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제31회 충북수필문학상 심사평

느림보 이방주 2024. 11. 12. 23:03

31회 충북수필문학상 심사평

일상은 성찰의 거울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충북수필문학회가 수여하는 제31회 충북수필문학상은 변종호 수필가의 작품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와 <‘사이’를 읽다>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충북수필문학상은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가운데 작품성과 문학 활동, 문학회에 대한 기여도를 고려하여 수상자를 결정한다. 문학상은 작품성만을 기준으로 수상자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회원도 있지만, 대부분의 문학상은 문학 활동이나 문학 확산을 위한 기여도를 고려하여 시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어떤 문학 단체에서는 순수한 작품성만으로 따로 ‘작품상’을 마련하여 시상하기도 한다. 문학 활동은 창작 활동과 창작에 따른 작품집 발간, 문예지에 작품 발표 상황을 고려한다. 발표한 작품의 문학성이 평가의 중심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학회에 대한 기여도는 행사 참여도와 아울러 임원으로서 봉사한 경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기준은 이번 31회 수상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계속되었다.

2024년 제 31회 수상자 선정을 위하여 심사위원 6명은 10월 2일 오후에 한 자리에 모여서 임원진이 준비한 자료를 놓고 의논과 토론을 거듭하여 만장일치로 변종호 수필가를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후보로 올라온 회원들의 작품성과 문학적 공적도 훌륭하였으나 자료를 검토한 결과 우열을 가늠하는데 어렵지 않았고 전원 합의로 결정할 수 있었다. 수상자인 변종호 수필가님께 축하드리고 곁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셨을 부인과 가족 여러분께도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수상작인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와 <‘사이’를 읽다> 두 작품은 예술 작품의 감상을 통하여 현실을 돌아보는 구성으로 독자들에게 울림을 준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문학 양식을 시, 소설, 희곡, 수필의 4대 장르로 구분하여 생각한다면, 수필은 다른 세 양식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시, 소설, 희곡은 허구이고, 수필은 사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과 해석이라는 일반적인 특성 말고도 언어의 탄생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가 태초에 인간이 신에게 드리는 기구의 말씀이기에 신비스럽고 함축적이라면, 소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로 구성하여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서사의 언어이다. 희곡은 서사를 이야기가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각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신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수필은 인간이 인간에게 전하여 감동을 불러오는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언어이다. 신을 감동시키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을 감동시키는 언어라는 점이 수필 언어만이 가진 특성이다.

수필은 다른 사람에게 공명을 일으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문학 양식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수필은 감동적인 체험을 소환하여 그것을 거울삼아 자아를 성찰하고 성찰의 결과를 삶의 원리로 개념화한다. 이러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수필이 많은 독자에게 공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기원으로 하는 한국 수필의 기본 구성이다.

변종호 수필가의 수상작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와 <‘사이’를 읽다> 는 한국 수필의 기본 구성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는 북을 메우는 과정을 참관한 체험을 통하여 자아의 예술 활동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암시하였고, <‘사이’를 읽다>는 예술작품의 감상이라는 체험을 소환하여 자아를 들여다보고 아울러 사회 현상에 대하여 비판적 생각을 토로하였다. 두 작품은 다르지만 사유의 과정이나 구성의 방법에서 변종호 수필가의 작품 창작과정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변종호 수필가가 가지고 있을 일상은 성찰의 거울이라는 수필관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판단된다.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는 예불 의식에서 행하는 북소리에 매료되어 북을 메우는 장인을 찾아간다. 그 결과 장인의 삶과 북메우기 과정의 어려움에서 북소리의 예술성에 더욱 감동하는 과정을 서사와 묘사의 적절한 조화를 통하여 형상화해냈다. 이런 과정에서 북소리의 불교적 의미까지 천착해냈다. 법고는 지상의 모든 가죽을 가진 축생의 제도를 위해, 운판은 날짐승을 위해, 목어는 수중 생명을 위해, 범종은 인간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게 하고 지상의 중생은 물론 지옥의 중생까지 제도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북을 메우는 사람이 예술가라면 수필가도 예술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은근히 자신의 예술성을 위한 정진을 돌아볼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들리지 않는 북소리로 깨달음을 재촉하고 있다. 수필이 잘못되면 지나친 교시적 주제 제시로 거부감을 갖게 하는데 이 글에서는 그러한 교시성이 숨어있기에 더 큰 교훈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사이’를 읽다>는 최수앙의 작품 <사이>를 감상하면서 관계를 통한 인간의 본질과 실존적 문제를 사유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현대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의 반목과 암울함을 비판하였다. 문학이든 어떤 예술이든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민이 스며있지 않으면 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단재 선생의 말씀이다. 특히 수필은 역사에 대한 해석과 고민,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기 좋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업은 수필가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술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수필의 사명에 한 걸음 가까이 갔다고 평가할만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필은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문학 양식이기에 인간의 언어로 창작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변종호 수필가는 한국 수필의 전통을 지키면서 시적 서정과 소설적 서사를 아우르는 작품으로 수필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고 평가할만하다. 문학회에 대한 공적이나 문학 활동에 대한 평가는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다.

