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은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한 사람은 어린날의 꿈과 낭만을 맛보지 못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리라.
시골에서 자랄 때 이야기를 하라면, 여름날 앞 냇물에서 물놀이 얘기, 겨울날 썰매, 연날리기 쥐불놀이, 콩때기, 밀때기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또 그걸 해보지 않고 그 시절을 보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뭐니뭐니해도 참외 서리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아슬아슬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맞아 죽을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어린이들에게 담력을 길러 주는 산 교육이고, 자라서 시골을 떠나서도 고향을 잊지 못하게 하는 추억의 산실이리라.
먹을게 만만치 않았던 예전에 여름에는 참외, 복숭아, 수박을 서리 해다 먹는 것이 아이들의 간식 거리를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간식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삶의 현장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때로는 못된 아이들이 지나치게 남의 농사를 망쳐 놓을 정도로 참외밭을 절단을 내놓아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주인이 모른 체 하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참외 몇 개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 인심이 어디 요즘과 같았나? 또 참외 서리를 한 아이들을 원두막에 불러 단단히 꾸지람을 하여 바르게 자라게 도덕 교육도 하고, 뙤약볕 아래 몇 시간씩 풀을 뽑게 하는 벌을 내리기도 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체험하게도 하고, 그리고 나서 또 먹고 싶은 참외를 실컷 먹게 하여 이웃간의 정도 도탑게 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쯤인가. 철은 들었으나 솟구치는 장난기를 억제하지 못하는 그 시절에 여름철이면 우리는 저녁마다 뒷동산의 큰 소나무 아래 약속처럼 모여서는 일을 꾸미곤 하였다. 개량 복숭아가 한참 나올 때는 10 리까지 원정을 가서 복숭아 서리를 해다가 밤새워 아이들과 '아드득 아드득' 바수면서 별구경 달구경을 했고, 동네 참외밭도 돌아가면서 맛보았다.
그날도 우리는 별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뒷산에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종일 달구어진 묘 앞의 상돌에 등을 지지며, 별을 바라보면서 말은 없어도 제각기 무슨 일거리가 없는가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 야, 요 앞에 성딕(成得:아버지 친구)이네 참외 말야, 노랗게 익었던데."
하고 제안을 했다. 금방 노오란 향기가 콧속을 살살 건드리는 듯했다.
" 야 군침 돈다. 그거 오늘 저녁에 맛을 좀 봐야 하는거 아냐?"
"그런데 그거 첫물이잖아. 한 번 따낼 때까지 참자."
"얀마, 찬기는 너무 늦었어. 벌써 속이 쓰려 오는 걸"
"그래 맞아. 남의 동네에 와서 농살 지으면 세금을 내야지 ,세금을 ……."
"좋아, 맛만 보자는 거지"
"자, 가자구. 곯기 전에 맛보자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우리는 출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참자고 한 아이는 배가 아프다면서 집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모두 까만 팬티와 하얀 런닝 셔츠가 여름철 상용 외출복이라, 러닝 셔츠만 벗으면 야간 전투의 위장은 끝나는 셈이었다. 방학 내내 새까맣게 그으른 윗통이 달이 안 뜨는 날은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에서도 나는 좀 소극적이라 맨 뒤에서 망을 보면서 선두를 따랐다. 보무도 당당하게 신작로를 지나서 풀섶을 헤치고 개울을 건너 성딕이네 참외밭 머리에 이르렀다. 원두막은 있으나 불은 꺼져 있었다. 초저녁까지만 지키다가 집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그러나 혹시 모기를 피하기 위해서 불을 끄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밭고랑 어디쯤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성격을 잘 하는 우리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조심을 했다. 먼저 원두막에 가 보았다. 우리는 모두 세 명이라 나는 원두막 근처에서 망을 보고 두 사람은 신속하게 잘 익은 놈으로 몇 개만 따기로 했다. 원두막은 조용했다. 모깃불도 노인네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굵직하게 내어 원두막에 대고 불러 보았다.
