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대제는 비암사에서 매년 4월 15일에 올린다. 세종시가 주관하는 백제대제를 비암사에서 올리는 것은 이 절이 백제 유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염원은 극락보전 앞에 있는 비암사 삼층석탑으로부터 시작된다. 삼층석탑 상륜부에서 발견된 세점의 작은 불비에는 백제 유민의 백제 멸망의 한과 염원이 담겨 있다. 특히 아미타불을 비암에 새긴 것은 역대 왕이나 백제 부흥을 위해 목숨 바친 충신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미일 것이다. 그 뜻을 기려 오늘날에도 연기 주민 즉 세종시민들의 뜻이 담아 대제를 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비암사는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기슭에 있다. 주변에서는 여기를 금산이라고 하지만 비암사 스님들은 이곳을 운주산이라고 한다. 흔히 운주산은 조치원에서 1번국도를 따라 서울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비포장도로로 올라가면 기슭에 고산사가 있고 정상 부분에 운주산성이 있는 산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스님들은 그 산은 고산이라고 하고 실제로 비암사가 있는 산이 운주산이라고 한다. 고산사가 있는 것으로 봐서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생각해 보면 1번 국도가 산줄기를 잘라 놓지만 않았어도 고산사가 있는 운주산과 비암사가 있는 운주산은 한 줄기라고 볼 수 있다. 비암사를 안고 있는 산에 올라 등마루를 계속 한 시간 반쯤 올라가면 금이성이 나온다. 무너진 성이 결국 운주산성에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비암사는 참으로 고즈넉한 절이다. 절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즈막한 산줄기도 아름답고 산에 안긴 절집의 배치도 소박하고 경건하다. 제32회 백제 대제가 열리는 이날, 절 마당에 들어서자 주변의 조산은 마치 해탈성불할 듯한 모습이었다. 막 새잎이 나기 시작하는 나무들과 피어나는 산벚꽃이 녹음과 춘화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무들은 거뭇거뭇 잔 가지가 다 보이면서도 죽은 지난해의 나뭇잎은 떨어지고 새잎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보고 싶은 것은 다 보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4월의 나무는 그렇게 보여야 할 것은 다 보여주고 감춰야 할 것은 다 감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절 마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밟고 막 올라서려면 돌담 위에 "아니오신듯 다녀 가소서"라는 화두가 보인다. 언제 와서 봐도 갈 때를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 오면서 갈 때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살아가면서 가는 날을 그리며 정말 아니 온듯 살다 가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순간순간 갈 날을 생각하면서 발을 내디뎠는지 자문해 보니 자신이 없다. 아니온듯 산다는 것은 오지 않았으면 안될 만큼의 역사를 만들라는 역설이 아닐까? 아니면 세계에 한 점의 쓰레기도 흠집도 내지 말고 가라는 말이 아닐까? 하긴 모두 공이니 온 것이 아니 온 것이고 아니 온 것이 온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온 것인가 오지 않은 것인가? 큼직큼직한 검은 돌담과 어린 아이가 장난하듯 쓴 글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절은 백제유민들이 통일신라 문무왕 13년에 혜명대사에게 위탁해서 지었다고 한다. 건립 당시 백제 유민들에 의해 석불비상을 조성하고 국왕대신과 칠세부모의 재를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673년 4월 15일이라고 하니 그 연원이 깊고도 깊다. 불비 중에서 국보로 정해져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것이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이다. 그밖에 기축명아미타불비상 미륵보살 반가사유비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역시 국립청주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아미타불을 석비에 새긴 뜻은 비운에 간 백제의 국왕과 대신 유민의 극락 장생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극락보전이 있고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가 보다. 또한 미륵보살 사유상은 백제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극락보전에서 석가모니 괘불탱화가 발견되어 최근에 대웅전 불사를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석가모니 괘불탱이 마당에 내걸리고 그 앞에 제전을 짓고 대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백제대제는 세종시가 주최하고 세종시향토사연구소가 주관하며 비암사와 전씨 종친회가 후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모든 행사의 뒷바라지는 비암사에서 다 하면서도 실권은 행정기관에 내어준 스님들의 마음이 감사하다.
