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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해의 <어항을 들여다 보며>수필과비평 2021년 11월호

느림보 이방주 2021. 8. 30. 21:36

심사평

 

에코페미니즘으로 인식하고 상상으로 형상화

 

이방주

 

이인해님의 <어항을 들여다 보다>를 당선작으로 한다. 문학은 자아와 세계의 갈등으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한다. 수필은 삶의 세계에서 오는 ‘갈등 치유 과정’이라는 체험의 기억을 소환하여 작가 나름의 철학으로 해석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때 보다 인상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소환된 기억을 현재의 시점에서 상상을 통하여 재구성한다. 이런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는 공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에게 두 개의 세계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어항 속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어항 밖이라는 일상의 세계이다. 처음에 두 세계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곧 ‘어항 속의 세계가 인간 세계와 너무도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면서 자아를 성찰하고 나아가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게 된다. 결국 어항속의 세계와 어항 밖의 세계의 원형성을 찾아 하나의 생태로 변증법적 합일을 이룬다. 또한 이 작품에 수용된 생태주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종(種)은 개체의 많고 적음이나 우열, 강약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등하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삶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우열이나 성별이나 종에 따라 중심과 주변이 없이 수평적인 사고로 ‘더 따스한 마음으로 무슨 말이든 중얼중얼’ 말하여 서로를 대할 때 세계는 아픔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제를 명확히 했다.

이 작품은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되는 에코페미니즘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변증법적 상상으로 삶의 원형적인 개념을 형상화한 수필적 사고를 보여준 작품이다. 앞으로 좋은 글을 써서 수필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항을 들여다 보다

 

이인해

 

꽃을 기르던 아내가 요즘은 열대어를 기르기 시작했다. 고희를 넘으면서 백여 개의 화분에 물을 주기도 분갈이를 해주기도 힘들어 그쪽에서 부득이 눈을 뗀 것이다. 어느 날 조그만 어항을 내놓고 닦아 물을 담더니 친구가 비닐봉지에 가져온 열대어 몇 마리를 받아 물에 넣었다. 인조수초도 구해다 넣고 조그만 형광램프도 켜놓고 물고기들의 춤을 바라보는 것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고기들은 반가워 오로로 모여든다. 불빛 아래서 그들의 춤은 귀엽고 어린아이들 재롱처럼 아름답다. 어떤 날은 아내가 “저것 좀 봐요 새끼를 낳고 있어요.” 신기한 듯 그 처음 보는 장면을 보라는 것이다. “먼 바다에서 자기네들끼리 살게 놔둬야지 그걸 왜 좁은 어항에 가두고 못할 짓을 해.” 나는 혀를 찼지만 아내는 으레 하는 내 심술이거니 생각하는지 “당신은 꽃을 길러도 저대로 산에 들에 살게 놔두지 왜 데려다 고생시키느냐고 하잖아요?” 하는 것이다. “그게 맞는 말 아닌가?”라며 나는 또 반박을 했지만 아내는 늘 나보고 그래서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느 날인가 일이 일어났다. 물을 갈아주었는데 고기들이 전부 죽어 버렸다. 아내는 아는 고기박사에게 전화를 걸더니 고기가 죽은 이유를 알았다며 다시 사다 넣는다. 이사 온 열대어 식구들은 금방 새끼를 낳고 한 달쯤 후에는 처음 올 때보다 몰라보게 자랐다. 수초 사이로 수없이 많은 새끼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큰 고기가 제 새끼를 잡아먹기도 한다.

저 조그만 어항 속의 세계가 인간 세계와 너무도 같은 것이다. 죽고 살고 밥 먹고 배설하고 서로 잡아먹고….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머물면 쓰러지는 생의 비탈길을 그저 뛰어 갈 수밖에 없는’ 저들의 각박한 현실을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들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방안의 작은 어항을 벗어나지 못해 울며 웃으며 하루하루 살아갈 뿐일는지도 모른다.

물고기에게도 자신의 운명을 감지하는 본능적 지혜가 있다는 걸 나는 오랫동안 취미로 하는 낚시에서 터득했다. 저수지의 물을 뺄 때 고기는 절대로 입질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놀랍게도 자신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발달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먼 나라에서 지진이 일어나도 입질을 않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 변화에도 저들은 절대 먹이를 먹지 않는다. 솔개가 오면 금방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제 어미 품으로 숨어드는 것과 똑같은 본능 아닐까? 비가 오려고 할 때 청개구리가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어찌 되였든 흰 쌀밥 같은 몽돌들을 깨끗이 씻어 바닥에 깔아주고 갖가지 수초를 심어주고 때때로 밥을 주니 우리가 보기에 저들은 안정을 누린다고 믿는다. 하지만 물고기들의 더 깊은 속마음은 무엇일지 모른다. 아내는 저들을 열심히 돌보고 식구처럼 즐거워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고기들의 세계와 인간의 바람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항시 공기방울이 계속 올라와서 산소 공급이 잘 되고 있고 고기들은 예쁜 몸짓으로 끝없이 춤을 추고 있다.

