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이방주
김경순 수필 「이 빠진 귀신이면 족하지」---『수필미학』 2024년 가을호(45) 게재
어찌 해도 안 되고 어찌 할 수도 없는
이방주
‘하늘의 도는 운행하여 막히는 바가 없으므로 만물이 이루어진다.’
장자(莊子) 천도(天道) 1장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의 원리는 자연의 이치대로 순환하므로 어찌 해도 안 되고 어찌 할 수도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김경순의 수필 「이 빠진 귀신이면 족하지」(『수필미학』 게재)는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라’는 삶의 지혜를 깨우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바랭이, 쇠비름 같은 식물과 개미, 고양이 같은 동물에게서 ‘삶에 대한 불타는 의지’를 발견한다. 그 순간 남편의 선천적으로 약한 치아가 생각난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랭이, 쇠비름에서, 개미로, 다시 고양이로, 인간을 대신하는 남편으로 옮겨갈수록 삶의 의지가 점점 더욱 강하게 불타오르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식물들은 어찌 하지 않는데 개미들은 살아보려고 허둥댄다. 더 나아가 고양이는 애기 때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던 외모가 세월이 가면서 ‘푸석푸석하고 끄레발하’면서도 삶의 의지는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본다. 남편은 준수한 외모에 비해 약한 치아 때문에 틀니를 해야 하는 현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서사구조는 식물에 비해 동물이, 인간이 하늘의 도를 거스르지 못해 강하게 안달하는 현실을 드러내 보인다. 이쯤해서 사유는 반전된다. 조선의 유학자 김창흡의 수필 낙치설(落齒設)을 읽었던 기억을 소환한다. 낙치설은 김창흡이 예순여섯 살에 이가 빠져 상심하다가 늙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현실 순응을 통하여 상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식의 전환과정을 담은 수필이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세월은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리고 ‘고통을 죽여 뼈를 심고 살을 채워 세월까지 잡아 틀어 회생하는 인간’의 천도에 순응하지 못하는 삶을 개탄한다. 자신이나 세상을 향하여 순응하는 삶을 촉구한 것이다.
이 작품은 단단한 구성과 인상적 묘사기 돋보인다. 처음에는 풀, 개미, 고양이, 남편으로 개체들의 삶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확장 묘사하다가 철학자인 김창흡의 수필을 거울삼아 작가 스스로는 물론 독자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사유의 단계를 전략적으로 구조화하는 치밀한 구성법으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면 되는’ 비전문적인 문학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심미안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이끌어내는 변증법적 사유가 작품을 돋보이게 했다. 이 글이 설명으로 일관했다면 독자들의 공명을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수필은 서사를 뼈대로 삼고 묘사로 살을 입혀야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 소재인 바랭이, 쇠비름, 개미, 고양이, 이 빠진 남편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재생하기에 충분했다. 적절하게 쓰인 신선한 어휘들도 의미 전달에 효과적이다. 전략적 사유, 구성법, 표현법, 어휘가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주제를 충분히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6504
이 빠진 귀신이면 족하지
김경순
마당에 나가 보면 저절로 쪼그리게 된다. 풀처럼 강인한 생명이 또 있을까. 땅은 바싹 말랐는데도 바랭이와 땅빈대 쇠비름은 언제 저리도 많은 식솔을 꾸렸는지 마당 곳곳이 푸릇푸릇하다. 쇠비름으로 손을 뻗는데 그때 개미 한 마리가 제 몸보다 더 큰 먹이를 물고 허둥대는 게 보였다. 녀석이 집을 어찌 찾아 가는지 눈으로 쫓았다. 돌 틈새를 지나 나무 쪼가리 위를 넘어 한참을 왔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그렇게 3미터쯤 가니 과연 작은 돌 틈 흙속에서 개미들이 줄 지어 드나드는 게 보였다.
