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원초적 행복

느림보 이방주 2007. 6. 15. 11:27
 

퇴근길에 증평으로 접어드는 교차로를 내려서는데 전화가 온다. 친구 연 선생이다. 저녁을 먹으러 오란다. 나는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벌써 증평을 지나는 길이라니까 어머니께서 좋은 걸 해 놓으셨으니 얼른 오란다. 3일 만에 청주 집에 가는 나를 괴산으로 되돌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좋은 게 뭔지 나는 다 안다. 어머니께서 해 놓으실 좋은 거라는 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또 며칠 부실한 내 몸에 대한 우정의 배려라는 것도 나는 다 안다. 그러니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뵙는 어머님께 드릴 뾰족한 것이 없었다. 그냥 두유를 큰 걸로 한 상자 샀다. 사탕도 두어 봉지 샀다. 박하사탕을 보니 그걸 참으로 좋아하신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다. 박하사탕도 한 봉지 더 넣었다.

 

팔순이 가까운 어머님께서는 아주 정정하셨다. 언제나 밝게 웃으시는 모습은 여전하시다. 서서 인사를 드리면서도 바로 마당가에 커다란 가마솥에 눈길이 머문다. 이미 한소끔 끓어올랐는지 구수한 냄새가 마당에 가득하다. 나는 냄새만으로도 익어가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조금만 과장하면 냄새만으로도 누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된장은 적당히 넣었는지, 고사리를 넣었는지, 토란 줄기를 넣었는지, 대파를 넣었는지를 구분하는 예민한 후각을 지니고 있다. 끓이기 전에 참기름에 한 번 지졌는지 냄새로 구분이 간다. 내장을 함께 넣어 끓였는지 아닌지도 냄새로 알 수 있다. 어머님께는 우리가 그냥 아이들로 보이겠지만, 코를 킁킁거리며 미리 냄새를 맡아볼 정도의 어리광은 이미 지난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의 솜씨인데 어련하시랴.

 

지난 4월 말 왼쪽 장딴지 근육이 파열되어 아침 운동도 산책도 등산도 할 수 없었다. 그 화려한 초봄의 산야를 안방에서 TV로만 보아야 했다. 제비봉에서 내려다보이는 청풍호반의 아름다움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나무에 새순이 돋으면 꼭 한 번씩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의풍 김삿갓 계곡에 대한 상사의 병이 뼈에 사무쳤다. 햇살에 말갛게 비치는 여린 단풍잎이 하늘하늘 손짓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드디어 어느날 한밤중에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그날부터 한 삼사일은 모래알을 씹었다. 된장국이라고 한 숟가락 떠 올리면 익모초 생즙 맛이다. 하늘이 빙빙 돌고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책마다 글자는 벌레가 되어 기어 다니고, 컴퓨터모니터가 꿈속처럼 아득하다. 운전 중에 차가 기우뚱거리며 아슬아슬한 엉덩이춤을 춘 게 또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런 나에 대한 친구의 배려라 생각되어 가슴 뜨겁게 고맙다.

 

극구 안 받으시겠다는 큰 절을 올리고 나니, 어머님께서는 고사리를 넣느냐고 물으셨다. 넣어야 고기가 부드럽지 않느냐고 말씀드리니 사내가 별걸 다 안다 하시며 웃으셨다. 우리는 맛난 냄새로 부글부글 끓는 솥단지를 어머님 앞에서 어리광처럼 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입안이 다 익어버릴 것처럼 뜨거운 어머님의 정성을 한 뚝배기씩 받았다. 어머님께서 직접 꺾어 오신 고사리, 텃밭에 가꾸신 대파가 고기의 향을 돕는다. 보나마나 슬쩍 삶아 건져 놓으셨다가 손으로 쪽쪽 찢어서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그 투박하신 손으로 조물조물하여 뚝배기에 국물을 붓고 파와 고사리 등을 넣어 바글바글 끓여 내셨을 것이다. 어머님께서는 절대로 칼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온몸으로 정성을 쏟아 부으셨을 것이다.

