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심사평]꽃의 말씀으로 듣는 삶의 지혜(智慧)

느림보 이방주 2023. 10. 18. 21:47

제30회 충북수필문학상 심사평

꽃의 말씀으로 듣는 삶의 지혜(智慧)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충북수필문학회가 수여하는 제30회 충북수필문학상은 이효순 수필가의 작품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와 <토끼풀 화관>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충북수필문학상은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가운데 작품성과 문학 활동, 문학회에 대한 기여도를 고려하여 수상자를 결정한다. 문학상은 작품성만을 기준으로 수상자를 정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 회원도 있지만, 대부분의 문학상은 문학 활동이나 문학 확산을 위한 기여도를 고려하여 심사한다. 그래서 어떤 문학 단체에서는 순수한 작품성만으로 따로 ‘작품상’을 마련하여 시상하기도 한다. 문학 활동은 창작 활동과 창작에 따른 작품집 발간, 문예지에 작품 발표 상황을 고려한다. 문학회에 대한 기여도는 행사 참여도와 아울러 임원으로서 봉사한 경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기준은 이번 30회 수상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같은 방법으로 계속되어 왔다.

2023년 제 30회 수상자 선정을 위하여 심사위원 6명은 10월 6일 오후에 한 자리에 모여서 임원진이 준비한 자료를 놓고 의논과 토론을 거듭하여 만장일치로 이효순 수필가를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후보로 올라온 회원들의 작품성과 문학적 공적이 모두 훌륭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나 자료가 충분하여 전원 합의로 결정할 수 있었다. 수상자인 이효순 수필가님께 축하드리고 곁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셨을 부군과 가족 여러분께도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21세기는 존재의 성스러움보다는 물질적 효용성이 가치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인간의 감성과 지혜보다는 데이터의 양과 질, 그리고 해석 능력이 삶의 질을 좌우하는 빅 데이터 시대로 변질되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가 인간의 지혜(智慧)와 감성을 따돌리고 저 멀리 질주하고 있다. AI는 인간이 공유한 데이터를 기계가 해석하고 종합하지만, 지혜는 인간이 각기 다르게 소유한 지(知또는 智)를 인간 스스로의 슬기[慧]로 분별하여 통합하는 능력을 말한다. 잊고 살았지만 이것을 우리는 NI(Natural Intelligence 자연지능)라 한다.

NI가 AI로부터 쫓김을 당할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하여는 지혜와 감성의 회복이 시급하다. 누구는 AI에게 부탁해서 소설을 창작했다 하고, 누구는 단 몇 초 만에 시를 한편 썼다고 한다. 누구는 문학상 수상 소감을 AI에게 부탁해서 만들어 발표했다 하여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편리함을 넘어서 인간성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잃어버릴 위기라고 생각된다. 이즈음에 수필문학은 수필가의 지혜와 감성으로 창작되어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공명(共鳴)의 문학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수필 창작에는 어떤 과학적 물질적 데이터도 크게 소용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적이고 정감어린 교양과 정서만이 필요할 뿐이다. 수필 창작은 인간의 교양과 정서를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통합한 결과로는 독자에게 공명을 일으킬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과 문학적 상상만이 독자에게 깊은 깨우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효순 수필가의 수상작 두 편은 AI로부터 위협받는 이 시대에 문학을 예술로 남게 할 수 있는 지혜를 일깨워주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창작에 대한 그의 지혜는 대상에서 신성함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수상작인 작품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와 <토끼풀 화관>은 모두 꽃을 소재로 하고 있다. 꽃은 인간이 수렵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신성함을 거부할 수 없었다. 꽃은 생명의 근원이며, 탄생의 신성함을 우리네 삶의 주변에서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소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문인들은 꽃을 소재로 삶의 철학을 드러내고 정서를 표출했을 것이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에 이별의 아픔을 담았고 <산유화>에서 존재 고독에 대한 고민을 노래했다. 박두진은 <꽃>에서 꽃의 신성성을 비유적으로 개념화하였으며 김춘수는 <꽃> <꽃을 위한 서시>에서 존재에 대한 인식의 과정과 인식의 어려움을 고백하였다.

