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덩굴꽃이 자유를 주네 -둥근잎유홍초꽃-

느림보 이방주 2016. 11. 7. 03:43


덩굴꽃이 자유를 주네

-둥근잎유홍초꽃-


2016년 9월 13일

주중리에서



이른 아침 주중리에 갔다. 아침에 이슬이 맑다. 농로를 달리는 자전거 타이어에 이슬 젖은 흙이 묻어난다. 참 곱다. 어느새 벼이삭이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노랗게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는 이슬이 맑고 시원해도 한낮에는 이마를 벗겨낼 듯 볕이 따갑다. 페달을 서둘러 밟을 필요가 없다. 날마다 바뀌는 가을의 부름에 눈길을 보내느라 서두를 겨를도 없다.


둥근잎유홍초는 논둑이나 밭둑에 아무렇게나 벋어가기도 하고, 잡초더미나 개바자를 올라타고 진홍색 꽃을 피우기도 한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 결코 게걸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콘크리트 전봇대를 끌어안고 올라가 소담스럽게 꽃을 피웠다. 둥근잎유홍초는 개바자에 피어야하고 콘크리트 전봇대는 경직되어 있어야하는 규범을 버렸다. 회색 전봇대는 제가 지닐 규범을 잊어버리고 둥근잎유홍초꽃 진홍색으로 온몸을 휘감았다. 규범도 버리고 관습도 버리고 온통 아름다운 사랑으로 치장한 것이다. 전봇대는 초록과 진홍색을 휘감고 딱딱한 회색으로부터 탈피했다. , 그렇구나. 규범과 관습으로부터 탈피하면 자유를 얻는구나. 나는 여기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럴 때 나는 나무가 되고 싶어 미쳐버린 한 여자를 찾아낸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이다. 그녀는 형부가 나신에 그려주는 덩굴꽃 그림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고루한 규범과 관습으로부터 탈피한다. 아니 규범이라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버렸다. 아예 자신이 덩굴꽃이 되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브래지어로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규범, 아내는 사랑도 느낌도 없이 남편의 성적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습적 책임감, 콘크리트 전봇대처럼 굳어버린 그 이상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은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을 먹어도 된다는 관습, 다른 종의 동물도 나와 같은 생명을 지닌 이라고 생각할 줄 모르는 폭력, 남을 고기라 생각하고 먹어야 한다는 관습적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남편은, 오빠는, 딸을, 아내를, 여동생을 때려도 된다는 폭력, 강자는 약자를 때리고 밟아도 된다는 폭력적 사고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들은 다 영혜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남편도, 언니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어느덧 영혜의 편이 되어 있어 답답했다.


영혜의 행동을 보며 나는 문득 광주가 생각났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80년대 서른 셋 젊은 나이에 읽었던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떠올랐다. 일금 4000원짜리 광주민중항쟁 기록인 이 책을 읽고 석 달 가량 채식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기억 말이다. 군화에 허옇게 묻어난 사람의 골, 대검으로 잘라낸 열아홉 여고생의 가슴, 술에 취한 권력의 무한한 폭력은 바로 한강의 소설소년이 온다가 받아들였다. 관습과 규범이 타락하면 바로 악법이 된다. 악법은 폭력을 부른다. 이것이 문명이라는 옷으로 치장한 관습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정당한 이유이다.


덩굴식물은 대개 남을 감고 기어오른다. 그래서 결국 남을 잡아먹고 만다. 늘 지탄만 받아오던 외래식물인 가시박이 올 여름엔 더 심하게 횡포를 부렸다. 지탄받아 싸다. 미호천 방천에 이들이들하던 버드나무를 휘감고 올라가 결국은 말려 죽였다. 가시박은 우선 나무 밑동에서부터 조금씩 타고 올라가 한 가지씩 잡아먹다가 유월쯤이면 나무 전체를 뒤덮어 고사시킨다. 버드나무만 그런 게 아니다. 주중리 개천 둑에 있는 대추나무를 비롯한 나무란 나무는 모두 가시박의 폭력에 짓밟혔다. 가시박은 부당한 관습에 얽매인 영혜의 아버지 같은, 남편 같은, 오빠 같은 존재이다. 가시박은 광주의 뭉툭한 군화발이다. 사람들은 가시박이나 칡덩굴이나 다래덩굴이나 으레 다 그러려니 한다. 그것이 섭리려니 한다. 그렇게 폭력도 당연한 관습이 되어버렸다.


둥근잎유홍초는 때로 길가의 작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는 하지만 다른 덩굴식물처럼 말려 죽이지는 않는다. 덩굴꽃의 관습을 벗은 착한 아이는 밭둑을 슬슬 기어 다니거나 개바자로 올라가 진홍색으로 예쁜 꽃을 피운다. 동그란 잎도 크지 않아 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다. 사랑을 가진 사람이 사랑을 받듯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


관습과 규범으로부터 탈피하면 아름다운 사랑을 가질 수 있을까? 영혜는 남편의 관습적인 요구를 거부하였다. 느낌도 없이 행위만 있는 일방적 관습을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아버지의 폭력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편과 아버지의 폭력을 거부하고자하는 영혜의 신념은 고기를 먹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으로 행동화한다. 고기를 먹는 관습, 사랑도 없이 성을 받아들이는 관습, 아버지의 명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관습, 이미 규범이 되어버린 관습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지름길임을 알았다.


영혜는 규범과 관습을 탈피하여 얻어낸 원시적 자유를 아주 쉽게 행동으로 옮긴다. 바로 형부와 성을 행동화한다. 형부가 발가벗은 몸에 덩굴꽃을 그려주자 자신이 폭력을 모르는 식물이 된 것으로 착각했다. 식물이 되었으니 규범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소망이고 형부의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이란 동물이 규범 속에 감추고 있는 솔직한 본능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관습의 저고리와 규범의 두루마기 속에 얼마나 많은 본능을 억누르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영혜와 형부처럼 원시적 행동이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꿈은 아예 갖지 않은 체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신에 덩굴꽃을 휘감고 형부와 정을 통한 영혜는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성적 쾌감이라기보다 원시로 돌아간 자유에서 오는 쾌감이었을 것이다.


자유를 깨달은 영혜는 인제는 아예 나무가 되고 싶어진다. 광합성으로 사는 것이 온전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신념을 갖는다. 그래서 나무가 될 궁리를 한다. 웃옷을 벗고 가슴을 드러낸 채 볕을 쬐기도 하고, 태양을 향해 팔을 벌려 햇볕을 받는다. 발밑에서 뿌리가 나올 것이라 자랑한다. 채식주의자는 다만 채식으로 자신의 꿈을 끝낸 것은 아니었다. 문명이라는 허울을 쓴 사람들은 영혜가 획득한 영원한 사랑과 자유를 미쳐버린 것으로 착각한다.


둥근잎유홍초에게 그림처럼 휘감긴 딱딱한 전봇대는 얼마나 황홀할까? 규범의 옷을 벗어버린 본능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것이다. 나도 때로는 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거부하고 가슴이나 몸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말은 진정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명령을 거역할 용기가 없다. 그런 내 자신이 치졸하게 느껴질 때마다 영혜의 용기가 부럽다. 형부의 탈선이 대견하다. 오늘 아침에는 콘크리트 전봇대를 칭칭 감고 올라간 덩굴꽃이 부럽다. 그렇게 경직을 깨어버린 용기가 부럽다. 규범도 관습도 없는 영원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 둥근잎유홍초꽃의 진홍색 입술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