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신인상 심사평
변환과 성숙의 과정을 담아낸 작품
이방주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순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으로부터 벗어나서 존재의 변환과 성숙을 지향한다. 수필가의 변환과 성숙은 창작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제재를 상관물로 거울삼아 자신의 모순과 불완전을 비추어 스스로의 현재와 역사를 살펴보면서 미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래서 수필은 수필가의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작가나 독자의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문학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2023년 수필미학 겨울호(42호)는 존재의 변환과 성숙이라는 문학적 효과를 거둔 김종성의 〈바람에 이는 상념〉과 장봉환의 〈엄마의 영역〉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수필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두 분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김종성의 〈바람에 이는 상념〉은 바람이라는 제재를 시작으로 연상되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의 속성은 혼자서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바람으로 인해서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나 나뭇가지의 흔들림이나 계절에 따라 변환하는 자연의 모습에 의해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서 바람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작가는 이러한 바람의 존재를 통하여 자기 존재와의 상관성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바람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바람처럼 ‘세상을 여행하면서 모든 것과 만나 서로 부딪치며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남 곧 관계가 없을 때는 존재의미가 없지만 관계를 맺으면 잠재된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것은 곧 욕망의 흔들림으로 변환한다. 욕망의 흔들림에 망설이다가 자신을 돌아보면서 흔들림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신과 세계와의 변증법적 통합을 이루며 자기 존재를 변환하고 성숙해간다.
수필은 작가가 인식한 세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방법에 따라 문학성도 영향을 받는다. 김종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바람에 이는 상념〉이라는 작품에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었다. 세계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도 중요하지만 개성 있는 문체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작품은 화려한 수식도 없이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겸손하고 담백한 문장이어서 그가 주장하는 철학성이 더 깊이 있는 여운을 주었다.
장봉환의 〈엄마의 영역〉은 삶의 영역이 변화함에 따라 변환하고 성숙하는 존재 의미를 심도 있게 담아낸 작품이다. 작가는 죽음의 방식을 고민하며 엄마의 영역을 떠나 좌절의 공간에 머문다. 목련처럼 시들어 떨어지는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할 만큼 좌절하는 자아였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병구완으로 다시 엄마의 영역으로 돌아가 생활하게 된다.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면서 ‘엄마의 소리’를 듣는다. “밥 안 주나?” “어데 가노?” 하는 치매인 엄마의 소리를 작가는 황혼증후군의 소리로 치부한다. 어머니 장례를 모시고 나서도 엄마의 소리는 환청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제는 “밥 안 주나?” 하는 엄마의 소리나 바람과 햇살, 산새 울음소리 등 엄마의 영역에 있는 모든 소재들이 자신의 생명을 일깨워 주는 바람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죽음의 소리가 아니라 생명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다. 여기서 작가는 삶의 의지를 다시 생각한다. 시들어 떨어지는 목련이 아니라 하얗게 하늘로 날아오르며 다시 피어나는 목련을 본다. 생명의 일깨움이다. 엄마의 영역의 원형(arche pattern)은 생명의 공간인 자궁을 상징한다. 엄마의 영역에서 존재의 변환과 정신적 성장을 쉽게 체험할 수 있는 일상을 통해서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창적 인식과 치밀한 구성이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자신의 체험을 소환하여 실존의 의미를 구현하는 치밀한 구성으로 주제를 확연하게 전달하였다. 존재의 공간과 존재하는 방법의 상징적 의미가 매우 깊이 있고 치밀하게 연계되어 문학적 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삶의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에서 철학적 의미를 발견한 작품으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대상 인식에 임하는 작가라 평가된다. 수필은 자칫 교훈성에 치우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교시성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더 큰 공명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김종성의 〈바람에 이는 상념〉과 장봉환의 〈엄마의 영역을〉은 사실과 체험의 문학인 수필문학의 독자성을 충분히 담아냈다. 특히 인간의 존재 방식에 따라 정신적 세계가 변환하고 성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 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당선작으로 선정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라 평가된다.
신인상을 받는 두 분께 다시 한번 축하를 드리며 수필 문단에서 큰 역할을 하시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신인상 작품
바람에 이는 상념
김 종 성
경주에 있는 독락당에서 하룻밤을 유한 적이 있다. 그곳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책을 읽으며 마음 수양을 하면서 얼마간 기거했던 상념의 공간이다. 고택 별채 대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낸다. 어디서 나는지도 모를 덜컹거리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바람은 겨울밤 고요를 깨고 내 잠까지 앗아가고 만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방문 앞까지 와서 서성인다. 밖으로 나온다. 바람 소리는 별빛을 막아선 담벼락 너머에 있는 듯하다가 어느새 자기 존재를 어둠 속으로 숨기고 만다. 그러다가 다시 굉음을 내며 내 곁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어느새 나도 바람이 되어 끊겼다가 이어지고, 공중으로 올랐다가 내려오고, 별처럼 빛나다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삼라만상은 모두 바람인가 보다. 아니 빛이면서 어둠인가 보다. ‘나’라는 존재도 바람 따라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리라. 독락당 겨울밤은 바람 소리에 깨었다가 다시 잠든다.
