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도 말짱하더니 밤사이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새벽 두 세시쯤에 잠이 깨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은 딸아이 고입 연합고사 합격자 발표 날이다. 모두들 걱정 안해도 된다고 했지만, 만약의 경우 실수했을 수도 있고, 어린애 같은 막내딸이라 도무지 여고생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어릴 적에 얼마나 제 엄마 애를 태운 딸인가?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거실에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신비스럽게도 백설의 천지가 되어 있었다. 아파트 앞마당에 세워 놓은 차들이 모두 눈 속에 하얗게 묻혀 있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거뭇거뭇 눈은 계속해서 내린다.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날이 밝았다. 밖에서는 차들이 부르릉대고, 거실에서 아버지 기침 소리와 함께 담배 냄새가 문틈으로 솔솔 들어온다. 아버지께서 산책 나가시다가 도로 들어오시는 문소리가 나고 눈이 많이도 왔다는 등의 두런거리시는 소리가 들린다.
도로 일어나 거실 커튼을 걷고 눈을 바라보다가 신문을 찾았다. 신문은 제대로 와 있었다.
아내를 깨웠다. 아내는 나보다 더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다. 나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했지만 내심 나도 편한 것은 아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아내와 큰놈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도 되나 안 되나를 다투는 사이 전화번호부를 찾았다. 미리 전화로 확인 한 다음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다.
어제 저녁 큰 녀석이 제 동생을 놀리는 조로 합격증을 죽 내주는데 한 아이만 내주지 않으니 그 황당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는 자기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큰놈은 '기현아, 합격 불합격은 종이 한 장 차이더라'하고 약올리고 그예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태연하다.
아내는 아예 식사도 하지 않고 일삼아 조바심하고 있다. 태연하던 딸도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공연히 불안해한다. 답안지에 표를 잘못할 수도 있고, 이름을 안 썼을 수도 있다면서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 한다.
아이가 학교로 출발한 다음 학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다. 모든 것은 기우였다. 세상에는 공연히 잘못되는 일이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눈은 계속해서 쏟아진다. 앞산 소나무들이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하얗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구룡산에 오르기로 했다. 눈 쌓인 구룡산의 설화 터널의 아름다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세상은 아름답고 깨끗하더니 길에 나서니 온통 진창이다.
하늘에서 내려 준 천혜의 아름다움에도 인간의 발이 닿으면 이렇게까지 추해질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온통 죄만을 밟고 다닌다던 사람의 발이 이제는 죄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가 보다. 큰길에 나가니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거리는 더욱 추하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 눈이 녹아 흐른다. 자동차 기름이 파르스름한 띠를 이루며 하수도 구멍으로 흘러 들어간다.
차들은 더러운 먼지 찌꺼기 물방울을 튀기며 질주한다. 차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납게 한다. 점잖은 사람도 운전석에 앉으면 치졸한 경쟁에 말려들기 일쑤다. 내기를 하듯 빠르기를 경주하고, 끼여들기 경쟁을 하고, 조그만 상대방의 작은 실수에도 화를 벌컥 내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화내고 욕하고 교만해진다. 그에 비하면 이렇게 하얀 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길을 건너 구룡산 입구 계단 몇 개를 오르니 금방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다. 차들이 질주하는 소리는 이미 하얀 눈 속에 묻혀 버렸다. 엄마를 따라온 초등 학교 1, 2학년쯤 된 아이들이 눈을 뭉치고 있다. 엄마는 앞서가며 연신 장갑이 젖으면 손 시리다고 걱정이다. 아이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고, 엄마는 그런 아이들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으로 애를 태운다.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무게를 못이기고 한 움큼씩 길 위에 떨어진다. 녹아서 차지게 변한 눈이 머리 위로 아내의 목덜미로 떨어진다. 나는 그것이 재미있어 키들키들 웃었다. 아내는 내가 장난으로 눈을 뭉쳐 던진줄 알고 더욱 재미있어 한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쓸데없는 무게로 남들을 불편하게 한 내가 아닌가? 눈 속에서만은 그 무게를 잃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눈은 아내에게 그런 믿음까지도 만들어 주었다. '그래 맞아. 우리는 이제 막내가 여고생이 되는 나이가 아닌가? 무슨 형식이 그렇게 많은가? 체면치레에 얽매어 진솔을 감출 이유가 무에 있는가?' 우리는 모든 걱정이 가신 듯 하나 하나가 즐겁다.
눈 쌓여 하얗게 정화된 세계가 좋았고, 따라서 눈 내린 세계처럼 텅 비워진 우리 마음이 좋다. 눈은 이렇게 세계를 비우고 마음을 비운다.
