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꽃보다 아름다운 것

느림보 이방주 2018. 1. 15. 11:59

보훈처 발행 《제대군인》 청탁 원고



꽃보다 아름다운 것

 

삶은 물들이기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칠언절구 <산행>의 결구에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란 명구가 있다. ‘서리 맞은 단풍이 이월의 꽃보다 곱다란 말이다. 정말 그렇다. 진달래를 봐도 봄꽃보다 가을 단풍이 곱고 아름답다.

지난 가을 단양 황정산 원통암을 답사했다. 원통전 용마루가 보이는 마지막 비탈길에서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단풍나무 아래 소복하게 떨어져 쌓인 단풍잎이 수놓은 비단보다 아름다웠다.

원통암은 십 수 년 전 불의의 화재로 잿더미로 변해 버렸었다. 스님은 천막을 치고 살면서 원통전 복원을 위해 힘겨운 노력을 했다. 게다가 그해 큰물까지 나서 절에 올라가는 오솔길마저 다 쓸려나가 단단한 각오 없는 신도는 갈 수조차 없었다. 천년 고찰이 존폐 위기에 놓인 것이다. 어느 해 황정산 등산을 가다가 스님 혼자서 길을 다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스님은 고행이 아니라 수행이라 했다. 그 후 스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전히 복원되어 절경 속의 도량을 이루었다.

뜻은 저기에 있는데 여기 놓인 돌무더기가 너무 커서 힘겨울 때 나는 황정산 원통암을 찾아간다. 노년의 색깔은 젊은 날 삶의 모습에 의해 정해진다. 삶은 결국 나무의 물들이기와 같다. 스님의 수행과정도 결국은 물들이기이다. ‘물들이기를 잘하면 떨어진 단풍이 꽃보다 더 곱다.’라는 진리를 거기서 깨달았다.

 

나는 노년에 이렇게 물들이기를 한다.

20138, 40여년 교직에서 퇴직했다. 갑자기 젊은 교사들에 비해 내가 게을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정년까지 2년이 남았지만 꿈의 직장이라는 교직을 훌훌 던져버리고 나왔다.

막상 사회에 나오니 나를 기다리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방송국 작가를 모집한다기에 이력서를 내보았다. 낙방이다. 아마 어이없었을 것이다. 건물 관리인, 상담원, 관공서 업무 보조 등 어디서도 나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심지어 학교 도서관에서 무료봉사를 하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시들어 떨어진 나뭇잎이 되는 것 같아 초조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지역 대학 평생교육원의 평생교육 강사 교육 과정에 등록하였다. 한 학기 동안 평생교육원 강사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재미있게 수강했다. 20143월 그 대학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교실 강좌를 개설했다. 수강생이 20명이 넘으면 몇 명은 양보하도록 설득하여 15명만 알차게 지도하려고 마음먹었다. 기대와 달리 고작 7명이 등록했다. 다음 학기에는 5명도 안되어 폐강되었다. 등단 후 20년 가까이 수필가로 활동했고, 고등학교 문학교사로 잘 나갔던 나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물들이기도 못한 채 말라버린 나뭇잎 신세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가끔 답사하던 산성과 산사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주제도 없이 도피하는 마음으로 산성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운주산성에 갔다가 고산사 주지 정대스님께 백제 부흥운동에 대해 들었다. 백제 부흥운동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가 스님의 말씀에 빠져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스님은 운동사에 얽힌 전설은 물론 산성과 산사와 백제부흥운동과의 관련성에 대해 내가 가닥을 잡을 수 있도록 한 실마리를 집어 주었다. 그렇다. 산성 산사는 백제 부흥운동사라는 화두로 시작해야 한다.