다시 한번 수상을 축하드리며 더욱 정진하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홍은 박영수 박영자 장병학 이방주 이영희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

변종호

예불을 알리는 법고 소리가 선암사 경내를 돌아 산기슭을 기어오른다. 두~둥 두~둥 위를 시작으로 안에서 밖, 밖에서 안으로, 우에서 좌로 이어진다. 양쪽에서 스님 두 분이 춤을 추듯 커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번갈아 두들긴다. 쏟아져 나오는 파동이 전율을 일으킨다.

생경한 의식이라 경건하게 지켜봤다. 저승으로 떠난 소가 북이 돼 울었다. 두두~둥둥 울리던 북소리가 가슴을 뚫는다. 붉은 해를 삼켜버린 조계산으로 사위는 흐릿해지나 방문객은 합장하고 바라본다. 한동안 울리던 북소리가 지상의 생명을 제도한다는 범종 소리로 끝맺었다. 귀갓길, 울려 퍼지던 대북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두들겨 맞아야 울고 울어야만 길을 내는 대북은 여러 쪽의 소나무로 몸통을 짜고 양면은 소가죽을 쓴다. 부드러운 암소 가죽은 튀는 음을 잡아주는 저음으로, 강한 울림에는 탄력 있는 황소 가죽을 쓴다. 북채가 닿을 때마다 가슴을 울렸던 선암사 법고 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묘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대북에 궁금증이 일었다.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북 장인을 찾아 생생한 체험담과 풀어놓지 못한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담고 싶지만 쉽지 않았다. 해당 기관에 신원과 목적을 알리고 나서야 소재지를 알아냈고 어렵사리 공방 방문을 허락받았다.

두 시간을 달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일흔 중반의 산전수전 겪어낸 장인 얼굴은 주름은 깊었으나 자그마한 체구에도 눈동자만큼은 집념으로 이글거렸다. 거칠고 뭉툭한 손이 악수를 청했다. 도심 외곽의 폐업한 공장을 임대하여 쓰는 공방은 예상보다 낡고 허름했다. 3월 초인데 사무실에서 메모하는 손이 시렸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국가무형문화재에 작업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대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역에서 서성대던 열 살 소년을 데려다 넝마주이를 시켰고 소아마비를 앓은 불편한 다리라 늘 양을 못 채우자 뺨을 때려 한쪽 고막을 잃게 했다. 맞고 욕먹는 게 싫어 탈출한 아이는 여수 시장을 배회하다 황용욱이 거두며 북에 입문하였다. 몇 해가 지난 뒤 왜 저를 거뒀냐는 질문에 스승은 손재주가 있어 보였다며 북을 배우면 놀림도 받지 않고 밥도 굶지 않을 거라 했단다.

좋은 북의 으뜸 조건은 가죽이다. 습도 변화에도 소리가 달라지지 않는 가죽을 얻는 과정은 번거롭고 고단했다. 도살장에서 신선한 생피를 구해 계분과 석회를 탄 물에 사흘 담갔다 무딘 칼로 털과 지방을 제거하기란 좋은 가죽을 얻겠다는 집념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이런 가공은 악취와 폐수 문제로 할 수가 없어 지금은 공장에서 구매하여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부위별로 장인만의 기술로 깎아서 쓴다.