눈은 세계를 정화한다.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세계는 사람들에 의해서 늘 더럽혀지게 마련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주변을 얼마나 더럽히며 살아왔는가? 삶의 찌꺼기를 마구 버리고, 삶의 질서를 망가뜨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래서 온통 세상은 찌꺼기와 혼돈 상태로 망가져 버렸다. 그래도 '남들이 이렇게 세상을 더럽혀 놓았노라'고 남을 탓하고 나를 용서해 온 것이다. 눈은 밤사이 소리 없이 내려 이런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 버린다. 깨끗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나 똑같이 하얗게 만들어 버린다. 눈은 이렇게 과거의 과오를 덮어 버린다.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기에 내가 내는 발자국은 나의 새로운 역사인 것이다.
눈은 자아를 정화한다. 깨끗하게 정화된 세계를 바라보는 잠시 동안이라도 나는 어린아이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다. 어깨와 목에 들어 있던 가식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고, 자세를 잠시라도 흐트러뜨릴 수 있어서 좋다. 교만과 형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래의 내 모습을 내보일 수 있어서 좋다. 참나무 가지에 핀 설화를 보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지나는 아이들이 던지는 눈덩이를 맞아도 그놈들이 귀여워 보여서 좋다. 잠시라도 남을 탓하듯 나를 탓하고 나를 용서하듯 남을 용서할 생각을 하게 해서 좋다. 눈은 이렇게 세계와 자아를 새롭게 한다.
정상 못미처 눈 속의 아내를 한 장 찍었다. 생활에 찌든 아내의 모습을 한 주먹도 안되는 사진틀 속에 담았다. 사진틀 그 작은 구멍을 통해서 본 아내는 남다르게 생활에 찌들고, 남다른 마음 고생으로 살이 내린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래도 그 '남다른' 사연일랑 입에 담지 말자. 그저 잠시 사슬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모습을, 그 어색함을 담기나 하자.
마루에 오르니 눈은 더 많이 쌓였다. 날망을 따라 난 길에는 사람들의 발자욱이 나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심호흡을 크게 해 본다.
산남 지구에서 용암 지구로 가는 큰길은 눈이 녹아 차들이 질주한다. 개발된 산남지구의 아파트촌이 보인다. 개발되지 않은 원흥이, 탑골의 시골집들이 대조적이다. 그러나 눈 덮인 마을이 하나같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눈은 세계를 정화한다고 했지만, 모든 것은 이렇게 멀리서 보면 다 아름답다. 티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날망을 따라 난 길을 내려서서 오르내림이 없는 길을 걸어가면 수자원 공사 배수지가 있는 산 끝까지 갈 수 있다. 참나무 숲 설화 터널을 걷다가 '덕암사 입구'라는 표지를 발견했다. 그 절을 가 보기로 했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눈을 헤치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녹으며 내린 눈은 몹시 미끄러웠다. 길을 잃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는 아내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한참을 내려가니 사찰이 나왔다. 고요하기는 하지만 성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요즈음 사찰은 시멘트로 지은 건물, 기계톱으로 다듬은 돌탑 때문에 성스러움을 잃었다. 게다가 마당에는 '무쏘'나 '갤로퍼'가 한 대쯤 흉물처럼 세워져 있게 마련이다.
아내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저렇게 몸에 밴 아내의 기도가 우리 가족 모두의 행복을 지켜온 것이다.
중학교 다닐 때 건너다니던 '원흥 방죽' 둑길을 건너며 옛날 생각을 했다. 30년 전보다 크게 변한 게 없다. 아내도 어릴 때 그곳에 마름 건지러 온 이야기를 한다. 포장 안된 시골 신작로를 누가 눈을 치워 흙이 보인다. 모처럼 밟는 흙길. 반갑다. 싸구려 등산화 물이 새어 찌걱거린다.
도로 하나를 건너니 도심이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 시꺼멓게 때묻은 눈이 질척거린다. 다시 그 혼잡스럽고 지저분한 세계에 돌아온 것이다. 아내는 눈 위의 자전거 자국만 봐도 큰놈의 그것으로 보여 손보다 속이 더 시리고, 지나는 여고생을 보면 막내까지 밤중에 하교할 생각에 가슴이 무너진다. 3월이면 나까지 세 식구가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나가 지옥 같은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것이 본연의 삶이겠지. 그러나 가끔 거실에서 고개만 들면 산이 보이고 눈 쌓인 소나무 숲이 보이는 우리집이 있어서 좋다.
제과점에 들려 케이크를 큰놈으로 하나 샀다. 이제 여고생이 되는 우리 딸을 축하해 주어야 하겠기에……. '초는 몇 개나 주느냐'던 단골집 주인은 말하지 않았는데도 초 대신 작고 귀여운 케이크를 덤으로 주었다. 소리쳐 자랑하고 싶은 내 안을 알아주는 빵집 아저씨가 형님처럼 고맙다.