한참을 개미 구경으로 넋을 잃고 있는데 ‘흐흠, 흐흠~’ 소리를 내며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옆을 힘없이 지나간다. 현관 데크 계단참에 앉아 처진 눈을 씀벅이며 이쪽을 쳐다본다. 아마도 15년은 족히 넘게 살았을 것이다. 애기 때 우리 집 마당에 나타난 녀석이라 ‘애기’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삼색 고양이인 ‘애기’는 언제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털에 얼굴도 참으로 예뻤다. 그러니 수고양이들에게 인기 묘로 등극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정기가 되면 우리 집 주위는 밤낮으로 수고양이들의 결투장이 된다. 하지만 다산의 왕이었던 ‘애기’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눈 밑에는 거무죽죽한 눈물 자국에 눈곱까지 끼고, 입 아래 털에는 어제 저녁에 먹은 캔과 엊그제 먹은 간식 찌꺼기를 여태 달고 다닌다. 반질거리던 털은 푸석푸석하고 끄레발하다. 이도 빠졌는지 딱딱한 사료를 먹지 못해 캔을 주면 허겁지겁 먹어 치우지만 이내 토악질로 속이 찰 새가 없다. 숨소리도 위태롭다. 들숨과 날숨이 일정하지가 않다. 들숨일 때는 ‘흐’, 날숨일 때는 ‘흠’ 소리를 낸다. 그때마다 배가 등가죽으로 바짝 붙어 뼈가 드러날 지경이다. 저리 힘든데도 어디서 숨어서 지켜보는 모양인지 내 소리만 나면 마르고 쳐진 꼬리를 늘어뜨리고 시적시적 나타난다. 사람으로 치면 만수를 다한 나이인데도 여전히 삶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른다.
순리대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닥치고 보면 그게 쉽지가 않다. 시부모님의 유전자를 빼쏜 남편은 어디가도 빠지지 않는 외모다. 그런데 외모만 빼쏘면 좋을 것을 좋지 않은 치아까지 빼쏠게 무어란 말인가. 시부모님은 나이 쉰도 못 돼 틀니를 끼우셨다. 환갑의 나이인 남편은 그나마 시부모님 보다야 낫지만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는 지금을 기준으로 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며칠 전 남편은 치과를 다녀오더니 아랫니를 뺐다고 했다. 뺀 이가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되었다. CT를 찍어보니 썩거나, 흔들리고 약한 이가 거의 다였다. 뼈가 약하니 임플란트도 어려워 틀니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가 빠진 남편은 갑자기 몇 년의 세월을 앞지른 사람 같았다. 말도 새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몇 번을 물어보게 된다. 그러니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되고 낯빛도 어두워졌다. 아랫니가 없으니 음식을 씹을 수도 없어 죽으로 매 끼니를 대신한다. 부모님을 닮아 자신도 이가 튼튼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였던 사람이었다. 헌데 막상 닥치고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김창흡의 이야기가 혹여 약이 될까 싶어 꺼내 본다. 그의 나이 예순여섯 살이 되던 해 앞니 하나가 빠지자 딴사람이 된 것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육십이 넘도록 살았으니 한탄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수두룩한 마당에 자신처럼 이 빠진 귀신이 몇이나 되겠나 싶어 마음을 넉넉하게 먹기로 한다. 그리고 늙음을 받아들여 즐겁게 살겠다며 <낙치설>을 지었다.
세월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밖으로만 돌고 곁을 주지 않던 고양이 ‘애기’도 늙고 병이 드니 집 근처에 붙박여 맴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은 정작 저 말 못하는 숨탄것들이 아닌가. 제 몸보다 몇 배는 크고 무거운 짐을 이고 가야하는 개미나 게걸스럽게 먹고 나면 고통스런 토악질이 기다릴지라도 삶이 다 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길 고양들이야 말로 진정한 운명론자는 아닐까. 고통을 죽여 뼈를 심고 살을 채워 세월까지 잡아 틀어 다시 회생하는 우리가 정녕 영장은 맞는 것일까.
김경순 dokjongeda@hanmail.net
충북 음성 출생《월간문학》등단(2008)
수필집《달팽이 소리 지르다》《애인이 되었다》
《돌부리에 걸채여 본 사람은 안다》《그럴 줄 알았다》《흐느실, 외갓집 가는 길》
현재 음성 평화제작소 글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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