나는 바람이다. 오늘도 세상 곳곳을 누비며 구경한다. 계절마다 새로운 곳에서 태어난다. 겨울이면 시베리아 된바람이 된다. 행여 문틈이 있으면 안으로 들어가려고 덜컹덜컹 몸싸움을 한다. 봄이면 나는 대지에 봄비를 신나게 뿌린다. 땅속 새싹들이 동토를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준다. 살짝 만져주면 새싹은 나풀나풀 춤도 춘다. 나뭇가지에도 연둣빛 물이 들어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꽃눈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여름에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내가 다가가면, “아이 시원해” 하며 고마워한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간혹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나운 태풍이 되기도 한다. 비와 강풍을 몰고 와 큰 손해를 끼친다. 미안하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되어 들판을 지날 때면, 벼들이 꾸뻑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늦가을 나무들이 고운 색깔로 갈아입을 때면, 내가 살짝 만져도 “안녕히 계세요” 하며 작별 인사를 한다. 낙엽을 땅에 떨구며 슬픔에 빠진다.
바람은 세상을 여행하며 모든 것과 만나 서로 부딪치면서 자기 존재를 알린다. 자기를 드러내기 전에 잠자는 만물을 흔들어 깨워 존재하게 한다. 모든 것은 바람을 만나면 자기 존재의 구체성을 확보한다. 바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물과 대상은 이름 없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제한적이지 않다. 바람은 언제나 어디서든 생겨난다. 만물에는 생명과 같은 바람이 잠재하기 때문이다. 봄바람은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게 하고 그 향기가 온 세상에 스며들게 한다. 바람이 물을 만나면 물결을 일으켜 반짝인다. 아름다운 윤슬도 바람과 함께 빛난다. 윤슬과 함께 춤추는 바람의 색은 신뢰감을 준다. 불가를 지나가는 바람은 불꽃을 피운다. 이때 바람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밝은 빛이고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위로의 언어이다. 생명이 있는 만물에 색깔을 입혀주는 것도 바람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생존의 징표이고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드러내는 일이다.
바람이 생명을 불어넣는 통로이지만, 한편으로는 욕망의 근원이기도 하다. 바람風은 ‘바람望’’, 즉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욕망을 부추기며 존재를 수시로 흔드는 것이 바람의 또 다른 속성이다. 마음에 일어나는 욕망의 바람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다.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건대 얼마나 많은 시간 바람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렸던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안달하며 애태웠던 삶이었다. 남의 욕망을 모방하는 데 급급해 나만의 색깔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나 자신을 지우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살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이제 내 안에 일어나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작은 욕망의 바람 앞에 초조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바람, 살아 있음을 보증하는 바람, 정신을 살찌우는 나만의 바람, 이런 바람은 어떤 색깔일까. 나의 남은 생애가 바람 불어 좋은 날이기를 희망해 본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어쩌면 퇴임 후의 내 모습을 두고 한 말 같다. 오랜 시간 한 방향만 보고 잘 달려왔다. 치열한 경쟁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용케 잘 견뎌냈다. 나의 관심 분야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려고 용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지난 세월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모든 열정과 의미를 바람이 삼켜버린 것 같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아니 우물쭈물하다가 내 생애도 가을 문턱에 이르렀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는 일 서러울 것도 없다. 폭풍이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나도 그러한 것 뿐, 꿈을 꾸고 깨어나는 일, 그리울 것도 없다.”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몸과 마음이 모두 움츠려든다. 이젠 세월의 등 뒤로 흘려보내도 될 바람이 여전히 내 주변을 감돌고 있다. 바람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바람 따라 오늘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모양새다. 어쩌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사는 것이 옳을는지 모른다. 마음대로 바람의 색깔을 조정할 수 없을 바에야 바람에 나를 맡기는 것도 방법이리라. 그것이 춘풍이 아니라 북풍한설인들 어쩌랴.
엄마의 영역
장 봉 환
2011년 초부터 나는 집을 나와 강원도 춘천의 소양강 가에 있는, 월세 17만 원짜리 허름한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나는 거기가 더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가장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실존을 걸고 죽음의 방식을 고민했다. 알고 지내던 다큐멘터리 감독이 나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내가 제안했고 감독은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이 다큐에 나의 모든 것을 쏟아놓고 그리고 어느 화창한 봄날, 목련이 지듯이 그렇게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었다.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흙으로 가네.’ 가끔 김광석의 노래 ‘회귀’를 들었다. 그러던 차에 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시골에서 혼자 살던 어머니가 쓰러졌다고 했다. 지체없이 빨리 내려오라는 명령이었다.
