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보리누름에

느림보 이방주 2020. 3. 9. 10:27

보리누름에

 

 

이제 막 익어가는 보리밭길을 거닐었다. 연두색 보리대궁이 초여름 따끈따끈한 햇살을 받아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성난 까락 사이로 보리 알갱이들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보리밭 둑길을 걸으며 익어가는 보리밭을 바라보노라니 까칠까칠한 까락이 목덜미로 잔등으로 파고드는 기분이다. 뜨거운 태양이 어깻죽지에 내리쬐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처럼 근질근질하다. 그러나 어느새 구수한 보리숭늉 냄새가 난다. 보리밭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보리밭은 고통과 낭만의 기억을 담고 있다.


보리누름에는 일부러 옥천 배바우 마을까지 찾아왔다. 둔주봉에 갔다가 봐두었던 안남면 사무소 앞들이다. 면사무소 광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보리밭 둑길로 접어들면 된다. 갈대 사이로 물이 흐르는 뚝방길에는 찔레꽃이 하얗다.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보리누름에 핀다. 어린 시절 배고픈 하굣길에 바라보던 누런 들판은 소담하기는 해도 어쩐지 고통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보리밭둑에 어김없이 피어나던 하얀 찔레꽃 향기도 아름다움보다 서러움을 앞세웠다.


보리는 온통 아픔으로 영글어간다. 공무원이면서 농사를 짓던 형님은 보리갈이 같은 큰일은 꼭 휴일에만 했다. 늦가을 보리갈이를 준비할 때 미리 두엄 내는 일은 내가 맡았다소를 달래서 길마 위에 옹구를 얹고 삼태기로 옹구에 거름을 퍼 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툰 일꾼이라 균형이 맞지 않으면 옹구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밑을 잘못 여미면 아까운 거름을 길바닥에 다 쏟아버리게 된다. 게다가 소가 심술이 나서 냅다 뛰기라도 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보리갈이 하는 날도 거름뿌리기는 내가 맡았다. 삼태기에 거름을 가득 담아 왼쪽 허리에 끼고 오른손으로 고랑에 펼치노라면 온몸이 거름투성이가 되었다. 늦가을 짧은 해가 설핏하면 손톱 밑에 끼어있는 거름찌꺼기를 찬물로 씻어내는 것도 보리갈이의 고통이었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면 보리를 베고 타작하는 고통이 기다렸다. 가을걷이 때까지 싫어도 먹어야 하는 보리밥이 고통처럼 기다렸다. 보리 베기를 하는 날만큼 짜증나게 더운 날도 없었고, 보리타작하는 날만큼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날도 없었다. 이날은 꼭 오래된 무명 조끼적삼을 입었다. 마당에 보릿단을 펼쳐 놓고 한나절 도리깨질을 하고 나면 어깻죽지가 벌겋게 익었다. 온몸이 보리까락으로 까끌까끌했다. 따가운 햇살은 등줄기가 젖을 새도 없이 땀을 걷어갔다. 몸에 붙은 보리까락은 물로 씻어내도 남고, 무명 적삼에 묻은 보리까락은 보릿짚을 태우며 불꽃에 그슬려도 남았다. 기억은 지금까지 남아 보리밭둑을 걷기만 해도 온몸이 까끌까끌해진다.


보리밥이 고통스러운 것은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시락이 꽁보리밥이라는 불편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보리밥은 곧 가난이라는 부끄러움 말이다.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을 때는 뚜껑으로 반쯤 덮고 먹었다. 보리밥 도시락에는 오이장아찌나 마늘종다리장아찌가 단골 반찬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멸치볶음이나 계란프라이는 보리밥에 어울리지 않는다. 보리밥 도시락에는 장아찌국물이 흘러야 어울렸다. 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나서는 운동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배가 고팠다. 숨어서 먹어야 하는 점심시간의 무너지는 자존심은 어린 시절의 고통이었다. 잘못도 없이 부끄러워야 했던 아픈 추억이다.  

 

돌이켜보면 보리는 고통스런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리갈이 하는 날은 삼촌과 종형제가 다 모여 일을 나누어 했다. 비얄밭에 하루 종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밭둑에 앉아서 곁두리로 먹는 수제비나 밀개떡도 보통 맛이 아니었다. 살기 좋아졌다는 이 시대를 생각해보면 여남은 종형제가 한자리 모여 벽을 허무는 날이 몇 날이나 될까? 사실 나만 보리밥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 세대의 어린 시절은 대개 그렇게 살아왔다.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은 것은 복이었다

 

봄이 되어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날로 푸르게 올라오는 보리를 바라볼 때는 공연히 마음이 들떴었고, 봄비를 맞아 빗방울로 빚어낸 수정 같은 은빛 구슬을 잎줄기에 굴리고 있는 보릿대궁도 볼만한 풍경이었다. 그 푸름은 생명의 표상이었다. 보리밭 하늘에는 으레 종다리가 떠 있게 마련이다. 하늘 높이 치솟던 종다리가 총알이라도 맞은 것처럼 보리밭으로 뚝 떨어지면 쫓아가 보송보송한 새끼를 찾아내던 기억도 아련하다. 종달새 새끼를 찾으러 보리밭에 들어갔다가 보릿대가 뭉그러진 이랑을 발견하고 마을의 어느 누나일까 상상하는 것도 이제 생각하면 한여름의 낭만이었다.


보리 베기를 하는 날이나 타작할 때 감나무 아래 들마루에서 먹던 햇감자도 그렇고, 꽁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풋고추를 고추장 찍어 함께 먹던 가족들의 웃음도 지금은 다 그리운 옛날이다. 보릿단을 마당에 깔아놓고 형제들이 도리깨질로 장단을 맞추던 추억도 그리운 한 가닥 아름다운 그림이다형님은 서툰 아우에게 장단을 가르치고, 누나는 아우에게 우애를 가르쳤다. 고통에서 저절로 배우는 화합하는 삶의 지혜였다.

보리가 익어갈 때 까끌까끌한 추억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찔레꽃 하얗게 피어난 밭둑이 그리운 것은 가난해도 마음만은 행복했던 옛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얗게 표백된 가족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이킬 수도 찾아갈 수도 없는 고통을 나누는 화합의 지혜이었다.

보리누름에 배바우 마을 보리밭둑길을 걸으며 나는 옛날을 찾아가고 초여름 강물은 미래로 달려간다.

    (2014.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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