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미음완보(微吟緩步)하는 느림보

느림보 이방주 2022. 6. 17. 15:01

미음완보(微吟緩步)하는 느림보

 

 

《느림보의 수필 창작 강의》

최근에 펴낸 수필 창작 이론서이다. 하늘이 내린 숙제처럼 짊어지고 살았는데 고희에 이르러 가까스로 등짐을 벗었다. 그래서 표제에 느림보라는 이름을 넣었다.

사람들은 나를 ‘느림보’라 부른다. ‘느림보, 느림보 형, 느림보 선생’ 나도 이렇게 불리는 것이 좋다. 나의 모든 것은 이름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담고 싶다고 담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삼십대 중반이었던 1980년대는 온 세상이 숨 쉴 틈도 없이 허겁지겁 역사의 길을 질주하던 때이다. 특히 정치나 경제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가 지배하였다. 등소평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며 중국 경제를 채근했다. 누구나 ‘꿩 잡는 매’가 되는 것을 정답으로 여겼다. 통치자들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창시한 이른바 드로몰로지(Dromology)라는 질주학을 내세우며 민중을 압박하는가 하면 민중은 민주주의 향하여 저항하였다.

느림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이런 질주의 시대였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내다보면 언덕길을 느릿느릿 걸어서 출근하는 담임선생이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느린 걸음을 계산하며 해찰을 부렸다가는 큰코다친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교실에 와 있기 때문이다. 느린 걸음을 따라가려 해도 어느새 모롱이를 돌아 사라져 버리고, 느림보 걸음으로라도 언젠가는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질주의 시대에 곧 스무 살 청년이 될 아이들이 내게 느림보라는 이름을 준 것이다.

술좌석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이제부터 ‘완보(緩步)’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언뜻 ‘미음완보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鳴砂) 좋은 물에 잔 씻어 부어들고’하는 정극인의 상춘곡이 생각나서 멈칫했다. 내게는 그만한 여유도 없고 그런 삶이 부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의 의미부여가 불우헌(不憂軒) 선생의 여유보다 더 깊게 다가왔다.

아버지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탐탁해 하시는 표정이 아니었다. 호라는 것은 넌지시 의미가 전해져야지 느릿느릿 걷는 사람이라는 직설을 쓰는 건 좋지 않다는 말씀이다. 아이들이 말해준 완보의 의미를 말씀드리니 숨은 의미가 좋으니 괜찮겠다고 하셨다.

호를 쓸 일이 별로 없어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나 ‘완보’라고 불러 주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인터넷에 애칭을 쓰는 것이 유행하였다. 자연스럽게 완보보다 부르기 편한 ‘느림보’를 겸하여 쓰기 시작했다. 2000년 5월에 지금 블로그 이전 형태인 인터넷 칼럼을 만들면서 이름을 ‘느림보의 세상사는 이야기’로 하였다. 아이디도 느림보의 이니셜로 'nrb2000'으로 하였다. 회원이 500여명에 이르자 온전히 느림보가 되었다. 회원들은 ‘느림보님’ 친구들은 ‘느림보’, 아이들은 ‘느림보 선생님’으로 그냥 느림보로 통했다. 경제도 정치도 민주화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온 세상이 질주하는 시대에 나는 느림보를 고수한 것이다.

아는 분 중에는 ‘느림보가 아니라 빠름보여.’라고 하는 이도 있고, ‘왜 하필 느림보여 그러니까 승진도 못하지.’ 하는 이도 있었다. 특히 아내는 내가 느림보로 불리는 것을 마땅찮아했다. 아마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승진할 나이가 됐는데도 서두르지 않고 노각처럼 늙어가는 것이 보기 싫었을 것이다.

인제는 온 세상이 느림보가 되었다. 드로몰로지가 세상을 다그칠수록 여유로운 삶이 간절한 소망이었는지 ‘느림보 산악회, 느림보 강물 길, 슬로우 시티, 느림의 미학’처럼 세상은 온통 느림보가 대세이다. 사람들은 유행을 좇는 걸로 생각하겠지만, 선각자처럼 나는 이미 느림보로 불린 것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세상이 느림으로 질주를 보완하려 하니 그 또한 삶의 예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아이들이 얹어준 느림보라는 진정한 의미를 잃지 않고 살려고 애쓴다. 등단 20여년이 되자 수필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 개설할 때 ‘느림보의 세상사는 이야기’였던 블로그의 이름을 ‘느림보 이방주의 수필 마루’로 바꾸었다. 느림보는 놓지 않고 ‘이야기’를 ‘수필’로 조심스럽게 올려 보았다. 내친김에 수필 창작 이론서 표제도 느림보가 강의한다고 던져 보았다.

돌이켜보면 본래부터 작은 그릇으로 태어난 ‘느림보 이방주’는 갈만한 데는 다 갔다는 생각이다. 인생이라는 크지 않은 그릇에 인제는 담을 만큼 다 담았다. 본래 작은 그릇임을 알고 서두르지 않았지만 쉬지도 않았기에 천천히 눌러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더 담을 여유가 없으니 세상이 담아준 열매를 흘리지나 말아야겠다. 지금은 이순을 바라볼 제자들이 바라던 느림보가 되는 것이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며 시냇가를 산책하다가 커피 맛이 좋은 카페를 찾아가는 여유로 말이다.

(2022.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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