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내리막길에서 2

느림보 이방주 2007. 2. 4. 10:55
 

 도덕봉에서 내리막길을 앞에 두고


산악회에서 끓인 술국에 소주를 마시면서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넘어지면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일까? 부부간에도 진흙까지 이해해 주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그러나 그냥 믿어보았다. 그것은 내가 그를 씻어줄 수 있을 때만이 그도 날 씻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졸고 ‘내리막길에서’에서〉


 

그렇다. 내가 진흙을 씻어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도 나의 진흙을 씻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먼저 그의 진흙을 씻어줄 생각을 해야 한다.


대전 한밭대학교 쪽에 계룡산의 한 줄기인 수통골 계곡이 있다. 계곡을 가운데 두고 산줄기가 뻗어 있다. 그래서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순환 등산로로 알려져 있다. 산은 높지 않은 능선 산책길이다. 능력에 따라 거리를 조절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길이 나 있다. 친구 연선생과 나는 빈계산, 금수봉, 도덕봉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처음 한 40분 정도는 경사진 오르막길이다. 그동안 단련으로 숨도 가쁘지 않고 등산화도 매우 가볍다. 사람들이 밟아 놓은 눈길에서 남자 친구와 같이 온 처녀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미끄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능선에 오르니 포근했던 날씨가 돌변한다. 따사롭던 햇살이 모두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바람이 심하게 분다. 한낮의 바람이 마치 새벽바람처럼 차다. 귀가 시리다. 볼도 시리다. 재킷의 앞섶을 여미었다. 사람들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끊임없이 올라온다. 첫 봉우리인 빈계산을 지나 금수봉에 올랐다. 푸른 숲 사이로 갈라져 맨살을 드러낸 수통골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호수라지만, 꼭 살아 꿈지럭거리는 전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걸어가기로 약속한 까마득한 눈길을 어림해 보았다. 올라온 길과 가야할 길이 엇비슷하다. 지금까지 올라온 길은 아주 순탄했다. 눈이 쌓이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지만, 한 번도 눈길과 바람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람을 피하느라 등마루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걸었다. 길은 돌길도 아니다. 군데군데 눈이 얼어붙기는 했으나 그냥 솔잎이나 낙엽이 사람들 발길에 부셔져 양탄자처럼 폭신하다.


올라온 길보다 가야할 길은 결코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도덕봉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내리막길은 길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절벽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등산길이면서도 빨리 주차장에 도착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걸음은 너무 빨라 이른 하산길이 걱정이 되었다.


순탄한 길은 어느새 그렇게 멀다고 생각되던 도덕봉에 도착했다. 마루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만 여유만만하게 사진을 찍었다. 서성이면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전시가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바라보면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모두 흰색의 거대한 괴물 같다. 괴물은 여기저기서 오금에 힘을 주고 공격의 자세로 산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도덕봉에서 내리막길은 그야말로 두려운 내리막길이었다. 수직의 절벽을 밧줄 하나에 의지한다. 게다가 발에 밟히는 대로 부서져 흘러내리는 자갈길이다. 밧줄을 믿지 못하는 공포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다리가 떨렸다. 스틱을 접어 배낭에 꽂았다. 할 수 없이 밧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앞선 친구는 자꾸 돌아보면서 나를 걱정했다. 나는 내발에 구르는 자갈이 친구를 다치게 할까봐 가슴 조였다. 대전시에서 만들어놓은 철사다리는 경사가 급하고 간격이 넓다. 무릎이 아프다. 나는 친구의 짧은 다리를 걱정하고, 친구는 뒤를 돌아보면서 나의 약한 무릎을 걱정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걱정하면서 절벽을 다 내려왔다. 한 20여분의 절벽이 두 시간은 되는 듯 했다. 쉬면서 사과와 배를 깎아 먹었다. 친구는 나의 약한 치아를 생각해서 아내가 그렇게 하듯이 얇게 저며 주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내리막길에 섰다. 그러나 우리는 외롭지 않다. 마음속으로라도 서로의 평안을 걱정해 줄 수 있는 내리막길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리막길에서 내가 걱정해 줄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다.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한탄하기 전에 옆 사람을 살피는 것이 바로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래서 마지막 봉우리가 도덕봉인가? 돌아보니 만보기로 이만이천 보, 한 10km는 되는 것 같다.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내리막길에서 무릎이 좀 아팠다. 그러나 하루가 즐겁다. 4시간 30분, 이렇게 끊임없이 걸을 수 있는 것이 고맙다. 그리고 함께 갈 수 있는 내리막길이 고맙다.

(2007.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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