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해외 여행

14. 융프라우의 만년설

느림보 이방주 2006. 8. 21. 08:41
 

7월 31일


스위스 관광 첫날, 우리는 아침부터 서둘렀다. 루체른 유스호스텔은 깨끗하고 친절하며 모든 시설이 좋았다. 샤워 시설, 세면장이 따로 있고 화장실이 넓고 깨끗하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이곳은 조용하고 포근했다. 모처럼 편안한 잠자리에서 여독을 씻었다. 문을 열어 놓아도 모기조차 없는 자연 속의 한 공간이다.

7시부터 아침 식사 시간이다. 유스호스텔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유럽식 뷔페이다. 된장국에 밥을 먹는 것만은 어림도 없지만, 또 런던이나 파리의 한국인 민박집에서 주는 아침 식사만은 못해도 부드러운 빵과 우유, 따끈한 커피가 있는 깔끔하고 훌륭한 식사였다.

인터라켄으로 가는 산간 마을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시내버스를 타러 나갔다. 유스호스텔에서 3일을 쓸 수 있는 버스표를 구입했으나 어떻게 개찰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시내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표를 보이자,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 있는 검표대에 버스표를 넣는 방법과 버스를 타는 방법을 시범을 보이며 설명해 주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우리가 하나하나 검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스위스 사람들의 친절에 감탄할 지경이다. 버스는 검표원이 없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렇게 버스표를 사고 앞문이나 뒷문으로 자연스럽게 탔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냥 내린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나이 지긋한 검표원이 어느 구역에서 올라와 표를 검사했다. 무임승차했다가는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루체른 역에서 인터라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유레일패스가 있으면 유럽의 모든 기차가 무료이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모든 유람선이 무료이다. 다만 각국의 고속 전철의 1등석에 탈 경우에는 약간의 추가 요금을 지불한다. 고속 전철에서도 1등석을 구매했기에 최고의 좌석이 기다리고 있다. 기차가 호숫가에 동화처럼 들어선 도시인 루체른을 벗어나자 서서히 산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때로 벽에 붙어 기어가는 길짐승처럼 아찔한 절벽을 가로 지른다.

 

스위스인들은 청결이 생활화된 듯하다. 플랫폼에 껌 자국 하나가 없다. 철길에 비닐 조각 하나 날리지 않는다. 담배꽁초 하나 뒹굴지 않는 거리, 먼지 묻은 개망초 하나 없는 길 가, 산을 기어오르는 터널을 지나 절벽을 간신히 붙어 달리는 철길 옆에도 잡초를 깎아 깨끗하다. 청결에 관하여 완벽을 지향하는 것 같다. 차도 깨끗하고 차 안도 초등학교 교실처럼 깨끗하다. 자연과 어울려 소수의 수면에 한 폭의 그림을 던지며 달리는 기차가 어느덧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인터라켄부터 산악 열차를 타야 한다. 1인당 10만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그것도 유레일패스 소지했기 때문에 기차 요금이 면제된 것이다. 다만 입장료에는 산악열차, 정상에서의 엘리베이터, 눈썰매 등의 모든 요금이 다 포함된 것이다. 추가 요금은 없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동안 그 입장료가 비싸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절벽을 간신히 기어오르고 수없이 많은 터널을 지나는 동안 이 공사가 얼마나 난공사였는지 짐작하게 된다.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에서 내려다본 오지 마을

산간 마을의 풍경(소들이 워낭을 울리며 풀을 뜯는다)

 

                                      기차에서 올려다 본 알프스 만년설

융프라우 역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3,454m)에 있는 역이다. 정상은 젊은 처녀의 어깨라는 의미의 ‘융프라우요흐’라고 한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일 것이다. 융프라우 산에 터널을 뚫고 철로를 깔아 관광 명소로 만든 것은 1912년부터라고 한다. 약 16년간의 공사 끝에 오늘날 세계 사람들의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 기차 안에서 9개 국어로 하는 안내 방송 가운데 우리말도 있어서 반가웠다.

