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충남 예산군 임존성 답사

느림보 이방주 2016. 1. 15. 22:49

예산임존성 禮山任存城 답사

 

▣ 임존성

▣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광시면 동산리 산 10번지외 11

▣ 백제시대 산성

▣ 답사일 : 2016년 1월 15일

 

[내용]

해발 483.9m의 봉수산(鳳首山) 정상과 그 동쪽으로 900m 정도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봉수산성이라고도 부른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둘레는 약 2.45, 현재 성벽 일부와 성문, 수구문(水口門), 우물터,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성벽은 속을 단단히 다지고 바깥을 돌로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현재 온전한 상태로 남은 동북쪽 성벽의 높이는 4.2m이고, 서쪽 성벽의 높이는 2.6m이며, 석루(石壘) 윗부분의 너비는 1.6m이다. 성 안의 전체에 78m의 내호(內壕)가 둘러져 있다.

봉수산 정상에서 동쪽 작은 봉우리로 이어지는 성벽의 잘룩한 허리 부분에는 남북으로 놓인 통로가 있고, 통로가 만나는 북쪽 성벽에는 너비 6m 가량의 북문(北門)터가 확인된다. 남문(南門)터는 조금 서쪽으로 치우쳐 성 밖으로 갈라지는 구릉과 성벽이 연결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고,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앞을 빙 둘러서 쌓은 옹성(甕城)과 같은 효과를 얻으려는 듯한 시설도 주변에 설치되어 있다. 문의 너비는 1.9m인데, 적의 침입을 쉽게 방어하도록 성벽에서 10m 정도 길게 들여쌓아 통로의 형태를 갖추었다.

봉수산의 정상부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약간의 평지가 있는데, 이곳의 시계는 탁 트여 전망이 매우 좋은 편이다. 또한 남쪽 성벽 안에도 넓은 평지가 지형에 따라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 산성은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는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芝山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주요 거점지로 잘 알려져 있다. 곧 백제의 멸망 뒤에 부흥군은 주류성을 근거로 사비성 탈환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하였다. 그 뒤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이 산성을 최후의 거점지로 삼아 전열을 재정비하고서 신라군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특히 이 산성에서 공주와 부여는 각각 90여리쯤 떨어져 있으므로, 이 산성은 도성을 웅진(熊津)과 사비(泗沘)로 옮긴 백제의 수도 방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보인다. 그 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과 견훤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남문지에서 바라본 서쪽 성벽의 모습

임존성의 개요


대련사에서 서북쪽으로 임존성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나 있다. 안내판은 오래 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상세하게 그리고 적절한 곳에 세워 있다. 지난 밤 내린 눈으로 길이 약간 질척거렸다. 길은 가파르지도 않고 메마르지도 않아서 좋았다. 다만 그동안 운동을 하지 못해 불어난 내 몸이 숨가쁘게 한다. 군데군데 어네 내린 눈이 녹지 않았지만 날은 포근하다. 미세먼지도 산이라 심해 보이지 않는다. 올라갈수록 길에 솔잎이 깔리고 낙엽이 있어 발의 감촉이 좋다.

오솔길 왼쪽으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감나무도 보이고 집터였던 축대도 보인다. 사람들이 삶의 터전일까? 군사 시설이었을까? 사찰의 부속 건물일까? 우물터도 보였다. 농지로 판단되는 곳은 보이지 않아 민간의 터전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냥 궁금증만 남기고 자꾸 올라간다.


대련사에서 임존성으로 오르는 오솔길

남문지 위의 넓은 건물터


임존성은 대련사에서 멀지 않다. 20분 정도면 남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긴 백제 부흥을 위하여 끝까지 버티다가 죽음을 당한 도침대사가 세운 절이니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대련사는 분명 비암사보다 먼저 지은 절이다. 비암사는 부흥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지은 절로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남문은 인터넷에서 찾아본 설명대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것은 정남쪽은 산의 구릉이라 통로가 되는 문을 만들기 어렵고 성과 통하는 정문이 될만한 길을 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남문을 정문으로 본다면 정문치고는 매우 좁았다. 성의 규모가 꽤 큰데도 성문이 작은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그런데도 문의 양쪽을 성의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 쌓았다. 마치 작은 치성처럼 보였다. 그 서쪽 성벽은 7~8m 정도로 상당히 높아 보였고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 서쪽 성벽을 복원하면서 이곳은 그냥 두어서 무너지기는 했지만 옛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성벽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다.