세상은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요즘 같은 경제에도 이런 따뜻함이 있구나. 멀리 바라보이는 구룡산의 흰 눈의 은택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998. 1. 8.)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거실에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신비스럽게도 백설의 천지가 되어 있었다. 아파트 앞마당에 세워 놓은 차들이 모두 눈 속에 하얗게 묻혀 있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거뭇거뭇 눈은 계속해서 내린다.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날이 밝았다. 밖에서는 차들이 부르릉대고, 거실에서 아버지 기침 소리와 함께 담배 냄새가 문틈으로 솔솔 들어온다. 아버지께서 산책 나가시다가 도로 들어오시는 문소리가 나고 눈이 많이도 왔다는 등의 두런거리시는 소리가 들린다.
도로 일어나 거실 커튼을 걷고 눈을 바라보다가 신문을 찾았다. 신문은 제대로 와 있었다.
아내를 깨웠다. 아내는 나보다 더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다. 나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했지만 내심 나도 편한 것은 아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아내와 큰놈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도 되나 안 되나를 다투는 사이 전화번호부를 찾았다. 미리 전화로 확인 한 다음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다.
어제 저녁 큰 녀석이 제 동생을 놀리는 조로 합격증을 죽 내주는데 한 아이만 내주지 않으니 그 황당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는 자기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큰놈은 '기현아, 합격 불합격은 종이 한 장 차이더라'하고 약올리고 그예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태연하다.
아내는 아예 식사도 하지 않고 일삼아 조바심하고 있다. 태연하던 딸도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공연히 불안해한다. 답안지에 표를 잘못할 수도 있고, 이름을 안 썼을 수도 있다면서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 한다.
아이가 학교로 출발한 다음 학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다. 모든 것은 기우였다. 세상에는 공연히 잘못되는 일이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눈은 계속해서 쏟아진다. 앞산 소나무들이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하얗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구룡산에 오르기로 했다. 눈 쌓인 구룡산의 설화 터널의 아름다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세상은 아름답고 깨끗하더니 길에 나서니 온통 진창이다.
하늘에서 내려 준 천혜의 아름다움에도 인간의 발이 닿으면 이렇게까지 추해질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온통 죄만을 밟고 다닌다던 사람의 발이 이제는 죄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가 보다. 큰길에 나가니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거리는 더욱 추하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 눈이 녹아 흐른다. 자동차 기름이 파르스름한 띠를 이루며 하수도 구멍으로 흘러 들어간다.
차들은 더러운 먼지 찌꺼기 물방울을 튀기며 질주한다. 차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납게 한다. 점잖은 사람도 운전석에 앉으면 치졸한 경쟁에 말려들기 일쑤다. 내기를 하듯 빠르기를 경주하고, 끼여들기 경쟁을 하고, 조그만 상대방의 작은 실수에도 화를 벌컥 내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화내고 욕하고 교만해진다. 그에 비하면 이렇게 하얀 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길을 건너 구룡산 입구 계단 몇 개를 오르니 금방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다. 차들이 질주하는 소리는 이미 하얀 눈 속에 묻혀 버렸다. 엄마를 따라온 초등 학교 1, 2학년쯤 된 아이들이 눈을 뭉치고 있다. 엄마는 앞서가며 연신 장갑이 젖으면 손 시리다고 걱정이다. 아이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고, 엄마는 그런 아이들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으로 애를 태운다.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무게를 못이기고 한 움큼씩 길 위에 떨어진다. 녹아서 차지게 변한 눈이 머리 위로 아내의 목덜미로 떨어진다. 나는 그것이 재미있어 키들키들 웃었다. 아내는 내가 장난으로 눈을 뭉쳐 던진줄 알고 더욱 재미있어 한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쓸데없는 무게로 남들을 불편하게 한 내가 아닌가? 눈 속에서만은 그 무게를 잃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눈은 아내에게 그런 믿음까지도 만들어 주었다. '그래 맞아. 우리는 이제 막내가 여고생이 되는 나이가 아닌가? 무슨 형식이 그렇게 많은가? 체면치레에 얽매어 진솔을 감출 이유가 무에 있는가?' 우리는 모든 걱정이 가신 듯 하나 하나가 즐겁다.
눈 쌓여 하얗게 정화된 세계가 좋았고, 따라서 눈 내린 세계처럼 텅 비워진 우리 마음이 좋다. 눈은 이렇게 세계를 비우고 마음을 비운다.
