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태자의 사연이 깃든 고왕암古王庵
신원사에 머무는 동안 시나브로 기우는 해가 계룡산 산그늘을 검은 치맛자락처럼 드리우기 시작했다. 다른 전각은 훗날로 미루고 서둘러 고왕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락장송의 숲길이 좋아 걸어가면 좋으련만 시간이 너무 늦어 승용차에 올랐다. 가풀막진 길이라 자동차도 힘겹다. 차머리 바로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느낌으로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엷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려올 때가 더 걱정이 되었다. 쓸데없이 옛날에 타던 무쏘 생각이 간절하다. 무쏘라면 두려울 곳이 없다. 옛 것은 다 그리운 것이다. 옛 것은 좋았던 것만 생각나게 마련이다. 백제 역사도 그래서 그리운 것인가.
마지막 경사로를 오른 다음 금릉암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여기부터 오솔길을 걸어야 한다.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천천히 걸어 장송이 우거진 모롱이를 돌아가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그 자리에 서서 계룡산 준령들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아직도 눈이 쌓여있는 연천봉이 하얀 머리를 내민다. 산은 어느 산이나 어디서 보나 장엄하다. 오솔길은 이름만큼 순탄하지 않다. 자갈이 구르고 바윗돌이 삐죽삐죽 올라왔다. 나무뿌리가 만질만질하게 닳아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계절을 감지하지 못한 두툼한 옷에 땀이 밴다. 오르막길이다. 주변에 단풍나무 같은 온갖 활엽수들이 빼곡하고 집채만한 바위들이 포진했다. 과연 왕자가 피신할 만한 곳이다. 아마도 돌계단은 최근의 부지런한 스님이 조성한 것 같다. 아름드리나무들과 주변 바위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돌계단을 만들었는데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조릿대 숲을 지나니 고왕암의 처마가 보였다. 이제 다 왔구나. 잠시 서서 땀을 식혔다. 태자도 이곳쯤에서 땀을 식혔을까. 부왕은 잡혀가고 패망한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이곳까지 도망쳐올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부왕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까. 자신을 돌아보며 수없이 후회했을까.
고왕암 마당에 들어서니 절집보다 더 커다란 바위가 막아선다. 고왕암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법당은 산 밑에 바짝 의지하고 서 있다. 법당은 신원사를 바라보고 있고 백제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웠다는 백왕전은 본전을 시위하고 있다. 법당을 지키듯 서 있는 맞은편의 커다란 바위벽에는 마애약사여래불이 부조되어 있다. 법당에 들어가기 전에 스님의 거처가 있었다. 스님은 안 계신지 고요하다.
법당에 들어갔다. 중년의 남자 신도 한 분이 묵상에 잠겨 있다. 바닥이 차다. 나는 방석도 깔지 않고 불전을 놓고 삼배를 드렸다. 부처님을 우러러보았다. 나는 아미타부처님과 석가모니부처님을 잘 구분하지는 못한다.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부처님은 그 수인으로 금방 알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대웅전이면 석가모니부처님, 극락전이면 아미타부처님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런데 고왕암은 현판이 고왕암이니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백제 31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백왕전이 있으니 아미타부처님을 모셨을 것이라 짐작이 간다. 하품중생인을 하고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신 것으로 보아 아미타부처님이 분명하다.
백왕전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다. 바위벽에 부조로 새겨 모신 약사여래를 돌아보았다. 자연석에 새겼는데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옷자락이 늘어진 선이 금방 손을 들어 움직인 모습이다. 입술, 눈썹, 코의 모습도 살아 미소 짓고 있다. 이마에서 금방이라도 땀방울이 구를 것 같은 느낌이다.
자연굴, 법당, 원효굴 다 돌아보았으나 막상 융피굴(피왕굴이라고도 함)을 보지 못했다. 안내도 없고 주변에 석굴은 보이지 않았다. 쉽게 찾을 수 있으면 피신처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요사채 앞에 가서 또다시 기척을 해 보았다. 스님은 계시지 않는다. 마침 샘물가에 보살 한 분이 계시다. 스님을 물으니 출타하셨단다.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다시 왕자님 숨었던 굴을 물었다.
공양주 보살을 따라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다시 문을 열고 뒤안으로 들어가니 거기 굴이 하나 있었다. 굴 안에는 여러 가지 식재료들이 쌓여 있었다. 하긴 이런 곳에 김치 항아리를 두면 자연 냉장고가 될 것이다. 여기 숨어 있으면 아무도 피신처라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굴은 깊지 않았다. 들어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식재료나 항아리 그릇 같은 것이 있어 공양주보살께 미안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굴이라 우선 음습하고 추워 보였다. 가서 웅크리고 앉아서 초라한 태자가 되어 보고 싶었다. 태자 부여융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기서 숨어 있다가 잡혀서 부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 갈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태자는 이곳에 숨어 있다가 소정방의 군사에게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신라의 군사가 와서 체포하여 소정방에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부왕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고 한다. 부여융은 수모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의 부흥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자의에 의한 것인지 당의 요구를 버릴 수 없는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역사의 수모를 겪었다. 그 후 복신과 다른 왕자 부여풍과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부흥군의 명장 흑치상지도 배반하여 당의 벼슬을 받고 부흥군과 맞서게 되는 역사적 비극을 만들어간다.
결국 신라는 당과 힘을 합쳐 부흥군의 내부를 분열시키고 스스로 와해되도록 조장한 것이다. 태자 부여융도 당에서 죽어 그의 부왕과 함께 당의 북망산에 묻혔다. 그의 묘지석이 최근에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확인할 길 없다.
국가에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역사가 있다. 자신의 미래를 잠시만이라도 생각했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봐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이러한 치졸한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복철지계라는 고사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다.
신라는 백제의 왕과 백관을 어떤 생각으로 이민족인 당에 넘겨주었을까. 아무리 무너진 왕가와 백관일지라도 어떻게든 제 땅에서 살게 해주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처형해 버리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민족의 손에 의해 죽는 낫지 않을까 싶다. 부흥군의 토벌도 당과 연합하여 완성했으니 신라는 스스로 통일을 이룬 것도 아니다. 백제의 멸망 과정과 부흥군의 한 맺힌 최후를 보면 1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치스럽고 마음 아프다.
스님을 뵙지 못해 아쉽기는 했으나 한 가지 마음 속 과제를 해결한 기분이다. 마지막 태자 부여융이 죄도 없는 죄인의 몸으로 신라군에 의해 포박당하여 내려온 돌길을 나도 걸어 내려왔다. 같은 핏줄에게 잡혀 이민족에게 넘겨질 때 아마도 그때부터 당하게 될 수모를 각오했을 것이다. 수모를 예상하고 그 자리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후세인들을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망스럽다. 역사가 원망스럽고, 그를 잡아 당에 넘긴 민족이 원망스럽고 죽음을 각오하고 당에 저항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비겁하고 우둔한 왕자가 원망스럽고 그가 다시 부흥군을 섬멸하느라 자신의 백성에 활을 겨눈 말로가 원망스럽다. 어차피 이국에서 떠도는 혼이 되어버린 운명인 것을 말이다. 원망스럽다. 지난 일이지만 나라면 단연코 그 자리에서 당장 죽었을 것이다.
▣ 위치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 중 하나인 신원사의 산내 암자
▣ 창건 : 서기 660년 의자왕의 명으로 동운 스님 창건
▣ 특징 : 융피굴과 마명암, 백왕전
▣ 답사일 : 2016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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