“여태 가죽하고만 살았지, 가족과는 살지 못했다.”는 장인. 가죽을 다루느라 자다가도 눈뜨면 가죽,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죽밖에 떠오르지 않아 자식도 하나밖에 낳지 못했단다. 이렇듯 옥죄는 삶이니 친구나 지인이 있을 리 없어 삼겹살에 소주 한잔의 추억도 없고 헤어진 가족의 안부도 모르고 살았노라 술회하던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다리가 불편한 데다 북을 두들기며 소리를 잡느라 삼십 대 후반에 남은 귀마저 잃었다. 얼마나 황망하고 막막했을까, 북 만드는 사람이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라 생명을 잃은 거나 매한가지다. 운명처럼 닥친 시련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한 생을 살면서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역경을 견뎌낸다는 것은 처절한 몸부림이자 서러움이었다.

악성 베토벤이 “고난을 헤치고 환희로”라는 자신의 좌우명처럼 처한 운명을 극복하고 베토벤 교향곡 5번과 9번이라는 명곡을 남기지 않았던가. 장인은 무시로 북을 치면서 전해지는 음을 손으로 익혀나갔다. 북을 치면 가죽이 떨리며 이어지는 미세한 진동을 손끝으로 감지하고 가슴으로 느끼며 세밀하게 조율하였다. 귀 대신 손으로 고르는 명고名鼓의 출산이 하루아침에 가능했겠나, 무수히 두들기고 만지며 시행착오를 반복해 가면서 얻어낸 인간승리였다. 오죽하면 보청기를 낀 귀보다 손끝을 더 믿는다니 가슴이 먹먹했다.

쇠심줄같이 질기고 힘겨웠던 고난 속에도 좋은 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리니 이름이 알려졌다. 북을 칠 줄 알아야 잘 만든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고수鼓手에게 북을 배운 것도 한몫했다. 서울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울려 퍼지던 대북 메우기에 참여를 시작으로 청와대 춘추관 대북, 임진각 통일전망대 대북, 대전엑스포 대북에도 동참하였다. 이후 안양시민 대북과 천태종 해동사 법고, 평창 패럴림픽 대북, 서울 관문사 법고는 순수한 장인의 손에서 태어났다.

북 메우기 외길 인생에 어찌 고비가 없었겠나, 수없이 넘어야 했던 크고 작은 고개로 흔들리기도 했고 좌절도 했으리라, 단순 밥벌이로 여겼다면 진즉 던져버릴 일이었다. 흰머리 성성해지고 몸은 굽어가도 전통을 잇겠다는 각오는 변함이 없다. 사실 우리의 전통은 맥이 끊기면 잇기가 어려운데 인식과 경제 논리로 외면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가시밭길을 자식이 걷겠다니 후계를 두는 기쁨보다 천륜으로 억장이 무너졌다. 자식만큼은 힘들게 살지 않길 바라며 말렸으나 끝내 전수의 길로 들어서자 받아들일 수 없는 며느리가 대문을 박차고 떠나던 날 장인 가슴에는 대못이 박혔다.

낯선 거리에서 가림막이 없이 찬바람과 맞설 때는 부모형제를 향한 그리움은 사치였다. 그의 인생에 쉬운 길도 곧은 지름길도 없었고 양지쪽 돌산에 뿌리내린 꼬불꼬불한 소나무처럼 모질게 살아낸 인생역정이다. 그런 당신이 2022년 10월 국가무형문화재 제725호 악기장으로 지정되었다. 60여 년간 소아마비와 청각장애라는 신체적 불편함과 불우한 가정, 열악한 환경을 모두 극복하고 우뚝 선 정상이 아닌가. 무형문화재 악기장이 목표는 아니었고 좋은 북메우기를 업보로 여기며 숭고하게 인생을 바친 보상일 뿐이다.

끝이 안 보이던 결핍과 시련이라는 인고의 강을 건너선 당신, 마지막 간절한 바람은 선덕여왕신종처럼 영구 보존되는 북을 메우는 것이다. 가죽은 100년이면 산화하기에 형상과 소리가 변하지 않게 연구개발한 영신의 북이 선보일 날도 머지않다는 생각이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북을 만들겠다는 당신은 오래된 북이라도 손길이 닿았던 것은 단박 골라낸다고 했다, 지나칠 정도로 고집스러운 삶을 이어온 임선빈 장인의 투박한 손끝이 미세한 떨림을 고르고 가슴으로 느끼며 탄생한 대북은 맑지만 결코 가볍지 않으며, 멀리 퍼지나 거슬리지 않고, 낮지만 무겁지 않은 명징한 북소리는 그의 혼이 가득 담긴 영혼의 소리인 것을.