눈은 세계를 정화한다.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세계는 사람들에 의해서 늘 더럽혀지게 마련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주변을 얼마나 더럽히며 살아왔는가? 삶의 찌꺼기를 마구 버리고, 삶의 질서를 망가뜨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래서 온통 세상은 찌꺼기와 혼돈 상태로 망가져 버렸다. 그래도 '남들이 이렇게 세상을 더럽혀 놓았노라'고 남을 탓하고 나를 용서해 온 것이다. 눈은 밤사이 소리 없이 내려 이런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 버린다. 깨끗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나 똑같이 하얗게 만들어 버린다. 눈은 이렇게 과거의 과오를 덮어 버린다.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기에 내가 내는 발자국은 나의 새로운 역사인 것이다.
눈은 자아를 정화한다. 깨끗하게 정화된 세계를 바라보는 잠시 동안이라도 나는 어린아이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다. 어깨와 목에 들어 있던 가식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고, 자세를 잠시라도 흐트러뜨릴 수 있어서 좋다. 교만과 형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래의 내 모습을 내보일 수 있어서 좋다. 참나무 가지에 핀 설화를 보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지나는 아이들이 던지는 눈덩이를 맞아도 그놈들이 귀여워 보여서 좋다. 잠시라도 남을 탓하듯 나를 탓하고 나를 용서하듯 남을 용서할 생각을 하게 해서 좋다. 눈은 이렇게 세계와 자아를 새롭게 한다.
정상 못미처 눈 속의 아내를 한 장 찍었다. 생활에 찌든 아내의 모습을 한 주먹도 안되는 사진틀 속에 담았다. 사진틀 그 작은 구멍을 통해서 본 아내는 남다르게 생활에 찌들고, 남다른 마음 고생으로 살이 내린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래도 그 '남다른' 사연일랑 입에 담지 말자. 그저 잠시 사슬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모습을, 그 어색함을 담기나 하자.
마루에 오르니 눈은 더 많이 쌓였다. 날망을 따라 난 길에는 사람들의 발자욱이 나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심호흡을 크게 해 본다.
산남 지구에서 용암 지구로 가는 큰길은 눈이 녹아 차들이 질주한다. 개발된 산남지구의 아파트촌이 보인다. 개발되지 않은 원흥이, 탑골의 시골집들이 대조적이다. 그러나 눈 덮인 마을이 하나같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눈은 세계를 정화한다고 했지만, 모든 것은 이렇게 멀리서 보면 다 아름답다. 티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날망을 따라 난 길을 내려서서 오르내림이 없는 길을 걸어가면 수자원 공사 배수지가 있는 산 끝까지 갈 수 있다. 참나무 숲 설화 터널을 걷다가 '덕암사 입구'라는 표지를 발견했다. 그 절을 가 보기로 했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눈을 헤치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녹으며 내린 눈은 몹시 미끄러웠다. 길을 잃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는 아내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한참을 내려가니 사찰이 나왔다. 고요하기는 하지만 성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요즈음 사찰은 시멘트로 지은 건물, 기계톱으로 다듬은 돌탑 때문에 성스러움을 잃었다. 게다가 마당에는 '무쏘'나 '갤로퍼'가 한 대쯤 흉물처럼 세워져 있게 마련이다.
아내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저렇게 몸에 밴 아내의 기도가 우리 가족 모두의 행복을 지켜온 것이다.
중학교 다닐 때 건너다니던 '원흥 방죽' 둑길을 건너며 옛날 생각을 했다. 30년 전보다 크게 변한 게 없다. 아내도 어릴 때 그곳에 마름 건지러 온 이야기를 한다. 포장 안된 시골 신작로를 누가 눈을 치워 흙이 보인다. 모처럼 밟는 흙길. 반갑다. 싸구려 등산화 물이 새어 찌걱거린다.
도로 하나를 건너니 도심이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 시꺼멓게 때묻은 눈이 질척거린다. 다시 그 혼잡스럽고 지저분한 세계에 돌아온 것이다. 아내는 눈 위의 자전거 자국만 봐도 큰놈의 그것으로 보여 손보다 속이 더 시리고, 지나는 여고생을 보면 막내까지 밤중에 하교할 생각에 가슴이 무너진다. 3월이면 나까지 세 식구가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나가 지옥 같은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것이 본연의 삶이겠지. 그러나 가끔 거실에서 고개만 들면 산이 보이고 눈 쌓인 소나무 숲이 보이는 우리집이 있어서 좋다.
제과점에 들려 케이크를 큰놈으로 하나 샀다. 이제 여고생이 되는 우리 딸을 축하해 주어야 하겠기에……. '초는 몇 개나 주느냐'던 단골집 주인은 말하지 않았는데도 초 대신 작고 귀여운 케이크를 덤으로 주었다. 소리쳐 자랑하고 싶은 내 안을 알아주는 빵집 아저씨가 형님처럼 고맙다.
세상은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요즘 같은 경제에도 이런 따뜻함이 있구나. 멀리 바라보이는 구룡산의 흰 눈의 은택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998.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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