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특별자치시 고려산성 답사
▣ 2016년 1월 3일 오후 2시
▣ 고려산성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산 77
▣ 개요 : 해발 305m 고려산 정상부 성둘레 250m 또는 260m 테메식 산성으로 토석혼축형임
▣ 설명
이 산성은 전의에서 북쪽으로 13km지점 고등리에 위치하고 주장 260m로 천안 남단에 있는 고려산의 정상에 구축된 산성으로 현재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산성이 처음은 백제때 산성으로 추산되나 확실한 기록이 없고 고려때 산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옛날의 산성임에는 틀림없으며, 황수영박사 (1989년 당시 중앙문화재전문위원)의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본 산성은 고려산성임이 확인되었고 산성내부에서 고와편(古瓦片)과 토기편이 수집되고 철배(鐵盃)가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200간(間)의 토석혼축성이고 옛날에는 북방의 외적을 막았으며, 고려 왕건때에는 지금의 천안 부근의 외곽성 구실을 한 것 같다. 산성에 고려 태조사당(太祖廟)이 있었고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태조묘에 매년 제향을 하였으며 기우제단은 토속적인 신앙인 기우신에 대한 제단을 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 산성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추측이 된다. 고려말엽의 충신 김승로가 낙향하여 고려왕조의 비운을 애곡한 것으로 보아서도 고려때는 중요한 산성으로 생각하였던 산성이며, 연기팔경의 하나이다.
운주산 고산사에서 스님과 헤어져 고려산성을 찾았다. 내비게이션에 '아야목 마을 회관'을 입력하고 1번국도를 북으로 달렸다. 잠시 차를 달리게 하던 내비게이션은 국도에서 차를 내려 놓는다. 전의면 소재지를 골목으로 골목으로 다니게 하더니 고개를 넘어 어느 사거리에서 멈추었다. 이정표에는 고등리는 좌회전이고 대곡리는 우회전이다. 그런데 어느 안내 블로그에서는 아야목 마을회관은 결국 고등1리 경로당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비는 우회전을 가르친다. 가만히 둘러보니 꼭 산성이 있을 것 같은 산이 대곡리 쪽이다.
우회전을 했다.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꼬불꼬불 농로를 올라간다. 고등1리 경로당 마당에 도착하니 내비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한다. 그러면 마을은 고등1리이고 산은 대곡리라는 이야기이다. 차에서 내리니 고려산성을 이르는 이정표가 있을 법 한데 없다. 무작정 바르게 올라갔다. 한 2km쯤 비탈길을 오르니 고개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이 그쳐버린다. 해는 서산에 넘어간다. 다시 내려왔다. 경로당 현관문을 열었다. 뜰에 어른들의 털신이 서너 켤레 있다. 기척을 하니 한 할머니가 나오시고 이어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신다.
고려산성을 물으니 마을 앞을 지나 산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 바로 저기지만 저물었으니 가지 말라 한다. 까짓것 갈 수는 있다. 그러나 황황한 마음으로 낯선 산에 올라 무얼 할 것인가? 사진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옛 산성에 오르면 나는 꼭 옛 사람의 숨소리와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버릇이 있다. 어둑한 산성에서 더구나 백제 부흥군의 한맺힌 영혼이 모여 앉아 내일의 공격을 상의하고 있을 텐데 그들과 만나기라도 하자는 건가? 내가 망설이자 노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저 산은 낮에도 돼지가 나와요.' 한다. 산성과는 관계없는 오늘의 이야기이다.오늘은 멧돼지가 문제이다. 결정타이다. 돌아가자. 다음에 오자. 미련없이 차를 돌렸다. 내비는 병천으로 질러 오는 길을 안내한다. 고개를 넘으니 천안이고,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니 바로 병천이고, 바로 오창이다. 40분이 안 걸린다.
다음 날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날이 추워 배낭에 방한복까지 넣고 출발했다.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하다가 고려 산성이라는 이정표를 아예 뽑아다 경로당 마당에 팽개친 것을 발견했다. 마을 사람들이야 고려산성을 모를 리가 없겠지만 혹은 그것이 오늘날 귀찮을 수 있겠지만 외지 사람은 이렇게 두 걸음을 해야 한다.
어제 노인이 일러 준 대로 마을 앞으로 갔다. 입구에 고려 산성이라는 표석이 보인다. 왜 이걸 보지 못했을까?
마을은 남향이다. 고려산성이 있다는 305m 봉우리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줄기가 돌면서 마을을 싸 안았다. 게다가 봉우리는 남으로 한 줄기를 흘려 마을 앞을 가로 막았다. 마을은 볕이 들어 따뜻하다. 북으로 바람을 막아 논밭에 풀이 파랗다. 산 밑에 샘이 있는지 논에는 물이 괴었다. 아 마을 끄트머리에 가니 늪지가 있다. 물이 나는지 갈대가 무성하고 버드나무가 우거졌다. 산길을 오르노라니 이 두메에도 전원주택이 들어왔고 마당까지 포장된 시멘트 길에는 최근에 연비나 매연에 문제가 생겼던 외제 차가 버티고 있다. 마을 어른들이 이정표를 뽑아 팽개친 이유를 알 만하다. 청정 마을에 매연이 두려웠을 것이다.