문지를 지나니 남문터가 상당히 넓다. 올라가면서 동쪽으로는 큰 건물이 있었는지 대지가 아주 넓다. 아마도 최근까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안내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건물은 한두동이 아니라 밀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큰 건물 작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 주건물, 부속 건물, 망대가 있어 이곳이 대련사와 통하고 외부와 통하는 중심지 였을 것으로 보였다. 대개 건물이 성의 중앙부에 위치하는데 임존성은 남문 부근에 위치해 있어서 특이해 보였다.


예산군에서 공원으로 조성하여 공원 안내판이 있고 벤치도 있다. 벤치에 앉아 점심으로 가져온 빵을 먹었다.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진다. 남문 근처 서쪽 망대로 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았다. 새로 복원하여 쌓은 서쪽 성벽이 북으로 향해 있다. 성벽은 뚜렷하지만 정말 고증을 통해서 복원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보기는 좋았다. 그러나 문화재라는 것이 정말 이렇게 쉽게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본래 축성 방법을 살피기 위해 아직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가시 덤불이 바지를 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옛축성의 방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원형이 유지되어 있는 곳이 있었다. 반갑다. 축성에 쓰인 성돌은 화강암으로 매우 단단하고 무거워 보였다. 높이는 3~5m 정도 되어 보인다. 물론 성의 너비도 2m는 충분히 넘어 보였다. 성석은 일정하지 않고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너비가 두세 자, 두께가 한 자 정도 되는 큰돌도 있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돌을 엇갈리게 쌓았고 중간 중간 쐐기가 될만만 작은 돌을 끼워 넣어 쉽게 무너지지 않게 했다. 돌의 너비나 두께가 일정하지 않아도 돌을 약간 다듬어 쓴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남문 근처의 축성 방법은 특이하다 성벽을 둥그스름하게 둘러 쌓은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에서 각이 지게 쌓았다. 쉽지 않았을 텐데도 이렇게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성이 더 견고하거나 치성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무너진 돌 하나하나마다 백제인의 손이 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신비스럽다. 돌 하나하나를 들어 올려 정으로 쪼고 망치로 때려 다듬으면서 쌓기 좋게 손질을 하였으리라. 돌마다 그들의 피도 묻고 땀도 묻었을 것이다. 돌의 얼룩이 천년 세월을 지나도 지워질 수 없는 백성의 한이었을지도 모른다.

풀을 잡고 잡목의 가지를 움켜쥐면서 간신히 성벽 위로 올라섰다. 성에 대한 자세한 공부를 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부분의 축성법을 성 밖에서 바라본 모습-직각으로 한 번 꺾었다.

무너진 부분에서 돌의 모습이나 축성법을 알아볼 수 있다.

남문 입구의 모습-돌이 매우 크다

남문 근처에 비교적 원형이 남아 있는 부분- 직각으로 꺾인 모습이 분명하게 보여 학자들에게 매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


다시 성벽 위로 올라와 서쪽 성벽을 걷는다. 여기부터 보이는 곳인 망루5까지는 최근 복원한 모습이 뚜럿하다. 보기에는 좋다. 그러나 잘못하면 복원이 곧 훼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도 가능하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성돌의 크기가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일정하지 않은 점, 가로줄 세로줄은 맞추어 쌓지 않은 점, 중간중간 쐐기돌을 넣어 무너지지 않게 쌓은 점 등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말끔하게 단장된 성이 달갑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을 가상히 봐줘야 할 것이다.