" 성딕이, 성딕이 자나?"
대답이 없는 것으로 봐서 없는 것이 틀림없다. 나의 장난스런 부름에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안심하는 듯이 웃었다.
"가자"
신호에 우리는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나 하는 듯이 서둘러 밭을 떠났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긴장들하고 겁을 내고 있었다. 근동에 호랑이라고 소문난 주인과 걸리면 용서 없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허둥지둥 뛰어오느라고 발 밑에 참외도 밟히고 덩굴도 밞히었다. 뒷동산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발에 밟힌 참외가 마음에 걸렸다. 상석에 둘러앉아 따온 참외를 먹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이 한 개씩 바수고는 한 개 남은 참외를 서로 미루고는 먹지 않았다. 난도 생각이 없었다. 이상하게 께름칙했다. 그렇게 말없이 하늘만 쳐다보다가 헤어졌다. 하늘에는 쏟아질 듯이 별만 가득하였다.
이튿날 공부를 하는데, 어제 일이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살금살금 아랫마을에 가 보았다. 동네에 난리가 나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로 내뺐는지 씨도 볼 수 없고 성딕이 부인만 나타나서 애들 찾아내라고 악을 쓰고 있었다. 남의 집 담 모퉁이에 숨어서 거동만 살피다가 산등성이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려고 막 뒷산 등성이에 오르니 아이들이 거기 앉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어제 그냥 집으로 돌아간 놈이 우리 세놈 짓이라고 일러바친 일, 세 집에서 참외밭을 떠맡고 금년 수확 예상의 돈을 내놓으라는 일, 이 참에 아주 놈들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단단히 벼르더라는 일, 등 기가 막히게 크게 저질러진 일들을 얘기로 듣고 한숨을 쉬면서 돌아왔다. '우리집이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곧 우리집으로도 쫓아올 텐데 집에 들어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랑 마루에 앉아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태우고 있을 때,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모퉁에서 성딕이 아저씨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아버지께서는 마루에서 담배를 피우시다가
" 저기 올라오는 게 누구냐 ?"
" 글세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나는 얼른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골방에 들어가 누웠다. 그런데 도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벌떡 일어나 앞마당에 나가 사랑을 기웃거렸다. 큰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고 조용하다. 웬일인가? 크게 싸우시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나는 뒤늦게 반성하기 시작했으나 소용이 없는 일이다. 당장 내려질 꾸중을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그가 돌아가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뛰어서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말았다. 방문 유리로 내다보니 아버지가 그를 배웅하고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리고 안마당 숫돌에 말없이 낫을 갈고 계신다. 곧 불러서 호령을 내리실 텐데 어쩐 일인가 ? 도무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는데 낫을 들고 그냥 밖으로 나가신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마루에서 뒹굴다가 해가 서산에 기울 때를 기다려 소를 끌고 산으로 갔다. 풀이 좋은 곳을 가려 소를 매어 놓고 그늘에 앉아 그 생각만 하였다. 어두워져도 집에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소를 끌고 내려 왔다. 아버지께서는
" 소 배가 아주 뺑뺑하구나. 방학이라 소가 호강을 하는구나"
하시면서 낮에 일은 말씀도 않으셨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랑 마루에 나갔을 때 아버지께서 드디어 말씀을 꺼내셨다.
" 그래, 성딕이네 참외밭을 건드렸다면서? 남의 일 년 농사를 버려 놨으니 그 사람 큰일이 아니냐? 아버지하고 친군데 아버지가 친구한테 무슨 망신여? 점잖은 사람이 무슨 그런 실수를 해여? 이번에는 아버지가 잘 얘기했으니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마. 점잖은 사람이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선 불호령이 내리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아버지의 상심이 마음 아팠다. 나는 아버지의 그 '점잖은 사람'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그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로 '점잖은 사람'의 의미를 잊어 본 일이 없다.
