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데 들에 가랴. 사립 닫고 소 먹여라./ 마이 매양이랴. 쟁기 연장 다스려라./ 쉬다가 개는 날 보아 사래 긴 밭 갈아라.' 고산 윤선도는 그의 시조 <하우요(夏雨謠)>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당시의 상황으로 '한가롭고 여유 있는 농촌 풍경'의 노래라거나, 장마 중에 가능한 일을 권하는 '교훈적인 노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비가 내리면 들로 뛰어나가야지 문닫아 걸고 쉬면서 개는 날이나 기다리는 한심한 농부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하향(遐鄕)에 내려가서 메아리 없는 불만이나 늘어놓다가 태평성대가 돌아오면 나가 벼슬하는 얄팍한 처세를 비판할 때 인용하기도 한다.
'학교가 무너진다.'고 온통 난리들이다. '학교가 무너진다.'고 떠벌리는 것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학자나, 시인이나, 학부모나, 모두 한입으로 '학교가 무너졌다.', '교권이 추락했다.', '아이들이 절망하고 있다.'고 걱정이 태산인 듯하다.
최근 1,2년 사이에 잘못 겨냥한 개혁의 화살이 걷잡을 수없이 성급히 날아가 엉뚱한 과녁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렇다고 '학교가 무너진다.'고 앉아서 백날 외어보았자 무너지는 학교가 벌떡 일어설 까닭이 없다. 한 교실에 한두 명 있는 유별난 아이들의 이상행동이나, 어쩌다 발견되는 교육권을 포기한 교사를 보고 '학교가 무너진다.'고 남의 일처럼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은 무너지는 학교에 포격을 가하는 꼴이 된다.
불치병에 죽어 가는 자식을 두고 '내 아들이 죽어간다.'하고 떠들 멍청한 아비가 있겠는가. 불치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낱같은 소망을 가지고 아이 살리기에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시인의 글 한 줄, 지식인의 평론 한편, 방송인의 한마디 말이 잘못되면, 오히려 대중에게 독약을 주사하는 꼴이 되므로 신중해야 한다. 시인은 조금만 살펴보면 어느 학생에게서나 발견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하고, 방송인은 사제간에 너무도 당연히 존재하는 인간적인 신뢰를 방송하고, 지식인은 윤리를 지탱하고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학교가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밝혀야 하겠다.
지금 학교에는 장맛비가 그치지 않는다. 교사는 물론 학부모, 시인, 학자도 모두 들로 나가야 한다. 옥수수는 쓰러지지 않았는가, 고추밭에 배수는 어떤가를 살피러 들로 뛰어나가야 한다. 사립을 닫아걸고 '학교가 무너진다'고 흥얼거리며 갠 날을 기다리는 사이, 비 그치면 갈려던 사래 긴 밭에는 고추도 옥수수도 남아있을 리 없다.
(1999. 11. 25. 충청일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