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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두릉윤성豆陵伊城은 사비도성의 북방 요새

느림보 이방주 2017. 5. 12. 22:53

두릉윤성豆陵伊城은 사비도성의 북방 요새

 


 

부여군 임천면의 가림성을 끝으로 백제부흥운동에 관련한 산성 답사를 마치려고 했다. 그런데 가림성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청양에서 두릉윤성 입구를 발견했다. 두릉윤성도 그 발음 때문에 두루미성, 주류성으로 추정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차를 돌려 들어가 볼까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토요일을 맞아 기어이 두릉윤성을 찾아가기로 했다. 세상에 마침이란 건 있을 수 없다. 궁금하면 또 찾아가는 것이다.

728분 시동을 걸고 845분에 백곡리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크지 않은 마을인데 어귀에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부근에 마을의 역사만큼 크고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 충효문이 있었다. 느티나무 바로 옆이 마을 회관이고 경로당이다. 주차장 부근에는 두릉윤성, 3·1만세운동기념비 등 마을의 역사를 이르는 각종 시설물이 조성되어 있다. 작은 마을에 교회도 있었다.

백곡삼일운동기적비에는 191945~6일에 700여명이 참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던 정산 만세 운동에서 백곡리 출신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에 처해지거나 부상을 당한 이들의 사적을 적어 기리었다. 이 백실마을은 백제부흥운동,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운동, 일제 강점기의 끊임없는 저항 운동으로 잃어버린 주권을 찾기 위해 자존심을 걸고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라는 그야말로 백제 멸망 후에 백제의 혼을 살리기 위한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을 이어오는 마을로 전해온다는 표지판도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서 마을을 바라보니 두릉윤성이 있는 계봉산으로 보이는 나즈막한 산이 팔을 벌려 산태미처럼 마을을 쓸어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온갖 볕이 마을로 쏟아져 들어오고 산의 정기가 내려와 담뿍 괴는 형국이다. 인가는 산줄기를 타고 몇 채씩 모여 있고 마을 안길 양쪽은 텃밭이다.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진입로 아래쪽에는 두릅나무가 이제서 싹이 실하게 돋아났다. 텃밭에는 마늘이 이제 다 자라서 알이 굵어가는 모습이다.

마을 안쪽에서는 개가 심하게 짖어대고 개가 짖는 쪽에 한 노인장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두릉윤성 가는 곳을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이 마을에서 올라가는 길은 험하니 지곡리로 가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가는 길이 순탄하다고 덧붙인다. 다시 내려와 지곡리로 가려고 차에 올랐다.

가까이에 있는 지곡리를 찾아가는데도 길이 복잡하다. 앞에 청양으로 향하는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있고 또 일반도로가 있고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일반도로로 연결되는 나들목이 있어 복잡하다. 이런 길들은 사실 이 마을 사는 분들에게 큰 도움은 주지 못하면서 마을만 도막도막 잘라 놓은 꼴이 된다. 내비도 말을 듣지 않아 대중 쳐서 찾아 들어 지곡리(못안골)을 찾았다. 일반도로 가에 있는 두릉윤성 입구 돌비를 발견했다. 좁은 안길로 찾아들어 같다. 마을에 이르자 큰 저수지가 있고 백곡리에 비해 좀 더 윤택해 보이는 마을이다.

사람도 더 많고 생기가 넘친다. 이 마을도 역시 계봉산의 또 다른 줄기가 감싸 안고 있다. 백곡리가 서향 마을이라면 지곡리는 온전하게 남향 마을이다. 마을은 온통 꽃에 묻혀 있다. 차를 세우니 젊은 사람들이 주차장을 일러주며 그곳에 주차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두릉윤성 진입로를 잘 안내해 주었다.

두릉윤성은 마을을 안고 돌아 목숨 걸고 짖어대는 개들을 뒤로 하고 산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가야 한다.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간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덥다. 바야흐로 녹음의 계절이다. 진입로 양쪽에 잡목을 베고 소나무를 가꾸느라 중장비가 마구 파헤쳐 놓았다. 조금 올라가니 진달래를 심고 영산홍을 심어 가꾸었는데 처음에는 화려해서 보기 좋더니 바로 싫증이 난다. 자연 그대로만 어림없다. 능선에 올라가니 두릉윤성 가는 길과 약수터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니 바로 남문지가 보인다.