수필가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흔히 꽃을 대상으로 했는데, 시대적 분위기 때문인지 꽃의 인문학적, 철학적 해석보다 물질적 효용성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에 비해 이효순 수필가의 수상작 두 작품은 꽃의 생태학적 본질 이해를 통하여 인간의 삶과 정서를 발견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지혜를 담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두 작품에서 꽃은 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사람들의 살이와 살림을 담아냈다. 수필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는 ‘석곡’을 통하여 생활 철학을 발견하였으며, <토끼풀 화관>에서는 토끼풀로 만든 화관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을 담아냈다. 이를 문학 창작의 기본 과정인 인식과 형상이라는 측면에서 미적 가치와 문학적 효용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는 아주 오랜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까지 석곡과 함께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가장 바람직한 삶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 규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규정한 바람직한 삶의 방향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작가는 유치원 교사로 교직에 들어 원장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어린아기들을 가르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왔다. 가장 성스럽고 보람된 일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어려움도 또 그만큼 컸을 것이다. 한 자모로부터 어린 석곡을 분양받아 10여 년 동안 석곡이 자라 꽃을 피우고 향기를 보내고 낙화하는 과정을 바라본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기들을 맡아서 가르치고 돌보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거기에는 향기도 있고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어렵게 꽃을 피워 향기롭고 단아한 모습이지만 쉽게 지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꽃이 진 꽃대 아래에서 돋아나는 신아(新芽)를 발견하고 경이로움에 감탄한다.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가 여기에 있고 인간의 생애도 결국 순환의 원리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작가의 상상은 이런 맥락에서 손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수필적 안목과 상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석곡의 일생에서 ‘나의 일생’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얀 꽃이 한 송이 피어’ ‘은은한 향기가 마음을 사로 잡’고 고고하고 단아한 모습에 눈길이 끌렸던 것이다.

나는 꽃눈이 생기기 시작하면 꽃 필 때를 기다리며 인생을 되돌아본다. 자연의 섭리는 주어진 법칙에 따라 계절과 순응해 가며 자신의 삶을 엮어간다. 식물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생의 여정과 같이 자라고, 꽃을 피우며, 향기를 발하고 새 촉을 만들어 가족들을 늘인다.  나는 석곡을 닮고 싶다. 언제나 묵묵한 모습으로, 넉넉하고 아름답게 진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를 나누어주면서 조용하게 지내야겠다. 외로워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산골 도랑물 같은 맑음을 지니며 살았으면 한다. 세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석곡처럼 보내야 하겠다.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에서

여기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인생의 참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석곡의 향기를 묻히며 외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여정’이라 규정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석곡이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상관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다짐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도 깊고 진한 의미를 넌지시 일깨워주고 있다.

<토끼풀 화관>은 꽃을 소재로 했지만 전하는 메시지의 방향은 다르다.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가 삶의 원리, 생활의 철학을 담아냈다면, 이 작품은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하여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산책 중에 예초기에 깎여나갈 위기에 있는 토끼풀꽃을 꺾어 와서 화관을 만들면서 유년 시절을 기억을 소환하여 그리워한다. 유년시절 화관을 만들어 씌워주던 담임선생님을 생각하다가 상상의 나래를 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손녀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토끼풀꽃 작은 화관을 만드는 동안 내 유년으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을 데리고 풀밭에서 화관도 함께 만드시고 꽃시계도 만드는 낭만적인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작은 기억들이 잊히질 않는가 보다. 선생님께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씌워 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히 내 마음에 남아있다. 
손녀딸들을 가끔 한 번씩 영상으로 만난다. 하지만 늘 1%가 부족하다. 그 채워지지 않는 작은 정은 공간을 초월한 내 마음을 파고든다. 나 혼자 짝사랑하는 것도 안다. 그러면서 자꾸 그리워한다. 손녀들은 나처럼 이렇게 애틋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드나 보다. 하긴 고희가 넘었으니 많기도 많다. 언제 그렇게 잡히지 않는 세월을 많이 보냈는지. 끈으로 묶어도 묶이지 않는 시간을…. 
<토끼풀 화관>에서