 

기차 안에서 보이는 산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깎아지른 듯한 산은 봉우리마다 만년설을 이고 있다. 그리고 눈 아래는 회색의 절벽이다. 절벽에는 눈 녹은 물이 수백 미터 폭포를 이루며 물안개를 일으킨다. 그 아래에는 초원이고, 초원에는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다. 비탈진 초록의 풀밭에는 소들이 워낭을 울리며 유유히 풀을 뜯는다. 소들은 중간에 기착한 역에 열차 바로 가까이까지 와서 커다란 워낭을 흔들어 고적한 소리를 내며 눈을 꿈쩍거린다. 산 중의 목장에는 붉은색 지붕의 멋진 인가가 드뭇하게 있고, 집마다 창가에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했다. 마당에도 예쁘고 튼튼해 보이는 소형차 2,3대가 주차되어 있다. 국가의 경영이나 도시의 다독거림이나 개인의 살림살이가 아기자기하고 철저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차에서 보이는 산촌 마을의 아름다운 모습

 

기차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푸른 초원에는 야생화가 한창이다. 야생화는 볼수록 예쁘다. 노랑, 빨강, 분홍, 하양색의 키가 작은 꽃은 멀리서 바라보면 한 장의 아름다운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하다.

 

인터라켄에서 산악 열차로 갈아탄 다음 고도에 따라 다른 차로 갈아타기 시작하여 세 번째 갈아탄 기차가 꽃무늬를 수놓은 터널로 행진을 계속하자 찬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우리는 조금 긴장했다. 긴 소매 옷을 덧입었다. 터널을 지나며 가끔 약 5분 정도 정차하면서 관람 시간을 주었다. 해발 3000m에서 내려다보이는 알프스는 문자 그대로 장관이다.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눈, 빙하, 바람소리, 마구 날아드는 희고 검은 구름, 그런 별천지를 지나 눈을 더 아래로 내리면 초원, 그 옆에 거울처럼 맑은 호수가 있다.

       중간 기착지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 내려서 바라본 융프라우요흐(폭포가 이채롭다)

                                                   만년설을 배경으로

차는 드디어 정상인 융프라우요흐 바로 아래의 마지막 역에 도착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무상한 곳에서 이리저리 다니며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었다. 어떤 골짜기는 조용히 빙하가 아래로 행진하고, 어떤 골짜기는 구름을 일으켜 하늘로 내뿜고, 어떤 봉우리는 금방이라도 눈 더미를 무너뜨릴 것처럼 으르렁거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의 스핑크스 전망대에 올랐다. 눈발이 날리다 비바람이 분다. 무섭다. 산이 무섭다. 장엄하다. 쌓인 눈이 만든 골짜기가 장엄하다. 신비롭다. 이산 저산을 뛰어 다니는 구름이 신비롭다. 알프스에서 가장 길다는 알레취 빙하와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무서울 정도로 신비롭다. 신의 끝 짧은 사랑처럼 햇살이 잠깐 비치다가 금방 노여운 비바람이 된다. 눈발이 휘몰아치다가 또 다시 햇살 한 줌이 등에 따사롭다. 처녀의 어깨처럼 울고 웃는 산신의 변덕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레취 빙하

추위를 견디다 못해 실내로 들어왔다. 컵에 담긴 辛라면이 여기서 팔리고 있다. 약 6000원쯤 하는 라면이 불티나게 팔린다. 줄을 한 참이나 서서 컵라면 다섯 개를 샀다. 우리나라에서 온 라면을 독일어밖에 모르는 스위스 청년에게 줄을 서서 손짓 발짓으로 이렇게 비싼 값에 사먹는 감회가 새롭다. 그 감격보다 수출용 라면은 맛이 다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실제로 최고의 맛이었다.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조국에 두고 온 딸 생각)

                                            세계의 정상에 올라가 있는 辛라면

정상 아래에 내려와 얼음 동굴을 지나, 눈썰매장에 갔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눈썰매를 탔다. 다시 융프라우요흐 역으로 돌아와 기차를 탔다. 정상에서 잠깐인 듯 했는데 산중의 해가 기운을 잃은 지 오래다. 인터라켄에서 루체른까지는 기차로 두 시간이다. 비가 내리는 호수는 더욱 아름답다.

(2006. 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