초행길인데 어디고 이정표가 없다. 시멘트 포장이 끝날 즈음에는 차를 돌릴 수 있을 만큼 너른 광장이 있다. 그런데도 이정표는 없다. 산길이 왜 이리 질퍽할까? 여기 어디쯤 성내 사람들이 먹을만한 물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냥 올라갔다. 안부에 오르니 이정표가 있다. 고려산성 300m, 생각보다 가깝다. 북으로 고려산성으로 가는 길, 동으로 아야목에서 올라온 길, 남으로 마을 안산이 된 산줄기 능선을 타는 오솔길, 그리고 서로는 고개를 넘어가는 길로 네 갈래다. 안부에서 보니 꼭 마을을 안고 포곡식 산성이 있을 법하다. 그런데 여기는 고려산 정상에 띠를 두른 작은 테메식 산성이다. 이정표 아래 벤치가 하나 놓여 있다. 가방을 열어 카메라를 꺼냈다.
고려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나무 토막 모양으로 빚어 만든 시멘트 계단을 밟으며 산성으로 오른다. 숨이 가쁘다. 오후의 볕이 땀을 낸다. 가파른 길에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마루에 도착했다. 성벽은 보이지 않고 너른 평지만 보였다. 그러나 성의 모습은 역력하다.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토석혼축형이라는 것이 뚜렷하다. 그런데 성안의 흙이 넘쳐 성석을 덮고 그 위에 잡초와 잡목이 무성하다. 게다가 무성한 참나무 낙엽이 온통 뒤덮어 성석을 찾을 수도차 없다. 성의 높이는 대개 3~5m 정도 되어 보였다. 가파른 산인데다가 성을 높게 쌓아서 밖에서 공격해 들어오기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성을 한 바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인지 세종시에선지 성안에 정자를 세우고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낙엽 위가 반질반질하게 사람들의 발자국이 길을 내었다.그 길을 따라 성을 한 바퀴 돌면서 성석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보이지 않았다. 동쪽 끝에는 마을 북쪽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 능선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었다. 그 옆에 널부러진 성석을 발견하였다. 성석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자연석인 듯했다. 아마도 자연석을 적당히 맞추어 쌓았나 보나. 성 안 평평한 대지 위에는 참나무만 드문드문 서 있고 성쪽으로는 낮아서 평평하고 가운데는 불룩 나와서 높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니 250m쯤 되어 보이는 성 안이 한 눈에 다 들어 온다.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이곳에 다녀가는 사람들이 쌓았는지 나즈막한 돌탑이 있다. 별로 정성을 들인 것 같지는 않은데 용하게 비바람을 견디고 있다. 돌탑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아래 부분은 돌이 크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이다. 성을 쌓는데는 큰돌과 작은 돌이 필요할 것이다. 작을 돌로 쐐기를 박아 주어야 성이 견고할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돌탑도 그런 방법으로 쌓았다. 그런데 그런 돌 사이에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기와편은 잿빛이었으나 붉은 보랏빛이 배어나올 듯 붉은 빛을 띠기도 했다. 그런 틈에 토기 조각도 보인다. 토기 조각은 두꺼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다. 두꺼운 것은 큰 그릇이고 얇은 것은 작은 그릇일 것이다. 토기는 몇 개의 조가만 보아도 종류가 꽤 여러가지인 것으로 생각된다. 기와 조각이 있는 것은 건물이 있었던 증거이고, 토기 종류가 다양한 것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착해서 살았든 농성을 했든 많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머물러 살림을 하고 살이를 했을 것이다. 토기는 안쪽으로 보이는 곳은 무늬가 없고 바깥쪽은 빗살 비슷한 무늬가 있었다.
성 안 바닥은 돌이 많지 않고 흙이 부드럽다. 사람들이 오래 동안 머문 흔적일 수도 있다. 건물은 어디에 있었을까 내부의 가운데에 있었을까 아니면 성의 둘레에 있었을까? 터의 모양을 보면 마을 쪽으로 널직널직한 것으로 봐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와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건물은 꽤 견고했을 것이고 지표 조사를 하면 건물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북토성 건물지처럼 기둥 자국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 높지 않은데도 주변의 산이 다 아래로 보인다. 백제는 475년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성을 많이 쌓아서 고구려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청주를 중심으로 세종시(옛 연기지역), 옥천, 대전 부근에 약 200여개의 성을 가진 산성의 나라이다. 그 중 옥천의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도 있고 신라가 쌓은 것도 있다. 신라가 쌓은 산성을 백제가 보수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충청의 산성은 의미가 있다.
연기 지역은 신라 고구려와 백제가 접경을 이룬 곳이다. 이 부근 연기 일대의 운주산성(고산산성)에서 전의 지역의 토성, 이성, 작성, 금이성 등 15개 이상의 산성이 있다. 신라가 충주와 경기 일부를 점령하면서 백제의 근거지이며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서해 바다 쪽을 공략하기 위해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을 진천에 주둔하게 하였다. 진천은 북으로 고구려, 서로 백제와 국경을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이러한 신라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막기 위해 연기 지역의 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 산성이 운주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 아마도 주요 근거지는 주류성으로 짐작되는 금이성이고 마지막 근거지가 운주산성이었다면 이곳 고려산성은 그 중간의 초소나 보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견되는 와편이나 토기편은 고려 때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고려 태조 왕건의 공덕을 기리는 태조묘太祖廟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사당을 지키는 사람이 살았을 수도 있다.
산성을 내려오면서 금이성에서 운주산성으로 이어지는 파발이 이 산줄기를 타고 여기서도 잠시 머물렀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다. 마을 앞을 지나며 당시에도 마을이 있었던지 어쨌는지 아무것도 상관없는 백성들의 고달픔을 헤아려 본다.
안부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정표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산성 안의 안내판
흙과 낙엽에 묻힌 성벽
우거진 잡목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탑
기와편
성 내부의 두두룩한 부분
뒹구는 성돌
돌탑 속에 감추어진 기와 조각들
토기편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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