 

인간의 모든 정서는 그리움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리움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랑도 그리움으로 시작하고 미움도 그리움이 좌절할 때 생겨난다. 기쁨은 그리움의 대상이 현실로 주어질 때 오고, 슬픔은 그리움의 대상을 상실할 때 느낄 것이다. 가족은 그리움의 가장 기본적인 대상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인간의 감성이 세월을 넘어서 또는 공간을 넘어서 드러날 수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본성을 개성 있는 인식과 문체로 형상하여 큰 감명을 준다.

이와 같이 수상작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와 <토끼풀 화관>은 꽃에서 삶의 철학과 그리움을 발견한 수작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상을 신성하게 바라보는 인문학적 지혜가 아니면 이룰 수 없다. 꽃의 마음이 아니면 들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AI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지혜 즉 NI만이 이룰 있다는 말이다. 인간 이효순 수필가의 지혜와 감성으로 발견한 성스러운 인간의 삶의 철학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효순 수필가는 등단 이후 현재까지 잔잔한 목소리로 조용하고 겸손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 지역 일간지에 좋은 수필을 연재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낸 법도 자랑하는 법도 없다. 2006년 월간 《한국수필》로 등단하여 17년 동안 5권의 작품집을 냈다. 전국 단위 수필 전문지에 좋은 작품을 발표하여 충북 수필문단의 위상을 드높였다. 수필은 요란스런 문학이 아니다. 수필은 시끄럽게 드러내지 않아도 언젠가는 작품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효순 수필가는 수필의 진수는 물론, 조용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은 수필가의 바른 모습을 소리 없이 보여준 모범적인 문인이다.

이효순 수필가가 제 30회 충북수필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기뻐하고 축하드리며 더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의 영혼을 맑게 하는 문인이 되시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

이 효순

동쪽으로 향한 하얀 창(窓) 안으로 겨울 햇살이 곱게 드리운다. 가까이 다가가니 석곡의 은은한 향기가 스친다. 오래전에 한 자모님이 작은 석곡 네 촉을 파란 화분에 심어 선물로 주셨다. 나는 그것을 10여 년 가까이 키우면서 이젠 그들과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정으로 세월을 엮어가고 있다.

처음에 석곡이란 이름을 접하면서, 꽃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감을 받았다. 그 향기와 가련한 꽃의 고운 자태에 비해 너무 이름이 투박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이 시작되면 밖에 내어놓았던 석곡을 실내로 들여놓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햇빛, 바람, 비를 맞으며 나름대로 강인하고 건강하게 자란 그들을 거실로 들여놓는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아파트 같으면 베란다가 적절하지만, 주택인 관계로 적당하게 둘 장소가 없어 항상 동쪽 아침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 실외에서 들여놓을 때 잎이진 줄기마다 꽃눈을 달고 꽃이 피기까지를 기다리는 그들을 보면 마음이 막 설레어 온다.

석곡은 잎이 지고 나면 멀뚱하고 밋밋한 줄기만 남는다. 정말 볼품없는 모습으로 그렇게 겨울을 보낸다.

어느 날 외출하였다가 돌아와 보니 촘촘히 달았던 꽃대들이 다 떨어지고 주 당 한 송이씩만 간신히 살아남아 있었다. 그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석곡을 보는 순간 느닷없이 은은한 향기와 고고한 자태를 펼칠 사이도 없이 자신의 삶을 접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련하였다.