어떤 일에 주제가 정해지면 거기에 빠져들게 된다. 매주 2회 이상 산성과 산사를 답사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성을 찾고 문헌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이해한 후 답사하면 보이지 않던 사실이 보였다. 백제의 산성 아래에는 거의 백제의 산사가 있다. 산사에 가면 부흥운동사와 관련된 비화를 들을 수 있다. 스님에게도 듣고, 공양주보살에게도 듣고, 신도에게도 들었다. 숨겨진 역사는 전설에서 실마리를 찾아 빛을 보게 된다. 실마리를 찾으면 문헌을 통해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답사한 결과를 답사기로 정리했다.

산성 산사에 가지 않는 날은 수필 창작에 대한 이론 공부를 했다. 전국의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창작 지도를 하고 있는 교수들의 저서를 구해서 읽고, 내가 수필 공부를 해온 실제를 이론에 접목시켜 나름대로 창작지도 요목을 정리했다. 6개월 동안 두 가지 일로 매우 바쁘게 지냈다.

이듬해 청주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 강좌 개설 신청을 냈다. 12명이 등록했다. 창작 실제에 이론을 바탕으로 지도했다. 수강생들이 빨리 이해하고 바로 작품에 적용하여 창작능력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수강생들은 수필의 소재가 될 만한 생활철학을 이미 지니고 있었고 가슴에 정서도 품고 있었다.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방법만을 귀띔해주면 된다. 다음 학기에는 수강생이 15명이 넘어 혼자 지도하기 힘겨워졌다. 지금까지 네 분을 수필가로 등단하도록 추천도 하였다. 앞으로는 수강생도 등단하는 분도 늘어날 것으로 확신한다.

이런 과정에도 산성 산사 답사는 계속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140여개의 산성과 산사를 찾아다녔으니 거의 1,400km를 걸은 셈이다. 201710월 그동안 답사한 산성과 산사 가운데 백제 부흥운동사와 관련이 있는 제재만 가려 65편의 수필을 모아 수필과비평사에서 <가림성 사랑나무>라는 수필집을 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다. 가르치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말이다. <가림성 사랑나무> 란 수필집은 나 혼자만의 결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강생에게 수필 창작을 지도하면서 나도 함께 성장한 것이다.

지난 해 11, 수강생들이 <가림성 사랑나무>의 탄생을 축하하는 조촐한 북 콘서트를 열었다. 꽃향기 아름다운 아담한 카페에 100여명이나 모여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도 오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림성 사랑나무>를 읽으려면 필요한 산성과 산사에 대한 기본 상식을 중심으로 강의한 후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축하 노래까지 곁들여 거의 두 시간 진행된 북 콘서트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수강생들은 내가 베푼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내게 베풀어주었다.

 

떨어진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듯이

2018년 나는 아직도 젊은 67세가 된다. 김형석 교수는 60세로부터 8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했다. 결국 이때를 인생의 황금기로 만들라는 가르침이다. 이제 은퇴 5년에 접어든다. 5년간 나는 하루하루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몸을 단련하기 위한 운동에서, 산성과 산사를 답사하는 산길에서, 수필 창작교실에서 나는 미래의 큰 나무를 생각하며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데 자신을 헌신한다고 말한다. 나는 씨앗을 심는 순간마다 남보다 나를 위한다는 생각이 먼저이다. 내가 뿌린 씨앗이 국가와 사회에 긍정적인 열매를 맺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내 인생의 빛깔을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현직에서도 그랬었지만 지금도 내 인생의 빛깔을 위해서 씨앗을 심는다.

가뭄 속에서도 물들이기에 정진한 원통암 앞에 서있는 단풍나무나, 잿더미 위에서 끊임없이 수행한 스님이나, 조촐한 북 콘서트에서 감격한 <가림성 사랑나무> 저자나 자신의 빛깔 고운 내일을 위해 오늘은 한 알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떨어지는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결코 그냥 오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꽃과 아름다운 열매를 위한 씨앗을 심어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살아야 떨어진 단풍도 아름답고 노년이 행복할 것이다.

   (2018.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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