오전 11시에 대제가 시작된다고 해서 10시 15분쯤 도착했는데 이미 석가모니 탱화가 걸려 있고 제단이 마련되었다. 영산제 범패의식보존회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행사 연습을 하는지 염불과 범패를 보여주고 있었다. 비구스님 세 분이 한 분은 대금과 날라리를 번갈아 불고, 한 분은 징을 치며 염불을 하고 한 분은 북을 치는데 그 염불 소리가 우렁차서 골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제단 앞에는 비구니 스님 두 분이 나와서 바라춤과 나비춤을 보여 준다. 음악과 아름다운 탱화가 어울려 모든게 다 화려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절인데 우렁찬 염불과 게송은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고 날라리 북과 비파는 비운의 백제 역대왕과 대신들과 절망에 빠진 유민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과 같았다. 나는 일단 대제가 시작되기 전에 불전에 삼배를 드리고 시주를 했다.
절마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돌담
대제 준비가 완료된 제단에서 스님들이 나비춤을 보여주고 있다
범패와 바라춤, 대웅전이 보이고 오른쪽이 본전인 극락보전이다.
아름다운 괘불탱과 제단 화려한 주련
영산제 범패의식 조본회 스님들
드디어 11시가 되어 의식이 시작되었다. 백제대제를 알리는 범종이 우렁차게 5번 울렸다. 종교 의식의 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나라 사찰에서 들리는 범종 소리가 가장 아름답고 우렁찬 것 같다. 특이 우리나라 범종 소리는 뭐니뭐니해도 여음이 아름답다. 학자들은 이 소리가 공명이나 음의 간섭에 의한 특이한 울림이라고도 하고, 종을 일부러 정확하게 대칭이 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주파수가 달라 그렇게 크고 작은 소리가 울려 난다고도 한다. 또한 중국 종과 달리 울림통이 있어서 우렁차게 난다고도 한다.
백제의 유민들이 백제 부활을 위해서 끝까지 저항한 곳이 이곳 운주산이라고 한다. 운주산성에 가면 그런 기록들이 있고 실제로 마지막 수도인 부여와도 일직선이 된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 연기지방에서 최후의 1인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생명을 다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원한의 영혼들이 이 범종 소리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범종 소리로 대제의 시작을 알리고 대제의 경과 보고가 있었다. 경과 보고는 세종시 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이라는 분이 1983년 4월 15일 백제대제가 처음 열리게 된 동기와 오늘날까지 이어온 과정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백제 32명의 왕과 호국영령을 위로한다고 말할 때는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라 백제의 유민이라도 된 듯했다. 대한민국의 행정수도라 할 수 있는 세종시에서 지금 백제의 제를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종시가 주최할 것이 아니라 불교행사로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다는 초헌 부시장, 아헌 시의회 의장, 종헌은 교육감이 맡았다. 헌화와 분향, 참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차를 올렸다. 스님들은 맨 나중에 한꺼번에 참배한다. 모두들 절하는 모습도 가지가지이다. 유교의 제례 의식의 틀에 불교적 요소를 가미했다. 집사가 여성이라든지 찻잔을 갈지 않고 그대로 둔다든지 하는 것은 유교 의식과 다르지만 헌다의 순서는 유고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불교의 예불 의식을 따르는 것이 훨씬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고 본다.