한 달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이 의사의 최종 진단이었다. 누나들과 상의한 끝에 시골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마지막 임종을 위해서였다. 누나들과 동생들이 모두 모였으나,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갈 데 없던 내가 남아서 돌보다가 때가 되면 연락하기로 하고 모두 떠났다.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손을 꼭 잡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왠지 그 밤은 다시 밝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는 혼자 술을 마셨다. 함께 눈을 감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는 아침을 상상했다. 빈 술병이 방안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하루이틀 지나는 동안, 신기하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미음을 떠서 입에 갖다 대도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밥을 한 술씩 드신다. 병원에서부터 일어나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일어나 앉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병세가 호전되어 갔으나 치매 증상이 심하게 나타났다.
“밥 안 주나?”
간밤의 숙취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을 덮어쓰고 잠들어 있는데, 날이 밝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소리치신다. ‘밥 안 주나?’라는 이 호령은 ‘밥 안 묵나?’라는 뜻이기도 했다. 둘이 겸상을 차리고 내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어머니도 밥을 드셨다.
치매 노인에게 나타나는 증상 중에 ‘황혼증후군’이 있다. 사전에서는 ‘노년기에 이르러 해가 지거나 밤이 되었을 때 장애 행동이 악화되고, 사고가 혼란스러워지거나 방향 감각이 상실되는 증상’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좀 달리 해석한다. 치매 노인에게 황혼은 더 어둡기 전에, 더 깜깜해지기 전에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가고자 하는 곳이 친정집이든, 큰아들집이든, 딸내집이든, 그 어디든. 그래서 해가 져서 어두워 오면 갑자기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서 문을 나서게 되고, 그러다가 길을 잃고 낯선 곳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갔다. 시동을 걸고 속도를 내면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지신다. 그런데, 한 20분을 달려서 성주대교를 건너면서부터는 표정이 어두워지신다.
“고마, 집에 가자.”
라며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그래도 나는 못 들은 체하고 좀더 달린다. 한 5분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머니가 큰소리로 역정을 내신다.
“고마, 가자카이!”
그때 나는 유턴을 해서 집으로 향한다. 성주대교를 건너면 저 멀리 가야산 영봉이 보랏빛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비로소 안도하신다. 집에 도착하면 황혼은 지고 이미 밤이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와서 맞이하는 그 밤은 어머니에게는 이제 쉬어야 할 시간, 누워야 할 시간, 내일을 위해서 자야 할 시간이 된다. 더이상 불안 증세나 장애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치매 증상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단기기억은 점점 지워지고 장기기억만 남는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표준말로 하면 잘 못 알아들으시고, 고향 사투리로 말해야 알아들으셨다. 이를테면, 부엌은 ‘정지’, 누나는 ‘누부야’, 먼지는 ‘미금’, 저녁에는 ‘적답에’라고 해야 알아 들으셨다.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적답에 누부야 온다카네.”라고 하면 바로 알아들으시고,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부터 눈물을 글썽이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머니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무이 어데 갔노? 어무이 어데 갔노?”라며, 돌아가신 지 10년도 더 되는 그 시어머니(할머니)를 찾았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터는 그 기억도 다 지워졌는지, “오메 어데 갔노? 오메 어데 갔노?”라며, 역시 돌아가신 지 한참 되는 그 어머니(외할머니)를 찾으셨다. 어머니는 벌써 아득한 옛날, 댕기머리 팔랑이며 뛰놀던 소녀 시절로 돌아가신 것일까?
그러다가 어머니는 밑바닥 깊숙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 모든 기억들을 다 지우고, 잠자는 동안 조용히, 나를 남겨두고 혼자 눈을 감으셨다. 장례를 마치고 나는 근 한 달여를 문을 걸어 잠그고 어머니가 누웠던 그 방안에 칩거하며 보냈다. 나는 나대로 그 방식으로 상(喪)을 치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마땅히 따로 갈 곳이 없었다. 소양강 강가의 그 허름한 원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때, 어디선가 “밥 안 주나?”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부엌으로 나가서 라면 하나를 겨우 끓여먹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시 살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지향도 없이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이곳, 어머니가 평생을 살았던 시골집에 눌러앉아 살고 있다.
여기는 엄마의 영역.
여기, 어머니만이 느낄 수 있는 바람이 있고 햇살이 있다. 어머니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산새 울음소리가 있다. 밤이 되면 어머니만이 알아보는 달이 뜨고, 새벽녘이면 어머니는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그 달을 향해 자식 새끼들 무탈하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구구국구, 구구국구”
오늘도 밤이 되면 달이 뜨고, 그 옛날의 산비둘기는 아직도 살아서 산에서 운다. 봄이 되면 이 곳, 엄마의 영역에, 하얗게 하늘로 오르던 그 목련은 다시 피어날 것이다. 어머니는 죽고, 나는 살았다. 살아서 가끔 산비둘기처럼 숨어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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