새로 쌓은 성벽 위를 걷는 것은 산책 이상의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전망이 좋고 길이 좋아 걸을 만 했다. 마사리로 통하는 수렛길이 나 있는데 자동차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행사 때 차량이 올라오는 것으로 보였다.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바로 올라오면 아주 널직한 공간이 있고 이곳에 백제의 역대왕에 대한 제향을 지내는 제단도 마련되어 있다. 근처에 우물지가 있다고 들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는데 우물터라기 보다도 최근에 다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망루나 북문지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으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빈 터들이 보였다. 이곳에서 열리는 백제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는 그렇게 큰 행사가 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 예산군이나 주변 행정기관에서 형식적으로 여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세종시 비암사에서 시행하는 백제대제처럼 큰 행사는 되는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묘순이 바위 전설이 있는 묘순이 바위는 성벽에서 바위가 밖으로 툭 튀어 나왔다. 말하자면 바위는 성벽 속에 박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의 위치대로 복원한 것인지 복원하면서 묘순이 바위를 성벽 속으로 넣은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듯 하다.


<묘순이 바위 전설>

예산군 대흥의 한 마을에 길동이와 묘순이라는 힘이 센 두 남매가 살았는데, 한 집안에 힘센 사람 둘이 있으면 안된다는 말에 어머니는 길동이는 무거운 쇠 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다녀오도록 하고 묘순이는 성을 쌓도록 하는 내기를 했다. 길동이는 쉬지 않고 한양으로 가고 묘순이는 큰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어머니는 남매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묘순이가 성을 완성할까 걱정하였다. 어머니는 길동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묘순이가 좋아하는 콩밥을 만들어 묘순이를 불렀다. "묘순아, 그만 쉬어가며 하거라. 길동이는 보이지도 않는다. 네가 좋아하는 콩밥을 했으니 먹고 일해라." 묘순이는 산을 내려와 물 한 모금 마시고 종콩밥을 먹기 시작했다. 사발이 거의 비어갈 때쯤 길동이가 길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묘순이는 깜짝 놀라 사발을 내던지고 마지막 남은 돌을 쌓기 위해 아래에서 큰 돌을 치마에 안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동이가 약속한 지점에 거의 도착할 무렵, 묘순이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그 돌에 깔려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슬퍼하며 묘순이를 성벽 쌓던 곳에 묻었는데, 지금도 묘순이 바위에 가서 돌로 이 바위를 두드리며 '묘순아, 콩밥이 원수지?' 하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 유형'을 띠고 있어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청주 지방의 구녀성에도 이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설은 이와 같이 주인공이 최후의 파멸을 맞고야 마는 비극적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또한 반드시 증거품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개 인근 주민들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 이 묘순이 바위 전설에도 남매 중에 아들이 이기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남아 선호 사상과 종족 보존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묘순이 바위 부근에 백제 복국운동 기념비가 있었다. 복신, 도침, 흑치상지의 복국 저항 운동의 개요를 적었다. 극러나 이곳이 부흥운동의 최후의 저항지라는 말은 없었다. 도침이 세운 대련사가 바로 아래에 있지만 흑치상지가 여기서 패배하였고 도침은 부흥군 3천여명과 석굴에 피신해 있다가 불타 몰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그런 처참한 일이 있은 후에 그 때 몰살된 도침을 비롯한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유민들이 세운 비암사가 있는 것으로 봐서 금이산성 주변에 최후의 석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사람들은 한산의 건지산성, 이곳 임존성, 운주산성을 최후의 격전지인 주류성으로 보면서 임존성을 가장 유력하게 생각들 하는 모양이다.


묘순이 바위에서 북쪽으로 성벽 위를 걷는다. 한가하고 힘들지 않다. 미세먼지는 더욱 심해지고 날씨는 무척 따듯하다. 한 참 걷다가 복원 공사가 끝나는 부분에서 성벽을 보니 본래의 성벽과 새로 축성한 성벽을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거의 비슷하지만 새로 샇은 부분이 더욱 정교하고 돌을 다듬어 축성한 것이 뚜렷하다. 망루 4에서 망루 5로 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숨이 가쁘게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이곳의 성벽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었다. 비탈길이라 사람들의 손이 덜 갔고 잡목이 우거져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뚜렷하게 원형을 볼 수 있었다.


