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방어의 요새 홍성 장곡산성洪城 長谷山城
장곡산성은 장곡면 대현리 마을회관에서 시작한다. 회관 앞 공터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니 목덜미로 싸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더니 시국이 싸늘하니 봄조차 머뭇거리나 보다. 느티나무 아래 놓여 있는 평상에 서리가 하얗다. 낮 기온이 높게 올라간다는 예보가 있어 속옷 한 겹을 벗고 배낭을 메었다. 목에 건 카메라가 계속 덜렁거린다. 마을에 사람이라곤 없는지, 노인들만 추위가 피해 방에 들어앉아 있는지 마을은 조용하다. 개도 짖지 않는다. 장곡산성이 격전지라 1,500년 넘어 아직도 바다에서 오는 적을 두려워 밖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버릇이 남은 건지도 모른다.
마을 골목을 기웃거리며 들머리를 찾았다. 이정표를 아주 작고 예쁘게 세워 놓아서 곁에 두고도 찾지 못했다. 길을 찾았으니 이제 찬바람을 가르며 올라가면 된다. 장곡산성은 바로 앞산 정상이니 오르막길이 가팔라도 참을 만했다. 시멘트 포장길은 다리를 팍팍하게 한다. 서문지에 이르니 벌써 등줄기에 땀이 밴다.
문지에서 양쪽을 살펴보니 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장곡산성은 해발 255m 산줄기에 포곡식으로 쌓은 둘레 1,352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이다. 테메식 산성인 임존성에 비하면 반 정도의 크기이다. 성벽 위에 자란 나무를 다 베어내어 산책길이 생겼다. 솔잎과 활엽수가 떨어져 길은 포근하여 시멘트 포장길에 힘겨웠던 발을 달래준다. 서문에서 남쪽을 향하여 성벽 위를 걸었다. 성벽은 매우 가파른 산비탈에 돌로 외벽을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외벽 산비탈에 지금은 나무가 빼곡해서 밖이 보이지 않았으나, 나무만 없으면 서쪽으로 바다를 통하여 들어오는 길머리가 다 보일 것 같았다. 작은 나무들을 다 베어냈지만 낙엽이 쌓이고 잡초가 우거져 성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천오백년 역사가 흙과 낙엽에 묻혀 있는 모습이다. 스틱으로 낙엽을 긁어 돌을 드러나게 해보았다.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았지만 다듬어 쓴 흔적이 뚜렷하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북쪽 사면은 가지 않고 성안으로 내려갔다.
성안 골짜기는 넓지 않다. 성안으로 들어간 길은 다시 남쪽 성벽으로 올라간다. 임존성이 정상부분의 너른 산줄기를 둘러 싼 테메식 산성이라면 이곳은 좁을 골짜기를 싸안은 포곡식 산성이다. 좁은 골짜기에는 건물지도 있고 풀더미에 묻힌 저수지도 보였다. 저수지 부근에 우물이 있었는지 웅덩이가 있다. 우물지 주변에 사람이 살았던 집터가 있는데 최근까지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것 같았다. 석축을 쌓은 모습이라든지 건물이 있던 자리에 감나무, 뽕나무, 앵두나무, 두릅나무 같은 나무들이 인가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도 넓고 펀펀한 건물지는 산성이 있던 당시에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약 119평이나 되는 다층 건물로 지휘소 같은 주요 군사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상명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하고 건물의 규모를 설명하면서 건물 규모로 보아 부흥운동의 왕궁지 정도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기와편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고지명을 기록한 명문이 나왔다고 하니 부흥운동의 흔적이라고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산성은 서쪽인 장곡면 쪽은 성벽이고, 동쪽인 광시면 쪽은 골짜기가 틔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 용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당이나 고구려가 바다로부터 침입할 경우 방어하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신라를 방어하는 성은 아닌 것 같았다. 임존성의 경우는 테메식 산성이기에 사방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성의 내부에서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시 안내 이정표를 따라 남쪽 성벽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아까 올랐던 정상 쪽으로 올라가 보았는데 성벽의 생김새는 서벽과 다름이 없다. 거의 같은 방식으로 쌓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약간 다른 모습은 성의 내벽과 외벽의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비록 무너진 성벽이라 쌓기의 방법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성의 모양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상에서 장곡면 쪽을 바라보니 훤하게 다 보였다. 다시 되짚어 내려오노라니 북쪽 성 줄기를 다 살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홍성 사람들은 이 산성을 달리 ‘석성산성’이라 하면서 분명히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근거지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한다. ‘석성’이란 이름을 어디에 근거하여 불렀는지 모르지만 지방에서는 거의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대련사를 세운 스님 도침, 왕족 복신, 장군 흑치상지,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 등의 행적과 공적, 그리고 맹약에서 배신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역사적 사실에는 이의가 없으나,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 또는 부흥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이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설이 여러 가지이다. 홍성 사람들은 학자의 주장까지 근거로 대면서 이곳 장곡산성이 가장 확실한 주류성이고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장곡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근거는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홍주목조에서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唐이 지심주支潯州라고 고쳤다.”라고 한 것과 ‘건지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성되어 조선시대에 폐성廢城이 되었다’는 충청매장문화연구원의 건지산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장곡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는 설을 부정하였다. 내포 문화 사학자인 박성흥은 이 성을 답사하고 주류성은 바로 장곡산성이고 백강은 당진 해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성안에 평탄한 건물지가 있고, 백제 말기의 토기나 기와편이 발견되었다는 것, 우물지가 있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 된 것을 근거로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라 하기는 논리가 너무 미약하다. 홍성지방의 관광 안내 책자나 홍성지방 문사들이 장곡산성을 돌아보고 쓴 답사기에는 이곳이 주류성일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나의 스승이신 한국교원대학교 최운식 교수님의 <오누이 성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이라는 논문을 발췌하여 근거로 삼은 글도 여러 곳에서 읽었다. 그래서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은 연기의 운주산성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버리고 정말 장곡산성이 주류성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답사를 끝내고 아직 가보지 않은 학성산성이 근거지가 아니라면 분명 운주산성이나 금이성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전에는 문헌 자료를 보고 장곡산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을 믿었으나 오늘 답사 결과 그 믿음이 희미해졌다. 그래도 장곡산성은 서해안으로부터 들어오는 적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요새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임존성에서 홍성의 소구니 산성, 태봉산성, 학성산성, 장곡산성으로 산줄기를 잇는 일련의 산성들이 마치 하나의 전선戰線이 되어 웅진까지 34.7km, 사비까지 27km 거리인 수도를 가까이에서 방어하고 있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주요거점이나 마지막 저항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백제 부흥군의 주둔지가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백제 부흥은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은 신라와 백제를 가를 필요가 없는데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서로 자기 고장이라고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산성이 많은 홍성과 예산의 백성들도 편안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학성산성으로 향한다.
▣ 소재지 : 충남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해발 255.5m
▣ 시대 : 백제시대
▣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360호 (1998년 7월 25일)
▣ 규모 : 약 1352m 58.025㎡ 포곡식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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