 

‘사이’를 읽다

변종호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극도로 불안한 저 표정은 무엇일까. 발을 뗄 수가 없다. 국립청주현대미술관의 수장고다. 자그마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의자에 앉아있다. 파르스름한 핏줄이 드러나는 피부에 브래지어 자국이 선명한 뽀얗고 작은 가슴이다.

세상을 원망하는 얼굴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한 눈동자가 압권이다. 반달형 눈썹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코와 다문 입술, 턱밑의 그늘까지 디테일하다. 팔은 구부리고 깍지 낀 양손을 허벅지에 올려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 살짝 치켜든 턱, 배코로 밀은 머리에 움츠린 어깨, 오므린 발가락에 뒤꿈치는 들고 발끝을 세웠다.

최수앙의 작품 ‘사이’다. 2007년에 발표했으며 레진에 유채와 나무를 사용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치는 이곳에서도 통했다. 사실 예술작품은 관전자의 앎의 정도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지 않은가. 문외한의 시선으로 나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도닥거려 주고 싶은 심정이다.

한동안 바라보자니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 없어 보인다. 탈출이 불가능한 곳에 감금돼 만신창이로 수난당하던 성 노리개가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희망이라곤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낙담 어린 표정을 그려낸 작가의 표현력이 놀랍다.

국립현대미술관 자료를 열람했다. 1975년생인 최수앙은 인체를 주제로 작업하며 지극히 보편적인 것을 놀랍도록 극사실적으로 구사하여 강한 인상을 주는 작가로 2014년 가장 유망한 젊은 조각가로 인정받았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두려움과 슬픔, 욕망과 긴장, 인간 감정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인체 묘사에서 일부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강렬하게 다가섰던 ‘사이’라는 작품도 한 사람의 특정인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다양한 신체 부위를 합체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회화가 아닌 조각에서 피부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라는 사실도 알았다.

현대 미술가들은 본인 장르만 고집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대해 깊은 사색을 통해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다. 사실 문학도 장르 간 벽이 허물어져 시인이 수필과 소설을 쓰고 수필가도 시와 소설을 쓰며 소설가가 시와 수필을 쓰기도 한다. 물론 이에 따른 역작용도 있으나 예술이 대중에게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은가.

작품 ‘사이’로 대중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어림생각으로는 무시로 마주치는 현실의 문제와 관계망 속에의 처세와 존재감, 불확실한 미래에 현존하는 삶과 맞닥뜨리는 정상과 비정상, 다름과 틀림,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사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에게도 틈과 사이는 있게 마련이며 적정해야 한다는 모호함이 따르지만, 주어진 환경이나 의도로 더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한다.

정을 나누며 협력하고 살았던 것은 옛일로 치부하고 사라진 이타심으로 주장은 강하고 다양하다. 복잡다단한 세상이라 의견 차이를 좁히고 합의를 위해 장을 마련하지만 익숙지 않은 토론으로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상대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고 자신의 견해와 어떻게 다른가를 분석해야 함에도 허점을 공격하며 제압하려 든다. 이런 연유로 서로 견해차만 확인하니 사이는 더 벌어진다.

자연과학자 최재천 교수는 “자연계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은 인간과 개미이며 성공의 바탕은 희생과 협력이라 했다.” 과연 지금 우리는 희생과 협력을 하는가. 무한 경쟁이 펼쳐지는 현실에도 희생과 배려, 협력은 필요하다. 배려 없는 경쟁은 자신뿐 아니라 조직까지 병들게 한다.

근래, 관계망 속에 물들어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며 이해보다 반목이 이어지는 암울한 사회의 단면이다. 한쪽 탓이라고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양분돼 있다는 사실이다. 한쪽이 하는 일이 옳아도 반대하고 같은 편이면 옳지 않아도 동조하는 불편함이 이어져도 개선의 의지조차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작품을 보고 나신의 조각처럼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던 적이 없었다. 관전자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불안해 보이는 여인은 어쩌면 쫒기 듯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딱히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강렬하고도 오묘한 표정의 작품 ‘사이’는 상대만 탓하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작가의 따끔한 일침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