 

결이 곱게 갈라지는 빛깔 좋은 육질은 보기만 해도 감각이 혀로 전해져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진한 국물, 맑고 깔끔한 맛, 고사리 향과 어우러진 특유의 구수한 냄새, 이런 명품은 시장에서 구경도 하지 못한다. 정말이지 그냥 입에서 녹는다. 뜨거워서 씹을 수도 없지만 씹을 필요도 없다. 그냥 입안에서 얼버무려 꾹 눌러버리면 저절로 넘어간다. 돌미나리 무침을 한 젓가락 씹는다. 뜨겁고 텁텁한 입안이 시원한 자연의 향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간에 물조차 쓰던 입맛은 다 어디로 갔는가? 검은 콩이 껍질이 벗겨지도록 익어 툭툭 불거진 쌀밥을 뚝배기에 푹 쏟아 연거푸 두 뚝배기를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환하게 다가온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하늘이 맑다. 빙빙 돌던 노란 회오리바람은 어디로 갔는가? 일어서면 아득하기만 했던 땅바닥이 바로 발밑이다. 씁쓸하기만 하던 물맛이 시원하다.

 

이렇게 황홀한 맛이 수없이 수난을 당했다. 보신탕, 사철탕, 영양탕으로 이름표를 바꿔 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개장으로 부른다. 그래야 맛이 난다. 북한에서는 ‘단고기’라 하여 아무런 시련 없이 지탱해 온 것 같다. 단맛이란 뭘까? 그냥 단맛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달다’는 ‘맛있다’, ‘맛나다’의 차원을 넘어선 맛이다. 그래서 때로는 물도 달고 탕약도 달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맛있다’는 것은 음식의 맛이고, ‘달다’는 것은 정성의 맛이다. 그러니 ‘단고기’라 부르는 것은 정성이 있어야 맛을 낼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개장국은 전통의 음식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복의 부인인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당시의 의식주의 생활과학 지침서인 규합총서에도 개고기 요리법이 상세히 나와 있다. 전골과 구장(狗醬) 뿐만 아니라, 삶기, 찌기, 굽기 등 다양한 요리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즐겨 먹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도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몸을 보할 수 있는 보양 식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화 상대성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것이 오히려 문화정체성을 포기하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대를 초월하여 허한 몸을 보양해 주는데 말이다.

 

나는 한때 맛도 모르면서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개장을 마구 먹었다. 중년을 넘어서면서는 보신의 효과를 기대하며 먹었고, 최근에는 맛을 알아 맛으로 먹는다. 인제는 정성과 손맛을 담은 단맛을 음미하며 먹어야겠다.

 

친구가 참으로 부럽다. 아직도 정정하신 어머님이 계셔서 그 어머님의 정성을 달게 먹을 수 있는 친구가 정말 부럽다. 아들과 그 친구가 먹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시는 어머님이 아직도 이 세상에 계신 친구가 정말 부럽다. 부러울수록 내 어머니가 정말 몸서리쳐지도록 그립다.

 

돌아오는 길, 동네 어귀까지 나오셔서 배웅하시는 어머님은 꼭 우리 엄마 모습 그대로이시다. 마당에 이제 막 꽃 떨어진 고추라도 한 줌 따서 들려 보내고 싶어 하시는 그 모습도 우리 어머니 그대로이시다. 요즘 부쩍 그리워진 어머니를 뵙고 고향집 모롱이를 돌아 나오는 느낌이다. 모처럼 안전벨트가 짧아진 것 같다. 온 들판이 푸르다. 세상이 아름답다. 허해진 나를 안쓰러워하는 우정, 전통음식에 대한 어머님의 정성과 지조, 믿음, 표현할 수 없이 황홀한 맛,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여 오늘은 원초적 행복에 온몸이 흠씬 젖은 기분이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 가 계신 세상처럼 불빛은 찬란하기만 하다.

                                                                                        (2007.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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