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청주와 청주 사람들

지금 율봉역에는

느림보 이방주 2023. 6. 11. 16:19

지금 율봉역에는

 

저녁 8시, 율봉공원은 활기가 넘친다. 유월초순, 비릿한 밤꽃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무대 위에 한 여성이 음악소리에 맞춰 춤인지 체조인지 흔들어댄다. 공원 잔디밭까지 점령한 사람들이 함께 흔들어댄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흘끔흘끔 쳐다보니 긴 머리 큰애기도 있고 빠글빠글 볶은 머리 아줌마도 있다. 엄마 따라온 젖먹이 아기는 유모차에서 흔들어댄다. 걸음마 어린 아가도 아장아장 흔들흔들 흔들어댄다. 조밥에 입쌀 섞이듯 사내들도 듬성듬성 흔들흔들한다. 강아지들은 잔디밭에서 제멋대로 뛰어다닌다. 밤이다. 밤꽃 냄새 흐드러지는 밤이다.

세상이 흔들어대니 나도 흔들린다. 사람들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간다. 철강으로 납작하게 만들어 세운 역마(驛馬) 세 필이 달리는 모습으로 멈춰 섰다. 철판으로 만들어 세운 봉수대도 있다. 버너를 깔았으나 봉화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봉수대 하나로 연기 다섯 줄기를 어찌 올리려나. 화강암으로 깎아 만든 북이 세 개다. 두드려도 소리가 날 리 없다. 생명을 잃은 역사학습공원이다.

몇 계단 내려가면 너른 잔디밭이 나온다. 율봉역 터라 한다. 율봉역은 율봉도찰방이 파견되어 충청도의 17개 역을 관리한 중요한 역이었다 한다. 역리, 역노가 300여명, 열 마리도 넘는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니 그 규모를 알 만하다. 1896년(고종 33) 칙령으로 역이 폐지될 때까지 도로와 교통의 중심지였던 율봉역이 잔디밭 아래 묻혀있다

잔디밭 귀퉁이에 한옥 한 채가 앉았다. 최근에 복원한 모습이다. 마당에 정돈된 석자재를 보면 본래 건물의 규모와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복원된 건물은 정면이 4칸, 측면이 2칸으로 자그마하다. 율봉역사가 아니라 충청병마절도사 관아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관아라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병마절도사 관아가 왜 율봉역 자리에 와 있을까. 1923년에 율량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2014년 택지를 조성하면서 복원했다고 하니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고초를 겪는 것은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 들리는 말로는 시에서 율량지구 택지조성공사 때에 율봉역을 복원하여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려 하였으나 공사를 맡은 회사와 협의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문을 나오면 불망비 4기가 서 있다. 풍우에 닳고 총 맞은 자국도 있어서 비문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주로 정6품 찰방들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불망비이다. 아마도 율봉역에 세워졌던 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역사에 무지한 내 눈으로 봐도 영 생뚱맞고 이야기의 앞뒤를 이어 생각하기 어렵다. 아무리 대충 공원을 만든다 해도 율봉역을 잔디밭으로 묻어버린 것도 부족해서 충청도병마절도사 관아를 그 자리에 복원하고, 그 건물 앞에 찰방의 선정 영세 불망비를 세워 놓은 교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른 잔디밭은 강아지들의 천국이다. 최근에 시에서 그 옆에 강아지 운동장도 만들었다. 역마가 쉬면서 몸을 추슬러 다음 여정을 준비했던 역사의 터에 개들이 뛰어 논다. 시대의 변화를 실감한다.

율봉역 말고도 청주는 흙속에 묻히고 무너진 역사가 너무 많다. 남석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마구잡이 등산로가 되어버린 와우산토성은 어쩔 것인가. 청주읍성은 허물어지고 충청관아는 공원이 되었다. 당산토성은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용두사는 철당간만 남았고 흥덕사는 정체불명의 모습으로 서 있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내일을 지탱해주는 주추가 된다. 주추 없는 역사는 바로 설 수 없다.

관아 건물을 돌아 봉수대로 돌아오니 아직도 시민들의 저녁운동이 활기에 넘친다. 활기찬 시민에게 역사를 제대로 깨워주는 역사공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밤꽃 향기가 흐느적거린다.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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