시골에서 자랄 때 이야기를 하라면, 여름날 앞 냇물에서 물놀이 얘기, 겨울날 썰매, 연날리기 쥐불놀이, 콩때기, 밀때기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또 그걸 해보지 않고 그 시절을 보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뭐니뭐니해도 참외 서리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아슬아슬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맞아 죽을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어린이들에게 담력을 길러 주는 산 교육이고, 자라서 시골을 떠나서도 고향을 잊지 못하게 하는 추억의 산실이리라.
먹을게 만만치 않았던 예전에 여름에는 참외, 복숭아, 수박을 서리 해다 먹는 것이 아이들의 간식 거리를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간식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삶의 현장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때로는 못된 아이들이 지나치게 남의 농사를 망쳐 놓을 정도로 참외밭을 절단을 내놓아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주인이 모른 체 하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참외 몇 개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 인심이 어디 요즘과 같았나? 또 참외 서리를 한 아이들을 원두막에 불러 단단히 꾸지람을 하여 바르게 자라게 도덕 교육도 하고, 뙤약볕 아래 몇 시간씩 풀을 뽑게 하는 벌을 내리기도 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체험하게도 하고, 그리고 나서 또 먹고 싶은 참외를 실컷 먹게 하여 이웃간의 정도 도탑게 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쯤인가. 철은 들었으나 솟구치는 장난기를 억제하지 못하는 그 시절에 여름철이면 우리는 저녁마다 뒷동산의 큰 소나무 아래 약속처럼 모여서는 일을 꾸미곤 하였다. 개량 복숭아가 한참 나올 때는 10 리까지 원정을 가서 복숭아 서리를 해다가 밤새워 아이들과 '아드득 아드득' 바수면서 별구경 달구경을 했고, 동네 참외밭도 돌아가면서 맛보았다.
그날도 우리는 별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뒷산에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종일 달구어진 묘 앞의 상돌에 등을 지지며, 별을 바라보면서 말은 없어도 제각기 무슨 일거리가 없는가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 야, 요 앞에 성딕(成得:아버지 친구)이네 참외 말야, 노랗게 익었던데."
하고 제안을 했다. 금방 노오란 향기가 콧속을 살살 건드리는 듯했다.
" 야 군침 돈다. 그거 오늘 저녁에 맛을 좀 봐야 하는거 아냐?"
"그런데 그거 첫물이잖아. 한 번 따낼 때까지 참자."
"얀마, 찬기는 너무 늦었어. 벌써 속이 쓰려 오는 걸"
"그래 맞아. 남의 동네에 와서 농살 지으면 세금을 내야지 ,세금을 ……."
"좋아, 맛만 보자는 거지"
"자, 가자구. 곯기 전에 맛보자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우리는 출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참자고 한 아이는 배가 아프다면서 집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모두 까만 팬티와 하얀 런닝 셔츠가 여름철 상용 외출복이라, 러닝 셔츠만 벗으면 야간 전투의 위장은 끝나는 셈이었다. 방학 내내 새까맣게 그으른 윗통이 달이 안 뜨는 날은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에서도 나는 좀 소극적이라 맨 뒤에서 망을 보면서 선두를 따랐다. 보무도 당당하게 신작로를 지나서 풀섶을 헤치고 개울을 건너 성딕이네 참외밭 머리에 이르렀다. 원두막은 있으나 불은 꺼져 있었다. 초저녁까지만 지키다가 집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그러나 혹시 모기를 피하기 위해서 불을 끄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밭고랑 어디쯤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성격을 잘 하는 우리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조심을 했다. 먼저 원두막에 가 보았다. 우리는 모두 세 명이라 나는 원두막 근처에서 망을 보고 두 사람은 신속하게 잘 익은 놈으로 몇 개만 따기로 했다. 원두막은 조용했다. 모깃불도 노인네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굵직하게 내어 원두막에 대고 불러 보았다.
" 성딕이, 성딕이 자나?"
대답이 없는 것으로 봐서 없는 것이 틀림없다. 나의 장난스런 부름에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안심하는 듯이 웃었다.