남문지 앞에 커다란 돌에 백제 두릉윤성과 백제 부흥운동의 사적을 기록해 놓았다. 청양에서는 이곳을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한다. 이곳에서 부흥군의 저항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다. 남문지는 흩어진 돌을 모아 훗날 다시 쌓은 것 같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자연석을 그냥 성황당 쌓듯이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나무를 심었다. 나무 두 그루는 크기로 보아 오래된 나무는 아닌 것 같다. 마치 수문장 같다. 자연석은 다듬어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남문지는 그냥 그렇고 왼쪽으로 돌아 서쪽 성벽을 돌아보았다. 역사가 오래 되어 그런지 남은 성벽도 거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니 몇 군데는 그대로 있다. 그런데 이 성벽이 백제 시대 쌓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옛모습이 남은 부분은 다른 산성에 비해 많이 있지만 축성의 방법이 조잡하다고 할까? 자연석을 그대로 쐐기돌조차 없이 쌓아 올렸다. 아무리 보아도 이런 방법으로 쌓은 성벽이 1500년 남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돌은 상당히 크고 단단해 보였다. 모양이 제 각각이고 크기 또한 일정하지 않아 자로 크기를 재어보는 것이 크게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보통 가로가 30cm~40cm, 세로가 20cm 정도로 들쭉날쭉하다. 성벽 아래 기와 조각이 널부러져 있다. 성안에서 흙이 넘쳐서 성벽을 덮기 시작하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성벽이 땅속에 고이 묻힌 모습은 아니다.

남문지로 올라가 성내를 돌아보았다. 이 성도 외벽을 쌓고 안을 흙으로 채우는 식으로 축성공사를 했다. 서벽을 돌아 북으로 돌아보았다. 북으로 가기 전에 광장이 있고 백제부흥군 영혼을 위로하는 제단이 있다. 아마도 이 지역 자치단체에서 제를 지내주는 모양이다. 들어오는 입구에서 419일이 그 제례일이라는 현수막을 보았다. 제단은 임존성만 못했다. 성내는 잡초를 깎아 다듬어 평평하게 하였다. 이곳에서 살피면 성의 한가운데는 불룩 산처럼 솟았다. 흙으로 쌓아 장대를 만든 것인지 애초에 있는 산봉우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장대로 쓰였음이 분명하다. 올라가 보았다. 장대 부분도 평평하고 두두룩하다. 마치 소잔등 같다. 이곳에 건물도 있었으리라

장대에서 내려와 동쪽 성벽으로 가 보았다. 남벽과 서벽이 200m 쯤 되는데 비해 동벽은 짧다. 100m가 조금 안된다고 한다. 이 성은 테메식 산성이면서 산봉우리를 비스듬히 안고 돌아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가 마치 누에고치 모양이라고 한다. 눈이 어두워서 더 자세한 것이나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동벽은 흙더미 속에 감추어진 돌이 겉으로 몇 개씩 드러나 있다. 그 위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만약에 나무를 베고 흙을 벗기면 어떨까? 그 안에 1500년 성벽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 성안의 평평한 부분에 기와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아마도 이 부분에 매우 큰 건물이 있었던가 보다, 기와편과 토기편을 모아 보았다. 기와는 겉과 속이 다 회색이다. 빗물에 닳고 닳아 만질만질하다. 뒷면에 빗살무늬 같은 무늬가 있다. 토기 조각은 겉은 짙은 갈색이고 깨진 단면은 붉은 황토색이다. 무늬가 있지만 나는 무늬를 통하여 시대를 짐작해내는 재주가 없다. 그냥 1500년 전 그 아스라한 시대에 이곳에 우리랑 똑같이 근심 걱정 많은 이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뿐이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 주둔했거나 이 아랫마을인 백곡리나 지곡리 사람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백제의 혼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밤이 되면 산 아래에서 먹을 것을 이고 올라와 남정네에게 먹이고자 하는 젊은 아낙도 있었을지 모른다. 북에서 핵 공격 위협이 있듯, 남쪽 신라에서 서쪽 당에서 북쪽 고구려에서 군사가 몰려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백제 부흥운동의 4대 거점이라고 한다. 청양 사람들은 한산의 건지산성, 예산의 임존성, 유성의 내사지성(월평동산성)과 함께 두릉윤성을 4대 거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의 규모라든지 견고함으로 보아 중요 거점이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곳이 사비에서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북서방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거나 정찰하는 중요한 요새가 되었음은 분명하고 부흥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저항한 것도 분명해 보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백제의 정무장군이 왕자 충순을 모시고 신라의 품일장군에 대항하여 38일간이나 버티다가 함락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의 성향 또한 외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마도 지역 주민들로 이루어진 부흥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무튼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성이다.

이 성을 따로 찾아 왔으나 어떤 분명한 메시지를 얻지 못해 발걸음이 무겁다. 서기 663419일 이성이 함락되고 그날을 기려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마을을 지나노라니 옛 부흥백제의 모습을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 둘 데 없다.

 

 

 

 

명칭 : 두릉산성(두릉이성)(豆陵山城(豆陵伊城))

문화재지정 : 문화재자료 제156(1984.05.17.청양군)

위치 : 충남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산18

규모 : 성 둘레 560m, 높이 4~5m, 석축 테메식 산성

시대 : 백제 시대

답사일 : 2017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