내가 석곡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서울 어느 연수원이었다. 겨울이었는데 잎도 하나도 없는 줄기에 하얀 꽃이 한 송이 피어 그 은은한 향기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밖은 하얀 눈이 내리고 싸늘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곳 실내 창가엔 흰 꽃 한 송이가 고고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내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 후, 사십 대 후반에 들어서며 가정생활도 거의 안정이 되고,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던 석곡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석곡은 꽃이 지고 나면 꽃이 진 줄기 아래에서 신아가 생겨난다. 새 생명이 생기는 것이다. 잎이 다지고 꽃이 진 그곳에서 돋아난 새 촉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비바람, 햇빛을 받으며 줄기는 굵어지고 싱싱해져 기온이 싸늘해진 늦가을부터 꽃눈을 만든다.

나는 꽃눈이 생기기 시작하면 꽃 필 때를 기다리며 인생을 되돌아본다. 자연의 섭리는 주어진 법칙에 따라 계절과 순응해 가며 자신의 삶을 엮어간다. 식물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생의 여정과 같이 자라고, 꽃을 피우며, 향기를 발하고 새 촉을 만들어 가족들을 늘인다.

나는 석곡을 닮고 싶다. 언제나 묵묵한 모습으로, 넉넉하고 아름답게 진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를 나누어주면서 조용하게 지내야겠다. 외로워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산골 도랑물 같은 맑음을 지니며 살았으면 한다. 세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석곡처럼 보내야 하겠다.

석곡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 새로운 나날은 시작된다. 꽃이 필 때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은 흐른다. 서글퍼 눈물 흘리던 시절, 기쁨에 가슴 벅차 마음 설레던 날들, 그 속에 석곡의 향기를 묻히며 주어진 외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여정이다.

올해도 석곡은 잎이진 줄기 아래 새 촉을 만들어 새봄을 맞이하고 있다. 한해의 삶을 빈틈없이 준비하고 마련하는 식물의 모습에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고통을 견디어 내며 미래를 준비하는 그들. 하지만 자연의 질서에 어김없이 순응하며 주어진 길을 가는 석곡을 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연분홍빛 뇌산, 연노랑의 황환, 키가 작은 만월, 자줏빛의 자금성….

말없이 그러나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차분하게 연출해 가는 석곡들처럼 내 인생길 주어진 여정을 걸어가야겠다.

한 송이 가련하게 핀 석곡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토끼풀 화관

이효순

피아노 의자 위엔 토끼풀꽃으로 만든 화관이 놓여있다. 참 오랜만에 만든 풀꽃 화관이다. 그곳에 눈길이 머문다. 아직도 내겐 정겨운 여린 감정이 깃든 곳이 있음을 본다. 시간이 많은 계단을 쌓았지만, 유년의 시간은 마음 한 곳에서 아직까지 작은 숨을 쉬고 있다.

남편은 화관을 바라보며 시간이 많이 있었냐고 말한다. 내가 할 일이 없이 무료해서 그 화관을 만든 거로 생각했나? 그렇게 내겐 들렸다. 남편이 내 마음을 읽을 수가 없지. 어찌 내 감성까지 읽을 수 있을까? 나의 내면이 담긴 것을 …그 말에 눈물이 핑 돈다.

날마다 가는 산책로에는 토끼풀꽃이 많이 핀다. 지날 때마다 네잎클로버가 혹시 없을까 해서 한 번씩 더 바라보다 지나친다. 오늘은 산책로에 있는 철쭉과 잡초 이발하는 날인지 작업복 차림의 인부들이 여러 명 웅성거린다. 그 옆에 날렵하게 생긴 예초기가 여러 대 보인다. 그들은 철쭉과 잔디를 차례대로 깎는다. 잘려 나가는 풀과 나무들이 안쓰럽다.