세종 특별자치시장의 대신해서 행정 부시장이 추도사를 했다. 추도사가 끝나자 영산제 범패의식 보존회의 바라춤이 있었다. 사실 바라춤은 의식에서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종의 공양의식이다. 때로 승무라고 하면 바라춤이나 나비춤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승무는 파계승의 탈번뇌를 위한 춤이 아닌가 한다. 바라춤이나 나비춤은 큰 법회가 있을 때 법회 전과 후에 부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대중의 소망을 발원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세종시 소리 예술단의 반야심경 가야금 병창이 있었다. 반야심경을 가야금 병창으로 부르려는 시도가 가상하다. 가야금이라는 악기가 과연 심경의 오묘한 의미를 담을 수 있을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반야심경을 노래하는데 입으로는 불법을 말하고 가야금 곡조는 흥을 이끌어 내는 것 같아 듣기 어색했다. 반야심경 가야금 병창을 할 때 가야금 곡은 어떻게 작곡을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이 노래를 부르는 세종시 소리 예술단은 반야심경의 철학적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저렇게 열심히 부르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살풀이춤을 추는 이도 유명한 유애리씨라고 하는데 명성에 비해 춤은 별로였다. 그러나 살풀이의 춤 동작의 근원은 잃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한 손끝과 땅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한 발끝의 깊이와 높이를 짐작할 만하다. 하얀 소복에 자주고름이 단정하다. 쪽진 까만 머리와 하얀 얼굴이 춤보다 아름다웠다. 알고보니 제단이 마루바닥이 아니고 돗자리라서 춤이 완벽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 돗자리 위에서 발 끝으로 어찌 회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그 때만 자리를 걷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살풀이 춤은 춤보다 춤추는 이의 미모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백제의 역대 왕들이나 부활을 위해 몸 바친 유민들도 오늘은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합창단의 축원화정 찬불가를 들으며 막을 내렸다.
바라춤
아름다운 바라춤
살풀이춤
살풀이춤
반야심경 가야금 병창
세종시 불교 합창단의 찬불가
사회자는 유교의식에서 행하는 홀기 읽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회를 보았다. 의식이 끝나고 점심을 먹었다. 산채비빔밥과 미역 냉채국이다. 비암사 신도인듯한 보살들이 음식을 마구 나누어 주었다. 보살님들의 얼굴에는 부처님 같은 미소를 담고 있었다. 제단에 있던 제물을 소쿠리 채 내어 놓고 먹고 가져가라고 했다. 모두 진심으로 친절하고 정성이 가득했다.
정말 이날은 몇 시간을 흥분된 속에서 보냈다. 이런 의식을 본 적이 없다. 가끔 영산회를 가본 적이 있지만 불교 행사는 유교행사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진행되어서 무질서한 참례자들 때문에 의식 자체가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보살사 부처님 오신날 법회만 해도 염불보다 잿밥에 맘이 가 있는 불량한 신도들이 예불이 끝나기도 전에 공양간 맨 앞에 줄을 서려고 탑 앞으로 뛰어가기 때문에 끝맺음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야단법석이란 말이 나왔을까? 그런데 오는 대제는 자유스러운 가운데 엄숙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서 좋았다. 참반하는 이들에게 엄격한 의깃의 절차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기본 정신만은 잊지 않게 인도하는 모습이 품위 있었다. 의식이 끝나기 전에 공양간으로 뛰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양보하고 질서 있었다. 다만 모든 참석자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 자기 밥을 자기가 갖다 먹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방에 들어가 상 앞에 앉아 바쁜 보살님들이 밥을 갖다 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서 의식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대개 세종시 고위직 공무원이나 의원들인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 앞에 대중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의원들이나 자치단체 장들은 절에서도 자신들이 선량이라고 착각하는대신에 베트남의 호치민이 탐독했다는 다산의 목민심서부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백성이 모두 한 점 근심이 없을 때 드디어 즐겨야하고 백성이 즐거울 때도 근심이 있는 백성이 있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 목민관이 아닐까?
나는 오늘 많은 소득을 올렸다. 이렇게 품위 있는 의식을 보았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아름다운 절 비암사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 녹음이 더 짙어졌다.
(201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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