"가자"
신호에 우리는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나 하는 듯이 서둘러 밭을 떠났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긴장들하고 겁을 내고 있었다. 근동에 호랑이라고 소문난 주인과 걸리면 용서 없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허둥지둥 뛰어오느라고 발 밑에 참외도 밟히고 덩굴도 밞히었다. 뒷동산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발에 밟힌 참외가 마음에 걸렸다. 상석에 둘러앉아 따온 참외를 먹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이 한 개씩 바수고는 한 개 남은 참외를 서로 미루고는 먹지 않았다. 난도 생각이 없었다. 이상하게 께름칙했다. 그렇게 말없이 하늘만 쳐다보다가 헤어졌다. 하늘에는 쏟아질 듯이 별만 가득하였다.
이튿날 공부를 하는데, 어제 일이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살금살금 아랫마을에 가 보았다. 동네에 난리가 나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로 내뺐는지 씨도 볼 수 없고 성딕이 부인만 나타나서 애들 찾아내라고 악을 쓰고 있었다. 남의 집 담 모퉁이에 숨어서 거동만 살피다가 산등성이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려고 막 뒷산 등성이에 오르니 아이들이 거기 앉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어제 그냥 집으로 돌아간 놈이 우리 세놈 짓이라고 일러바친 일, 세 집에서 참외밭을 떠맡고 금년 수확 예상의 돈을 내놓으라는 일, 이 참에 아주 놈들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단단히 벼르더라는 일, 등 기가 막히게 크게 저질러진 일들을 얘기로 듣고 한숨을 쉬면서 돌아왔다. '우리집이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곧 우리집으로도 쫓아올 텐데 집에 들어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랑 마루에 앉아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입술을 태우고 있을 때,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모퉁에서 성딕이 아저씨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아버지께서는 마루에서 담배를 피우시다가
" 저기 올라오는 게 누구냐 ?"
" 글세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나는 얼른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골방에 들어가 누웠다. 그런데 도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벌떡 일어나 앞마당에 나가 사랑을 기웃거렸다. 큰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고 조용하다. 웬일인가? 크게 싸우시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나는 뒤늦게 반성하기 시작했으나 소용이 없는 일이다. 당장 내려질 꾸중을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그가 돌아가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뛰어서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말았다. 방문 유리로 내다보니 아버지가 그를 배웅하고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리고 안마당 숫돌에 말없이 낫을 갈고 계신다. 곧 불러서 호령을 내리실 텐데 어쩐 일인가 ? 도무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는데 낫을 들고 그냥 밖으로 나가신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마루에서 뒹굴다가 해가 서산에 기울 때를 기다려 소를 끌고 산으로 갔다. 풀이 좋은 곳을 가려 소를 매어 놓고 그늘에 앉아 그 생각만 하였다. 어두워져도 집에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소를 끌고 내려 왔다. 아버지께서는
" 소 배가 아주 뺑뺑하구나. 방학이라 소가 호강을 하는구나"
하시면서 낮에 일은 말씀도 않으셨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랑 마루에 나갔을 때 아버지께서 드디어 말씀을 꺼내셨다.
" 그래, 성딕이네 참외밭을 건드렸다면서? 남의 일 년 농사를 버려 놨으니 그 사람 큰일이 아니냐? 아버지하고 친군데 아버지가 친구한테 무슨 망신여? 점잖은 사람이 무슨 그런 실수를 해여? 이번에는 아버지가 잘 얘기했으니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마. 점잖은 사람이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선 불호령이 내리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아버지의 상심이 마음 아팠다. 나는 아버지의 그 '점잖은 사람'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그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로 '점잖은 사람'의 의미를 잊어 본 일이 없다.
'느림보 창작 수필 > 사랑의 방(가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은 해로워 (0) | 2001.06.01 |
---|---|
아내의 꽃다발 (0) | 2001.05.14 |
눈 내리는 날에 (0) | 2001.03.04 |
모롱이를 도는 노래 소리 (0) | 2000.09.23 |
담쟁이처럼 아람처럼 (0) | 2000.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