고기들은 색깔은 희고 붉고 넓적하기도 하고 훌쭉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어항 을 바라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왜 저들의 자유를 빼앗고 오히려 즐거워하는가? 아내와 나는 너무나 정서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까지 즐거워하는 어항을 내다 버릴 수도 없고 그저 같이 바라보며 공유하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도 어떤 신의 어항 속에 갇혀 울고 웃으며 사는 것 아닐까? 모두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만들어 사는 것 같지만 자기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 운명의 울타리가 바로 어항 같은 것 아닐까? 어항 속을 들여다보며 마냥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아내와 아이들 옆에서 저 고기들과 인간을 공통분모로 놓고 나는 남다른 사유의 오솔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고기들도 어느 순간은 잠을 잔다. 그들의 휴면시간에도 꿈이 있을까? 아무리 가까이 눈을 들이대도 저들의 속사정은 알 수가 없다.

소년 시절 내게 글을 가르쳐 주던 어떤 스승께서 하루는 내게 고즈넉이 충고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자네 이 나뭇잎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봐.” 함께 걸어가다가 느닷없이 길가의 나뭇잎 하나를 뚝 따서 불쑥 들이대시며 하시는 말씀이었다. 나는 약간 생뚱맞은 질문에 당황했지만 탄소 동화작용이나 엽록소의 이치 등 아는 대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스승께서는 “겨우 그 정도밖에 모르는가? 이 나뭇잎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 자네는 새롭게 만나는 세상을 남다르게 신기해하는 건 좋으나 깊이 연구한 것도 없이 평범한 지식을 너무 외치는 것 같아.” 나는 당황했고 그 말씀에 “나뭇잎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얼결에 반문을 했다. “그럼 땅속에서 수분을 길어 올려 저렇게 생성활동을 하며 한 계절을 푸르게 살아가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가능하겠어?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생각이 있다고 보는 게 어떤가? 다만 사람과 동식물은 언어가 통하지 못할 뿐이야.” 그 순간 나는 난을 기르는 어떤 분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수년간 난을 기르며 난과 친해져서 대화를 합니다. 물을 달라면 물을 주고 물을 주면 난초가 고맙다고 해요” 믿어지지 않는 얘기라 지나쳐버렸는데 그쪽이 사뭇 심상치 않게 되살아나서 혼자 깊은 생각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고기들의 춤은 정교한 의사 표시이고 언어일 수 있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어떤 자연인이 휘파람을 부니 먼데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손끝에 앉는 걸 텔레비전에서 봤다. 그 순간 나는 그런 그가 그것을 할 수 없는 우리들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각각 다른 외모를 하고 인간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몸짓을 하며 기쁜 듯 슬픈 듯 살아있는 어항 속의 물고기들! 내 몸의 몇 만분의 일에 불과한 그의 몸속 조그만 두뇌 조직이 명령하는 생의 의지가 쉴 사이 없이 순간순간 생존을 몸짓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신비할 뿐이다. 귀 기울여 봐도 알 수 없는 높은 이성의 담 너머 얘기처럼 안타깝기만 하다.

더 들여다보자. 더 가까워 보자. 아내가 하듯이 더 따스한 마음으로 무슨 말이든 중얼중얼 등에 업힌 돌도 안 된 손자랑 얘기하는 것처럼…

 

 

 

수상소감

 

늦게야 예수를 만난 알타반의 기쁨으로

 

이인해

 

소년시절부터 시를 써왔으나 60이 넘어 등단하였고 다시 20여년 후 나는 소망의 문을 두드려 어렵게 수필의 문을 열었다. 세 명의 동방박사 외에 또 하나의 동방박사 알타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만난 게 떠난 지 수십 년 흐른 생의 말년 70여세라고 들었다. 알타반은 본디 성품이 너무 착했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 동화에 나오는 행복한 왕자처럼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선행을 하느라 늦게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늦게 온 알타반을 칭찬하고 축복했다고 한다.

가난과 싸우며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너무나 어려웠던 나의 문학이 이 세상 향한 나의 조그만 기여이었길 바라는 지금의 내 마음을 모든 독자가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길 간곡히 바란다. 지금 80세 내가 몇 편의 수필을 더 쓸 수 있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의 눈을 뽑아 성냥팔이 소년에게 날라다준 제비처럼 혼신을 다해 쓰고 싶은 심정이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수필과비평의 무궁한 발전을 축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