복원한 부분

묘순이 전설이 있는 묘순이 바위 -성 가운데에서 툭 튀어 나온 바위

제단 부근의 건물지

백제 복국운동 기념비

기념비문

복원한 부분과 본래의 성벽이 마주치는 부분

복원 부분과 무너진 성벽

망루5에서 망루 1로 오르막 길의 성벽 -본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본래의 성벽이 남아 있는 부분

망루 5로 향하는 오르막길


망루 1에서 성벽은 동쪽으로 구부러진다. 여기는 눈이 아직 쌓여 있다.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북문지까지는 약간 아래로 내려가서 비교적 순탄한 길이다. 남쪽 성벽보다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망루 1에서는 대흥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가 보인다. 여기서 동으로 대흥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러나 북문지로 가는 성벽은 높지 않아 성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눈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북문지로 향한다. 이곳에서 북문지를 거쳐 망루 2나 북장대지까지 가는 길은 아주 순탄하였다. 성벽도 나즈막하다.이런 점으로 보아 마사리 쪽에서 오는 적을 대흥 쪽에서 막으려는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성은 신라의 군사를 막기보다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당이나 고구려의 군사를 방어하여 수도인 사비성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쌓은 성으로 볼 수 있다.


망루 2 북장대지에서 대흥 저수지와 대흥면 소재지가 다 내려다 보였다. 그러나 미세먼지 때문에 사진이 선명하게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북장대지 위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세워져 있고 보루답게 성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 성벽이 훨씬 튼튼하고 높다. 성을 이렇게 높게 쌓고 안에 흙을 채워 보루를 만들어 주변을 살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장대지로 가는 길의 평평한 대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망루 2

성의 안쪽에서 본 망루 2-보루처럼 안쪽에서도 돌을 쌓았다.

북장대지에서 보이는 대흥저수지와 대흥면소재지

잡목이 무성한 건물지-아직도 평평하다

망루 3


망루 3에서 남문지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르다. 솔잎이 깔려서 부드럽다. 남문지는 아까 살펴본 것과 같이 여러가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분 남쪽 성벽에는 무너진 부분과 원형이 남아 있는 부분이 뚜렷하여 성벽의 모습을 살펴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다른 곳과 별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당시의 성벽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너진 성벽과 원형이 남아 있는 성벽

돌의 크기와 축성의 방법을 뚜렷이 알 수 있는 부분

남문지 근처의 건물지로 보이는 공터와 무너진 성벽

건물지의 모습


임존성은 봉수산에 쌓았다고 해도 봉수산 정상은 더 멀리 있었다. 정상을 바라보는 곳에 쌓은 테메식 산성이다. 테메식이지만 골짜기를 안고 있으면서 테를 지은 성이다. 그래서 골짜기 안에 우물지라든지 건물지를 품고 있어서 마치 포곡식 산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산의 봉우리를 가운데 두고 테를 두른 산성이 아니라 산 능선을 따라서 아랫쪽으로 내려와 빙 둘러 쌓은 형태이다. 대전의 계족산성과 비슷한 형태이다. 그러나 계족산성은 정상부에서 산기슭으로 흘러내린 형태이지만 임존성을 마치 골짜기를 싸 안듯이 쌓은 산성이다. 그래서 성의 안에서 사람들이 거주했을 수도 있는 모습이다. 공주의 공산성과 유사한 형태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이 산성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이나 바닷쪽에서 내려오는 적으로부터 서울인 사비성을 막으려는 의도로 쌓은 것이 분명하다. 백제가 무너지고 나서 부흥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고 고려시대에는 몽고와 대결의 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저항 의지와 삶의 애환을 발견할 수 있었다.