 가루가 된다. 배는 곧 뒤집힐 것처럼 기우뚱거린다. 이물이 수평선을 타고 하늘로 치솟으면, 고물은 수심에 박힐 듯 곧추선다. 다시 이물이 수심으로 곤두박질치면, 고물이 하늘로 다리를 들고 물구나무를 선다. 이때 파도가 뱃전을 때린다. 기우뚱 엎어질 것 같던 배는 다시 자리를 잡아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선다. 또 다시 먼 바다에서 너울이 하얀 치마를 쓰고 달려든다. 선장은 표정도 없이 그런 바다를 바라본다. 배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파도는 어디를 향하는 것인가? 바다에 사는 파도는 왜 누구에게든 달려들지 못해 안달인가? 배가 매물도를 돈다. 나는 바위섬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너울의 서슬이 두렵다. 파도는 바위섬인 매물도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든다. 그러나 섬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섬은 두려움도 노함도 없다. 그냥 정서를 잃어버린 바위섬이다. 섬 가까이에 파도는 풍랑을 일으키며 섬을 애무해 보기도 하고, 너울이 되어 으르렁거리며 으름장을 놓아보기도 한다. 아무도 파도의 애절한 소망을 알아주지도 들어주지도 않는다. 아무도 파도의 으름장에 겁을 먹지 않는다.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매물도를 돌아 한산도를 지나는 동안 파도는 겁도 없이 쉼도 없이 달려든다. 우리가 탄 유람선은 그런 파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뭍을 향하여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달려드는 파도는 청죽이 창칼에 갈라지듯 두 쪽으로 나뉘어 하얗게 부서진다.
파도는 바다에 산다. 뭍으로 오를 수 없는 것이 파도의 숙명이다. 뭍으로 오르면 그것은 이미 파도가 아니다. 우리에게 바다가 만만한 것이 아니듯 파도에게는 세상이 제 마음처럼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파도는 그냥 그렇게 바다에 살아야 한다. 나도 시인처럼 파도가 되어 세상을 향하여 그리움을 하소연해 볼까?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하고 가슴을 내놓으면 세상은 어떤 표정일까?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말이다. 내가 만나는 세상도 나의 파도 같은 사랑쯤에는 까딱도 하지 않겠지.
요동치던 배가 부두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부두에 머리를 댄다. 파도는 나처럼 나는 뭍처럼 그렇게 갈라섰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하고 파도가 이미 뭍이 되어 정서를 잃은 나를 원망하는 것 같다.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나는 파도의 시인이 사랑했던 연인의 노래 한 장을 읊조리며 일렁이는 부교를 걸어 뭍에 발을 디뎠다.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던 파도는 그냥 거기에 서서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마루로 올라간 주인을 바라보는 하얀 강아지들 같다. 그냥 거기 주저앉아 일렁이고 있다. 희끗희끗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바라보고 있다.
그래! 파도는 바다에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게 운명이니까. 그게 파도의 분수니까. 그게 파도의 섭리니까. 내가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듯 파도는 바다에 남았다. 파도는 바다에 살아야 아름답다. 절제하는 그리움일랑 가슴에 돌로 맺으며 섭리에 순응할 때 아름답다. 나는 세상을 향해 일렁이던 가슴의 파도를 잠재우며 내 자리로 돌아간다.
(2007. 12. 29.)
* 꽁지부리 : 고물, 배의 뒷부분
* 이물 : 배의 앞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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