산책로 옆의 공간에는 토끼풀꽃이 많이 피어있다. 제법 반그늘에서 키가 많이 자랐다. 예초기로 자르기 전에 풀꽃을 뜯기 시작했다. 잘려 나갈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반대쪽에서 풀 깎는 소리를 뒤로하고 꽃 핀 대궁을 길게 뜯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잘려 나갈 것이기에 빠른 손놀림으로 뽑았다. 며칠 전부터 그 토끼풀꽃에 눈길이 자주 멎었다. 마음에 담긴 토끼풀 화관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토끼풀꽃이 무리 지어 있는 곳을 보면 꼭 그런 마음이 들었다. 참 오랜만에 마음에 품었던 것을 오늘은 실제로 하게 되었다.

갑자기 미국에 사는 손녀딸이 생각났다. 이곳에 살면 이런 풀밭에 와서 함께 화관을 만들 수도 있을 텐데. 그런 마음으로 토끼풀꽃을 열심히 뽑았다. 옆 잔디밭엔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더 요란해서 귀에 거슬렸다.

귀가해서 우리 집 작은 마당 꽃 작업장에 앉아 뜯어온 토끼풀꽃을 길이별로 나란히 놓았다. 참 오랜만에 만들어 보는 화관이다. 산책할 때마다 한번 만들어 보고 싶던 화관이다. 나는 남자아이만 셋을 키웠기에 그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만들어 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모처럼 마음 한곳에 두었던 손녀들을 생각하며 만들게 되었다. 마음마저 설렌다.

토끼풀꽃 두 개씩을 차례로 엮어갔다, 30분 남짓해서 둥근 화관이 완성됐다. 먼저 남편에게 씌워 주었다. 마다하지 않고 내 하는 대로 좀은 쑥스러운 모습으로 포즈를 취했다. 남편을 찍어주고 나도 머리에 화관을 썼다. 현관 입구 단풍나무 앞에서 내 모습을 촬영했다.

토끼풀꽃 작은 화관을 만드는 동안 내 유년으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을 데리고 풀밭에서 화관도 함께 만드시고 꽃시계도 만드는 낭만적인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작은 기억들이 잊히질 않는가 보다. 선생님께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씌워 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히 내 마음에 남아있다.

손녀딸들을 가끔 한 번씩 영상으로 만난다. 하지만 늘 1%가 부족하다. 그 채워지지 않는 작은 정은 공간을 초월한 내 마음을 파고든다. 나 혼자 짝사랑하는 것도 안다. 그러면서 자꾸 그리워한다. 손녀들은 나처럼 이렇게 애틋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드나 보다. 하긴 고희가 넘었으니 많기도 많다. 언제 그렇게 잡히지 않는 세월을 많이 보냈는지. 끈으로 묶어도 묶이지 않는 시간을….

온유와 소명이가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특별한 것이 없다. 직장생활로 제대로 한번 함께 놀아주지 못했다. 제 엄마가 집에 함께 있으니, 내게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언젠가 제 엄마가 건강검진 가는 날 우리 집에 맡긴 적이 있다. 그때는 주말이어서 나도 집에 있게 됐다. 두 손녀기 옥상에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불편한 다리를 간신히 옮겨 옥상으로 갔다. 올라가서 물뿌리개로 바위솔에 물을 함께 주었던 던 일, 그것이 사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무엇 하나 뚜렷하게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며 정들었던 많은 것들을 잊을 수가 없다. 내일은 사진 촬영한 것을 명성이에게 보내 손녀들에게 보여 주라고 해야겠다.

그 아이들이야 어찌 되었든 보고 싶은 그 마음을 만든 화관을 보며 전하고 싶다. 피붙이가 무엇인지. 작은 것 하나가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니 말이다. 토끼풀꽃 화관을 코로 가까이 대어 본다. 풀꽃의 은은한 냄새가 스민다. 손녀딸 온유와 소명이의 웃음처럼 맑은 향기 속에 내 마음을 담는다. 현관 옆 주목 아래 맥문동 푸른 풀밭에 토기풀 화관을 놓는다. 스마트폰을 누른다. 설레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