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꿈
미치겠다. 느닷없이 똥이 마렵다. 아랫배가 쌀쌀 아파오더니 이내 안에서 꽁지뼈를 꾹꾹 찌른다. 어쩐다? 뒷간을 찾아야 한다. 왼손으로 꽁지 아래를 움켜쥐고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기웃거린다. 뒷간을 찾는다. 이런 낭패가 있나. 어디에도 없다. 할 수 없이 어떤 학교로 들어갔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왼손이 밖으로 튕겨지는 것 같더니 황금 같은 똥 덩어리가 바짓가랑이를 지나 뒤꿈치께로 굴러 내렸다. 복도에 내가 지나온 발자국마다 똥 덩어리가 덩얼덩얼 굴러다닌다. 황금색이 투명하다. 어찌 똥이 이토록 예쁜 노란색일까. 예뻐도 낭패는 낭패다. 똥은 똥이잖아. 초등 아이들이 뒤따라오며 손가락질한다.
누군가 교실마다 화장실이 있다고 일러준다. 급하다. 아직도 남은 똥에 뒤가 무겁다. 어느 교실로 뛰어 들어가 화장실이라는 곳에 앉았다. 그런데 예전 우리 시골 측간처럼 똥단지에 걸친 널빤지 똥다리 아래 황금덩이 같은 똥 덩어리들이 수북하다. 왜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복도에 묻혀놓은 똥은 부끄러운데 교실 화장실 남의 똥은 예술처럼 아름답다. 똥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선생님하고 아이들이 둘러서서 똥 누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낭패다. 그러나 후련하다. 그 쾌감에 꿈에서 깨어났다.
우아, 나는 얼른 뒤를 확인해 보았다. 싸지는 않았다. 그냥 꿈에만 싸고 말았으니 낭패는 면했다. 아직은 자다가 똥을 싸서 뭉개기에는 아내에게조차 부끄러운 나이 아닌가. 하마터면 낭패가 될 뻔했다. 천만 다행이다.
낭패狼狽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할 때 잘 풀리지 않고 고약하게 꼬이는 경우’만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낭狼’이라는 이리와 ‘패狽’라는 이리라는 뜻으로 따로따로이었는데 뭉쳐서 은유법으로 쓰이다가 비유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었다. 마치 질곡桎梏이란 말이 차꼬와 수갑을 이르는 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종의 죽은 은유이다.
전설에 의하면 낭이는 뒷다리가 짧아서 다니기에 고역스럽고 패는 앞다리가 짧아서 고역이었다. 낭이는 머리는 나빠도 용맹스러운데 패는 꾀는 많아도 겁쟁이라서 되는 일이 없었다. 둘은 서로의 단점과 장점을 나누어 가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녀야 했다. 둘이서 호흡이 잘 맞을 때는 그럭저럭 살 수 있다가도 둘이 토라지면 이만저만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낭패였다.
낭패라는 단어는 처음보다 의미가 확장되어 다른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내가 씨앗을 잘못 뿌려서 기대하지 않은 열매가 달려도 낭패이고, 자식을 잘못 가르쳐 사회에 해를 끼쳐도 낭패이다. 때로 아무 잘못도 없이 일이 어그러져 돌아가도 낭패라고 한다.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더럽게 배반당해도 낭패이다. 후배나 제자가 내 얼굴에 똥칠을 해도 죄도 없이 낭패다.
아주 어렸을 때 큰형님이 개를 한 마리 얻어왔다. 형은 이름을 ‘케리’라고 지었다. 앞다리가 짧거나 뒷다리가 짧지도 않았다. 진돗개 잡종인데도 영리했다. 사랑채 마루에서 보면 500m는 족히 되는 산모롱이에 작은아버지나 작은어머니가 보이면 꼬리를 흔들며 내닫는다. 그런데 엿장수나 방물장수가 모롱이에 비치면 자지러질 듯이 짖어댄다. 영리한 케리를 가족들이 다 기특하게 여겼다.
케리는 가족들 사랑을 받으며 잘 자랐다. 특히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다. 케리 밥은 할머니가 꼭 챙겨 주셨다. 밥이 부족하면 당신 밥이라도 덜어서 먹였다. 떡 벌어진 가슴, 꼿꼿한 두 귀와 잘 생긴 이목구비가 그럴듯하게 자랐다. 꼬랑지를 내리는 법이 없었다. 개지만 당당했다. 할머니는 집안의 종손인 조카 다음으로 케리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신뢰를 받아서인지 케리가 과만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옆집 당숙을 보고도 짖고 작은아버지를 보고도 숨넘어갈 듯 짖어댔다. 급기야 가족들 보고도 짖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제 밥을 평생 챙겨주신 할머니 손을 덥석 물었다. 사랑이 낭패로 돌아온 것이다. 충견이 맹수가 되었다. 충견의 밑바닥에도 이리의 피가 흘렀던 것이다. 사람들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게 두려워 머리 검은 짐승을 거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데 개도 온갖 정성을 다해 거두는 건 아니었다. 이리의 피가 흐르는 케리가 낭패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잘생긴 케리의 얼굴이 이리의 낯을 닮아 보였다. 아니 이리로 보여 함께 살 수가 없었다. 사랑으로 씨앗을 심은 할머니에게 낭패라는 열매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새벽에 왜 똥 꿈을 꾸었을까? 꿈 이야기를 하니까 황금색으로 누런 똥을 보았으면 재물이 들어올 길몽이라고 아내가 좋아했다. 복권을 사자고 한다. 똥 꿈이 짓지도 않은 복을 한 장 복권으로 이루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가 말해서 아내의 똥같은 꿈을 꺾었다. 꿈에서라도 똥을 쌌을 때 후련했냐고 한다. 아마 그런 것 같다. 너무나 후련해서 잠을 깰 정도였으니까. 그러면 더러운 것이 몸에서 빠져나갔으니 고민하던 것, 낭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원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맞는 해몽인 것 같다. 그렇게만 된다면 재물이 들어오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나도 잘못 뿌린 씨앗 때문에 낭패를 겪을 때가 있다. 평소에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믿고 살았다. 그 말은 좋은 열매가 맺혔을 때 내가 뿌린 씨앗이라는 자부심으로 하는 말이다. 혹 낭패가 열매로 돌아올 때는 나의 업보라 스스로 위안을 삼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라도 씨앗을 함부로 뿌릴 일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씨앗을 좋은 뜻으로 뿌려도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씨앗이 열매로 맺히기에는 연緣이라는 조건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어떤 씨앗을 심었더라도, 거기에 낭패라는 이리가 열매로 맺혔더라도 그건 바로 나의 업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내의 해몽처럼 오늘 새벽 똥 꿈을 타고 가슴에 엉켜 있는 낭패감이 후련하게 빠져 나갔으면 좋겠다. 맞다. 낭패는 똥 꿈처럼 배설될 것이다. 그것도 새벽 똥 꿈이니까. 아니 인생은 어차피 새벽 똥 꿈과 같은 것이 아닌가. 나는 이제 마음 놓고 씨알을 다시 심겠다. 지난날의 엎어졌던 돌길을 상기하면서, 지난 날 낭패를 돌다리 두드리듯 두드리면서 하늘에 기도하면서 정중하게 씨알을 심겠다. 똥 꿈이 복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2019.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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