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존성과 봉수산 대련사
봉수산 대련사는 산성과 산사를 함께 찾아가는 내게는 매우 의미 있는 절이다. 백제의 마지막 항전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몇 개의 성 가운데 하나인 임존성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임존성에 연당蓮塘과 연정蓮井이 있어서 절 이름을 대련사大蓮寺라 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서기가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라 말하는 주류성은 연기 운주산성, 금이성, 한산 건지산성, 홍성 학성산성, 이곳 예산의 임존성을 놓고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임존성이 주류성이 아니고 운주산성이 주류성이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는 아주 중요한 성이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과 아울러 전해지는 여러 가지 전설과 답사한 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비암사 주변의 금이성이 중심지이고, 도침대사는 금이성에 흑치상지는 임존성에 머물면서 싸우다가 운주산성에서 최후를 맞아 최후의 삼천 명이 쫓기다가 비암사 부근의 토굴에서 몰살당한 것이 아닐까 혼자 추정해 본다. 품에 모시고 다니면서 기도하던 불비석은 비암사 탑신에 숨겨두고 백제 부흥을 부처님께 발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산 대흥면을 거쳐 임존성 가는 길은 몇 군데 있지만 대련사를 거쳐 가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사찰이 백제 부흥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항전한 도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에 대련사를 입력하니까 대련사란 이름을 가진 사찰이 몇 군데 보이는데 예산의 대련사는 한 곳이다. 청주에서 오송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데 익숙한 부강을 거치는 길을 택했다. 세종시를 지나 서세종 나들목으로 대전 당진간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신양 나들목에서 나와서 대흥 저수지 갓길을 지나 차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에 눈이 녹아 포장도로가 흥건하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주차장에 차를 대니 바로 사찰 아래이다. 절은 남향인데도 아주 습하다. 이것이 어제 눈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이 습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주차장에 눈이 아직 쌓여 있다. 눈 위에 주차하고 가방을 챙겨 사찰로 올랐다. 극락전을 작고 아담한데 절집 마당에 서 있는 느티나무 세 그루는 어마어마하다. 사천왕이 따로 없다. 비록 퇴락했지만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성벽처럼 높이 쌓아 올린 축대를 보니 물때도 천오백년 세월을 지나면 이렇게 아름다워지는 것인가 보다.
스님은 마당에서 어느 속인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님에게 합장했다. 스님은 내가 도침대사를 뵈러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합장이 아주 짧았다. 아니 두 손을 붙이기나 했는지 모른다. 보살 한 분이 심검당尋劍堂에서 나왔다. 정말로 무명의 검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지혜를 찾아들고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극락전 앞에 삼층석탑이 고고하다. 정작 절집 마당을 지키는 부처님은 석탑과 느티나무와 느티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보고 지그시 눈을 감는 개가 아닌가 하는 불경스런 느낌이 들었다. 절에 가면 스님에게 “차 한 잔 주십시오.”라고 말해 보라던 어느 스님의 말이 생각났지만 차를 얻어 마실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렇게 뜻 깊고 오래된 절에 대중이 모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 이렇게 답의 실마리가 보기도 한다.
마당은 빗물에 쓸려 백골 같은 자갈이 드러났다. 그런 마당 한켠에 배추를 심었다. 불탑 주변에는 쓸데없는 물건들이 어느 농가의 마당처럼 어지럽다. 가을이 돌아오면 산에서 황토를 파다가 마당을 돋우었던 옛날이 생각났다. 하기야 절이라 해서 깔끔하기만 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니까.
극락전을 알고 극락전에 가자. 극락전은 얼른 보아도 보물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인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작게 보이지 않았다. 큼직큼직한 자연석을 아주 높게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그 기둥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 규모에 비해 엄청나게 굵고 크다. 맞배지붕도 마찬가지이다. 겹처마로 더 웅장해 보이는데 처마의 고색창연한 단청도 본존부처님인 아미타불의 자비를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 거기 올려 모셔놓은 극락전 현판 글씨가 또한 소박한 명필이다.
조용히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모자도 벗고 삼배를 올렸다. 마음으로는 도침 승장에게 올리듯 그렇게 경건하게 올렸다. 좁은 법당 안에도 삼존불을 모셨고 탱화도 거룩하다. 사진은 찍지 않았다. 최근에 누가 큰 재를 올렸는지 짙은 향흔이 아직 남았다.
아마타부처님, 관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을 바라보며 도침의 안부를 물었다. 부처님은 다 알고 있으리라. 바로 이곳 임존성에 머물러 있던 흑치상지가 당의 소정방에게 사로잡힌 후 다시 도침을 공격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동지가 적과 한편이 되어 그 적에게 공격을 당하는 도침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하는 백제부흥군의 기막힌 최후를 상상해 보았다. 동지들이 다 흩어져 일부는 사로잡히고 사로잡힌 대장이 다시 적이 되어 나타나고 배반한 동지에게 죽음을 당하는 슬픔을 지금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나라의 운명이 비바람에 휩쓸려도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되지는 말아야 한다. 아무리 승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적장을 포로로 잡아 그로 하여금 제 나라를 치게 하는 치졸한 지도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공연히 숙연한 기분이 되어 극락전을 나왔다. 이절은 도침대사가 의각과 함께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대련사는 본전을 한 때 대웅전이라 했으나 후에 극락보전 현판이 발견되어 현판을 바꾸어 올렸다고 한다. 절의 역사야 어떻든 간에 이제는 도침을 비롯한 백제 부흥군의 왕생극락을 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미타부처님의 그윽한 미소는 찾아오는 대중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는 미소이리라.
소박한 삼층석탑 아래서 가만히 합장하고 서 보았다. 석탑은 세월의 시달림인지 비바람의 보챔인지 닳고 닳았다. 사실 풍우에 닳고 닳아야 보물이 아닌가? 석탑은 마모될수록 고고하고 인간은 세파를 못 견디어 깨어질수록 추해진다. 마당에 서있는 불경스런 복장을 한 속인은 아직도 세속의 이야기로 선중의 스님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 분들은 나를 참 이상한 손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주도 없이 삼배만으로 고고한 척하는 내가 나도 우습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한 번 만져보고 산신각은 가지 않았다. 마당을 돌아 바로 임존성으로 오른다. 산성으로 오르면서 자꾸 절이 되돌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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